소설리스트

갓싱어-144화 (144/260)

# 144

#144. 경계에서 (2)

걸음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하도 황당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틈에 연주 홀에서 나와 있었다.

니콜 교수와도, 하다못해 허먼 교수하고도 말 한마디 못 나눠봤다.

아니 허먼 교수가 뭔가 얘기를 하는 거 같긴 했는데, 그게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러다가 갑자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우르르 무대를 내려가더니 밖으로 나가기에 나도 엉겁결에 따라오긴 했는데…….

눈앞에서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스무 명 남짓한 남녀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걸까?

내가 아까 연주한 건 뭘까?

다시 생각해도 진짜 어이가 없네.

아니, 거기서 왜 도발을 해?

미친 거 아냐?

이제부터 두 달간이나 한솥밥을 먹어야 하는 마당에 처음부터 마음을 상하게 만들다니 제정신이냐고.

얼마나 건방지다고 생각들 할까?

이제 막 들어온 신입생 주제에.

함께 공연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아예 대놓고 덤벼든 셈이니 지금쯤 다들 어지간히 화가 났을…….

“뭐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에단이었다.

“어? 어, 아냐.”

“아니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에단이 툭 하고 내뱉는다.

“너란 놈은 진짜……. 후우! 네가 양파냐? 까도 까도 나오게?”

쿡!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대?

마루 누나한테 들은 걸까?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식 표현에 웃고 있자, 에단이 싱겁다는 듯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생이 시건방진 네가 설마하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에단은 앞서 가는 사람들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

“다들 멋쩍어서 그러는 거니까.”

멋쩍어?

뭐가?

의아해할 때였다.

그러자 에단이 한숨을 푹 내쉰다.

“하아! 말을 말아야지.”

그러곤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무신경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거 지금 다른 나라 말……. 아, 영어니까 다른 나라 말인 건 맞구나. 아무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아까부터 머리가 살짝 굳어서 앞뒤 문맥이 이어지질 않는달까.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대충 알겠다.

에단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들을 했는지를.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화가 난 게 아니라, 다들 당황한 거네.

피아노 협주곡인데, 피아노를 띄워 줄 생각은커녕 죽자고 덤벼들었으니까.

아마도 신입생의 도발에 걸려들어 막 나가버린 자기 자신들이 창피한 걸지 모르지.

그럼 저들도 나처럼 서로 어떤 얼굴로 지내야할까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통로를 걸어 모퉁이를 꺾자,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벌써 갔을 줄 알았더니만.

“여어, 루키! 오늘 재밌었다!”

“올해 들어왔다며? 연주, 제법이었어.”

“근데, 더럽게 투박하더라. 앞으로 많이 다듬어야겠더라고.”

“앤서니! 너나 잘해. 아까 얼굴이 시뻘게져선 활을 켜던 건 어디의 누구더라?”

“린! 너야말로…….”

“난 제니퍼 린. 잘 지내보자.”

앤서니라고 불린 남자의 말을 싹 무시하고 악수를 건네오는 동양인 여자. 여기서 태어났거나 그게 아니면 오랫동안 미국에서 지냈는지 말투며 행동이 전혀 동양인 같지 않았다.

“아, 난 김도준.”

“오! 킴! 너였구나!”

“안 그래도 빌보드 6위까지 올라간 싱어가 우리 학교에 있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그게 쟤야? 후우! 역시 다르구나. 천재는.”

“큭큭큭. 누구랑은 싹수부터 다르단 거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말들.

언제 침묵을 지키고 있었냐는 듯……. 더럽게 말들 많네.

알고 보니, 다들 수다쟁이였잖아!

웃으면서 그들과 악수도 하고 어색한 포즈로 포옹도 하면서 나름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꽤 치더라. 거칠긴 하지만.”

나직한 음성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

곱슬머리에 반쯤 뜬 눈이 인상적인 남자, 아즈마엘이라고 했었지 아마?

아까완 다르게 무심한듯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손을 마주 잡자, 아즈마엘이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칭찬 아닌데?”

그러면서 내 손을 쥔 채 힘을 준다.

어? 이거 봐라?

감정이 실린 거 같은데?

속으로 웃으면서 나는 오히려 손에 힘을 풀어버렸다.

그러곤 물었다.

“손에 힘은 왜 줘요?”

이런 경우 대개 그렇듯 나 역시 힘을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술렁술렁.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자, 아즈마엘이 흠칫하는 얼굴이다.

피식.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싸움은 좀 하는데.”

그러곤 다시 물었다.

“트럼펫 부시죠?”

“…….”

“중간에 삑사리 내시던데.”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풉!”

“웃지마, 인마. 미엘만 삑사리 낸 것도 아니잖아.”

“큭큭큭. 그래도 웃기잖아? 아즈마엘 표정 좀 봐!”

아주 표정이 없지는 않은가보다.

아즈마엘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인지, 다들 웃고 난리다.

갑자기 시장바닥처럼 시끄럽게 변해버린 상황임에도 아즈마엘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놓더니 내 눈을 한차례 쳐다보곤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재밌네, 이건 이것대로.

***

저녁때가 다 되었기 때문에 학교 근방에서 에단과 간단히 식사를 하곤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이게 그런 건가?

무아지경, 물아일체, 무위자……. 이건 아니고.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는 것.

분명 피아노 연주를 할 때 무대 위에 다 함께 있었지만, 내 눈엔 건반만 보였다.

그리고 웃기게도 소리들이 보였다.

들리기만 한 게 아니라 보인 것이다.

물론 진짜로 보였다는 건 아니다.

그렇게 느껴졌다는 건데…….

아, 다시 생각해도 미치겠네.

뭘까, 이거?

내가 너무 음악만 생각하다 보니 맛이 간 건가?

정신과 의사라도 찾아가 봐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집 앞이다.

찰리스에 출근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가량.

그래, 일단 좀 쉬자.

그동안 오늘을 대비해 줄창 연습만 해댄데다가 오늘 연습으로 너무 지쳐버렸다.

지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간 뒤, 곧바로 옷을 벗고는 물을 받아 욕탕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자, 한결 낫다.

바짝 조여져 있던 몸만 이완되는 게 아니라 머릿속도 여름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느낌이다.

대신 몽롱해지는 게 잠이 솔솔 오는데…….

이대로 잤다간 다음날 익사체로 발견되지 싶어서 얼른 고개를 흔들어 털었다.

아이, 씨! 진짜 뭐 될 뻔했네.

지금은 이 집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여기서 잠들었다가 누구 하나 찾지 않은 채 죽을 수야 없지.

아저씨나 마루 누나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저씨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오감 운운하셨던 얘기가.

흠, 혹시 이게 그건가?

나중에라도 아저씨께 전화 한번 드려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몰려드는 잠을…….

푸아!

안 되겠다.

진짜 이러다간 여기서 잠들어버릴 거 같다.

결국, 나는 서둘러 욕탕에서 몸을 빼냈다.

순간 어지러움이 일었지만, 벽을 잡고서 정신을 차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욕실을 벗어났다.

“더럽게 피곤하네.”

참네. 매일 하는 게 연주고, 작곡이며 노래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축축 처지는 느낌이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건데.

“그냥 쉴까?”

찰리한테 사정을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됐다.

쉬긴 뭘 쉬어.

내가 또 근성을 빼면 시체잖아.

설마 죽기야 하겠어?

기껏해야 몸살 정도겠지.

근데, 진짜 희한하긴 희한하네.

겨우 한 시간 정도 연습한 것뿐인데, 이렇게 힘들다니.

협주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러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20분 정도 남았다.

옷을 꺼내 입은 뒤, 소파에 잠시 늘어져 있다가 5분 정도 남겨놓고 건물에서 내려갔다.

***

“아, 왔어?”

언제나처럼 반겨주는 찰리.

“오늘도 손님 많네요?”

“다 네 덕분이지.”

“에이, 뭘요.”

멋쩍게 웃고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아닌게아니라 빈자리가 얼마 없다.

서너 테이블 정도 남았는데, 그것도 아마 내가 피아노에 앉고 나면 머잖아 차게 되겠지.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단골이 는 탓도 있지만, 요즘 들어 여기 피아니스트가 빌보드에도 올랐던 가수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모양이다.

뭐, 아직 찰리는 모르는 눈치지만.

하긴, 내가 건물주라는 것도 모르는데.

피식.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가 귀찮아서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건물을 관리하는 대신 숙소 겸 작업실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말했기 때문.

순진한 건지, 아니면 짐작하면서도 그냥 넘어간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뚜둑, 뚜두둑.

피아노 앞에 앉으며 손가락 마디를 풀었다.

그러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오늘은 뭘 칠까 하고.

음, 조금 가벼운 걸로 가볼까?

학교에선 좀 힘들었으니, 여기선 좀 더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건반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영화 ‘오즈의 마법술사’의 OST인 ‘오버 더 레인보우’의 선율이 가게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lofty.”

-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lofty.

There's a land that I've heard of once in a lullaby.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illusion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저 높은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는.

옛날에 자장가에서 들어봤던 그런 곳이 있을 거야.

저 무지개 너머 파란 하늘이 펼쳐진 곳이 있겠지.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 꿈들이 이루어질 거야.

화려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건반 소리에 맞춰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내가 듣기에도 부드러웠다.

그래서 그런 걸까?

마음이 푸근해졌다.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까지 지으며 노래를 이어나갔다.

“Sometime I'll wish upon a star.(언젠가 나는 별님에게 소원을 빌 거야.)”

그때였다.

어?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설마 설마 하면서 계속 노래했다.

연주를 이어나가며.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그리고 구름 저 너머에서 깨어나겠지.)”

망할!

이거 진짜 뭐 된 거 같은데?

점점 더 어두워지던 시야가 급속도로 캄캄해지고, 기어이 눈앞엔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됐다.

심지어는 내 손까지도.

아니, 보이는 게 있긴 있다.

건반.

피아노 건반만이 눌러졌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를 반복하며 연주를 해나가고 있었다.

마치 마법처럼.

아, 돌겠네!

왜 이러는 거냐고.

어째서 연주만 하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

몰입?

이렇게 짧은 순간 만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아, 씨! 설마 이거 습관처럼 굳어지는 건 아니겠지?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래, 없었다…란 표현보단 싫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 같다.

엄청 난감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던 것이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지?

-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그곳은 걱정이 레몬 사탕처럼 녹아버리는 곳일 거야.

굴뚝 꼭대기보다 더 높은 저 위, 거기서 날 찾아줘.

그리고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아니 진짜로 보인 건 아니고,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손을 거쳐 피아노 건반을 통해 흘러나온 음들과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허공 중에서 만나 선명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하아. 맞구나.

나 미친 거 확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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