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 종이 한 장 차이? (2)
교실 안에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날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선 질시와 시기, 그리고 의아함이 가득했다.
특히 도미니크.
몸을 떨던 그는 끝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던지 소리쳤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자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니콜 교수한테 돌직구라니.
봐라.
우리 교수님, 입꼬리가 광대뼈까지 솟구치고 있잖냐?
이번 경합?
크리스마스 콘서트?
그게 문제가 아니다.
쯧, 넌 이제 교수님한테 찍힌 거라니까.
아까 대체 뭘 들은 거냐고.
분명 주관적인 심사를 하겠다고 했잖냐.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그만큼 자존심이 상한 건지…….
그렇긴 한데, 나도 좀 의아하긴 하다.
분명 기교면에서 보자면 도미니크의 실력이 나보다 나았으니까.
그만큼 녀석의 연주는 훌륭했다.
다만…….
그 훌륭하기만 한 연주가 문제였을 뿐.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니콜 교수의 얘기.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내가 어디서 그녀에게 점수를 땄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왜 도미니크를 납득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웃으면서 말씀하시지만, 어째 날이 바짝 선 느낌.
그렇게 시작한 얘기는…….
“언제 내가 너희한테 잘 치라고 말한 적이 있었나?”
한순간 바뀐 말투였다.
덕분에 공기가 달라지고, 모두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특히 도미니크의 얼굴은 점차 하얗게 질려가는 중이었다.
“기교? 흥! 그런 건 가르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강의실 곳곳을 훑어나가던 니콜 교수의 시선이 도미니크의 얼굴에 가서 꽂혔다.
“니들은 너희가 잘난 줄 알지?”
비릿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다.
“그럴 만도 하지.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을 테니. 근데, 이젠 기억도 못 하는 거야? 너희가 왜 천재 소리를 들었었는지? 그냥 피아노를 잘 쳐서? 그런 애들은 주위에 널렸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데 주위에선 유독 너희만을 치켜세웠지. 왜일까?”
또다시 변하는 니콜 교수의 눈.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강의실 공기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냐.”
학생들, 특히 도미니크를 무표정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여러분이 제게 들려준 연주가 과연 마음을 움직였을지 다시 한번들 생각해보길 바래요.”
***
으, 다시 생각해도 몸이 다 떨린다.
진짜 저런 여자랑 결혼하는 남자는 누구려나.
만약 나랑 친한 사람, 아니 얼굴만 아는 사람이라도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을 정도다.
순간순간 눈빛이 변하고, 말투가 거칠어졌다가 부드러워졌다가, 따스한가 싶으면 어느새 한없이 차가워지는 우리 교수님. 스승으로는 최고인데, 연인으로는…….
아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축하해!”
“해냈구나!”
교수님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크리스티나와 조안나가 축하인사를 해왔다.
다른 이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날 힐끗거리곤 지나쳤고.
아, 도미니크?
녀석이 내게 다가온다.
흠, 일그러진 얼굴이 볼만하다.
근데, 뭐라고 하려나?
악당들이 흔히 하는 대사를 꼽으라면 거의 일 순위를 다툴 ‘두고 보자!’를 외치…….
날 한차례 쏘아보곤 그대로 지나치는 도미니크였다.
의외긴 한데, 이건 이것대로 녀석답다고 느껴졌다.
자존심이 상한 건 상한 거고, 여기서 더 못나게 굴었다가는 자신이 더욱 비참해질 거라는 걸 아는 거겠지.
어째 행태가 재벌 3세들하고 비슷해서 그런지 대충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달까.
아무튼, 거듭 크리스티나와 조안나의 축하를 받으며 강의실을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부르르르.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응? 교수님이 왜?
방금까지 봐놓고 어째서 또 부르시는 걸까?
“미안한데, 먼저들 가라.”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교수님이 좀 보자고 하시네?”
***
“자, 받아요.”
난 또 무슨 상장이라도 주는 줄 알았네.
다리를 꼰 채로 내미는 종이를 받아 읽어보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스케줄 표였다.
현재 10월 마지막 주. 다시 말해 공연까진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오케스트라의 특성상 참여하는 연주자 수만 몇 명이던가. 교향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보니 공연 자체도 대규모. 연주자들끼리 합을 맞추고 공연을 준비하기에 넉넉한 시간은 아닐 터다.
하지만, 줄리아드에선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는 모양이다.
하긴.
9월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재능 이 철철 넘치는 학생들 중에서도 거르고 걸러 뽑은 연주자들인 걸 감안하면 두 달도 감지덕지란 거겠지.
“여기도 카네기 홀이네요?”
“그렇게 됐어요.”
턱을 괸 채 웃으며 대답하는 금발의 미녀. 저 미소에 속으면 절대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물었다.
“그럼, 전 이틀간 무대에 서는 셈인데…….”
“왜요? 걱정돼요?”
“그런 건 아니지만.”
소리는 내진 않으시지만, 다시금 웃으시는 교수님이셨다.
그러더니 불쑥 물어오셨다.
“킴. 왜 당신이 뽑힌 줄 알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얘기했다.
“킴도 알지? 줄리아드에 오는 학생들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하나같이 천재들이야. 근데, 킴은 분명 천재는 아닌데……. 음 뭐랄까. 시간을 뛰어넘은 듯 능숙한 면모를 보인달까.”
오, 날카로우신데?
내가 노래방을 탈출한 이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래, 맞다.
난 천재가 아니다.
근데, 우습게도 내가 아니라고 하면 할수록 다들 감탄만 할 뿐이다.
심지어는 이런 소리까지 들어봤다.
세기를 아우르는 천재인데도 겸손하다고.
진짜 닭살 돋아 죽는 줄 알았더랬지.
아니 왜 사람이 진실을 말해줘도 곧이곧대로 듣질 않는지.
아무튼, 다들 날 천재로 알고 있는데…….
“훗! 표정이 왜 그래? 놀랐어? 설마 내가 네 지도교수인데,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했을까 봐?”
그러니까요.
교수님 같은 사람이 좀처럼, 아니 어디 있어야 말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얘기가 좀 샜는데, 오늘 내가 킴을 부른 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서야. 방금 말했지만, 그 천재들을 놔두고 킴을 뽑은 건……. 그래, 오늘의 킴은 빛이 났어.”
빛?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런 게 보이나?
고개를 갸웃거리자, 니콜 교수가 픽하고 웃는다.
“천재들은 천재이기 때문에 곧잘 빠지곤 해.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근데, 범재들은 달라. 아, 물론 킴이 범재라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말고. 어쨌든, 범재들은 쉴 틈이 없다는 거지. 가는 길마다 오르막에 굽이굽이 꼬부랑길인데, 딴 생각할 틈이 어딨겠어? 죽을 둥 살 둥 노력해도 천재들 꽁무니에 닿을까 말까 한데 말이야. 그치?”
“그거야 그렇죠.”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야. 천재들이 잠시 멈춰 서서 남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 할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범재들은 앞만 보고 달려가거든.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 결국,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비슷해지는 거야. 그리고 개중에는 범재도 아니고 천재도 아닌, 재능 따윈 씹어먹은 채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하는 괴물이 튀어나오는 거지. 바로 킴처럼.”
어?
이거 칭찬 맞지?
조금 머쓱해져서 코밑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천재랑 범재랑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 얘…….”
“어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킴!”
“…….”
“종이 한 장 차이라니?”
“……?”
“사람들이 많이들 착각하는데……. 천재랑 범재와의 거리는 말이지. 지구랑 2,000억 광년쯤 떨어진 행성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니까!”
“……!”
헐. 대체 그 정도면 어느 정도란 건지.
아니, 설사 그렇다 해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말할 건 또 뭐 있나?
괜히 사람 기죽게.
뭐, 그만큼 교수님은 날 범재라곤 생각지 않으시는 거 같지만.
그동안 보아온 천재들과는 다르지만……. 그래,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
“호호호.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죽도록 노력해야 해요, 킴은. 안 그러면 금방 도태되고 말 거에요. 아, 그리고 만일에 하나라도 이번 공연에서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교수님이 말을 하다말고 한 템포 쉬는 사이,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마른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듣지 말아야 할 얘기를 듣는 기분이라서.
젠장!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땐 각오해야 할 거야.”
대체 뭘 각오하란 건지.
그걸 얘기해주지 않는 게 더 무서웠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들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내뱉고선 방을 빠져나왔다.
***
“독한 자식!”
당당히 이번 공연의 바이올리니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에단은 벌써 며칠째 저 소리다.
녀석과 함께 걸으며 말했다.
“그만 좀 해라. 한 번만 더 들으면 백번이다, 백번!”
“내가 너 처음부터 알아봤지만, 진짜 독하다. 어떻게 두 달 만에……. 하아, 진짜 독한 놈!”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서 자체 필터링에 들어갔다.
자체 필터링이 뭐냐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다.
그렇게 교내에 있는 연주홀로 향하면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휘자가 허먼 교수님이라…….
워낙 바쁘신 분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내게 일이 많았던 때문인지 줄리아드에 들어올 때 도움을 주신 분인데도 좀처럼 만나뵐 기회가 없었는데.
인연이 묘하긴 묘하네.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올해 크리스마스를 허먼 교수님이랑 함께 보내게 될 거라곤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었다.
상념에 휩싸인 동안 다다른 문앞.
이제 이 문을 열면…….
스륵.
내가 손을 대기 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보인다.
마치 우린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뭐야?”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고, 나 역시 그 남자를 바라보았는데, 특이하게도 반쯤 감긴 눈을 한 남자였다.
곱슬머리를 한.
근데 아랍인 같기도 하고, 서양인 같기도 하고…….
한국에서만 살아서 그런가, 어째 구분이 잘 안 간달까.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
“뭐해? 얼른 들어가지 않고.”
에단의 재촉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움찔.
처음 와보는 연주홀이었는데, 뭔가 압도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건 연주홀 자체가 주는 느낌이라기보단, 무대 쪽에 저마다 악기를 품고서 앉아 있는 연주자들 때문일 터였다.
관객석 쪽은 불이 꺼진 채였고, 무대 쪽에만 불이 들어와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었다.
“오랜만이군.”
계단을 밟아 내려가자, 한쪽에 서서 악보를 확인하고 계시던 허먼 교수님이 아는 체 해왔다.
“예. 그동안 건강하셨죠?”
“하하하. 그게 뭔가? 그거 혹시 한국식 인사?”
재밌다는 듯 웃으시는 허먼 교수님께 마주 웃어 보이곤 피아노를 가리켰다.
“전 저기 앉으면 되나요?”
허먼 교수님은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리곤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웃음 속에는 기꺼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안목에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게 기쁘신 걸까?
부담되네.
그래도 뭐, 여기까지 왔는데 어쩔 수 없지.
무대 한옆에 놓인 피아노에 가서 앉았을 때였다.
어?
저 사람은…….
아까 본 곱슬머리 남자가 들고 있는 건 트럼펫이었다.
그때 눈이 마주친 남자.
반쯤 감았다고 할지, 떴다고 할지. 어딘지 모르게 졸린듯한 눈을 하고 있던 남자는 트럼펫 연주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아즈마엘은 벌써 오 년째지? 올해도 잘 부탁해?”
아즈마엘?
오 년째라면……. 졸업생인가?
아니면 아직 졸업을 안 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허먼 교수가 다시 얘기했다.
“자, 그럼 다들 악보들 확인했겠지만 쉬운 곡이 아니에요. 두 달 만에 소화하기엔 벅찬 감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좀 빡빡하게 가겠어요.”
허먼 교수의 말과 함께 첫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뭐, 뭐야?
트럼펫을 저렇게까지 분다고?
정말이지 깜짝 놀랄만한 실력이었다.
니콜 교수님이 얘기한 천재와 범재와의 간극. 지구와 2,000억 광년 떨어진 행성 간의 거리가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곧이어 피아노가 들어갈 타이밍이었으니까.
나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곤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따단……딴……따라라라라단.
곧이어 울리기 시작하는 피아노 소리.
그 순간이었다.
허먼 교수를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놀란 눈들을 하고서.
그중에서도 특히, 트럼펫 연주자.
아즈마엘이라고 했던가?
어라?
근데, 반개한 눈이 아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