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 종이 한 장 차이? (1)
“어머, 킴! 그 손가락 왜 그래?”
크리스티나가 놀라 묻고 있었다.
“아, 별거 아냐.”
나는 손을 주머니에 꽂아넣고는 한층 걸음을 빨리해 앞으로 나아갔다.
별스럽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하! 진짜 저 병신이…….”
탁!
에단이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손쓸 틈도 없이 쑥 빼낸다.
그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런가 싶었던지, 크리스티나와 조안나가 다가왔다.
그녀들이 보든 말든 손목을 강하게 쥔 채로 내 눈앞으로 보란 듯이 가져오는 에단.
“너 미쳤냐?”
“뭐가.”
“몰라 물어? 연주자 손이……. 하아, 진짜! 기가 막혀서. 사람 몸, 망가지는 거 한순간이란 거 몰라?”
내 눈앞에 있는 오른손.
물론 내 손이다.
문제는 손가락인데…….
마디마다 파스가 덕지덕지.
“너 무슨 운동하냐? 미친 새끼! 너 이번 경합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짜야, 킴?”
에단의 구박에 이어 크리스티나가 걱정스럽게 묻고 있을 때, 조안나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이.
“킴. 네 마음은 알겠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
“이번 한 번만 피아노치고 말게 아니잖아? 이러다가 손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안타까운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나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괜찮아. 예방 차원에서 붙인 거니까, 너무 걱정들 마.”
농담으로 받아치려다가 제대로 둘러댔다.
워낙 진지한 눈빛들인지라.
에휴. 망할 자식들.
그냥 좀 넘어가 줄 것이지.
하여간, 손을 무슨 금덩이라도 되는 듯 여기는 놈들인지라 이쪽으로는 더럽게들 민감하다니까.
한데, 아나 몰라?
내가 니들처럼 천재가 아니거든.
그뿐이면 말을 안 한다.
너희처럼 어릴 때부터 악기를 만져온 것도 아니라서, 이놈의 막손은 마음처럼 따라주질 않는다니까 그러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웃어 보였다.
“그만들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굴며 에단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냈다.
그러곤 막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앞을 막아서는가 싶더니, 비웃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비릿한 조롱이 날아들었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빌보드에까지 이름을 올리신 스타 아니신가?”
하아, 이 자식은 또 왜 시비야?
패거리들을 이끌고 복도를 막고 있는 도미니크. 놈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너 그렇게 할 일이 없냐?”
꿈틀.
눈썹이 일그러진다 싶은 순간, 놈이 말했다.
“나야말로 묻자. 너 그렇게 할 일이 없는 거냐?”
눈살을 찌푸리며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도미니크는 크리스티나를 한차례 힐끔거리곤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둘 중에 누군가 했더니, 크리스티나였구만.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 놈이 다시 얘기했다.
“그냥 너 하던 거나 잘해라. 노래 부르던 놈이 무슨 클래식이야? 응? 솔직히 되겠냐? 재능은 둘째치고, 시간이 문제 아니겠냐고, 시간이. 몰라? 무슨 일이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절대적인 시간량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거?”
안다, 이 새꺄!
네가 무슨 족집게 과외 선생이냐?
아주 콕콕 잘도 짚어주는구나.
“도미니크.”
“……?”
“너 나 마음에 안 들지?”
“큼, 그야…….”
“그래. 그럴 거야. 원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대개 그러니까. 자신보다 좀 잘나간다 싶으면 그게 그렇게 눈꼴 시릴 수가 없거든.”
“뭐? 이 자식이 진짜!”
“지난번에 말했지만, 한 대 칠 각오가 없으면 그냥 닥치고 들어.”
꾹 다문 입술로 날 바라보는 놈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오른다.
몸도 부르르 떠는 게 여기서 조금만 더 도발했다간 진짜 날 한 대 칠 판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걱정 따윈 되지 않았지만.
대신 확실히 말해주었다.
“근데, 나도 네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거든? 웬 줄 알아?”
“…….”
“너, 재수 없거든.”
쿡! 하는 웃음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고,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던 도미니크의 낯짝이 팍 일그러지는 걸 보니 누가 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 한번 제대로 꺾어주려고.”
기가 막힌다는 듯 날 보던 도미니크가 설마 하는 눈이 되어 물어왔다.
“경합 말하는 거냐?”
“응. 내가 너랑은 달라서 주둥이만 털어대는 타입이 아니거든.”
으득.
이를 한차례 갈아댄 도미니크가 이내 이죽거렸다.
“어이가 없네. 네 눈엔 내가 좀 물렁하게 보였나 본데, 나 콩쿠르에서도 몇 번이나…….”
놈이 자기 자랑을 해대는 걸 더 줄어들 이유 따윈 없었다.
“가자.”
도미니크를 일별하고 걸음을 내딛자, 놈이 몸을 덜덜 떠는 게 느껴질 정도다.
참네, 이 정도도 못 참는 걸 보면 어지간히 다혈질이네.
그나저나 너무 몰아붙였나?
저 새끼, 분명 이를 박박 갈며 경합에 나설 텐데.
쯧, 나도 문제는 문제다.
은근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내는 타입이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았다.
저 자식을 밟아주려고 피아노를 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
경합일.
테스트에 앞서서, 강의실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다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뭐, 나도 그중에 하나였지만.
차라리 노래를 부르라면, 아니 하다못해 기타를 치라면 다들 입이 떡 벌어지게 치겠지만, 피아노에 관해선 아무것도 장담 못하겠다.
다만, 한가진 분명하다.
할 만큼 했다는 것.
지난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쳐댔다.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덕분에 마디마디 파스가 안 붙은 곳이 없었다.
연주의 주가 되는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까지도.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된다면 그건 할 수 없는 거겠지.
아직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니까.
탁! 탁!
니콜 교수가 지휘봉으로 악보대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얘기한대로 오늘 테스트를 하겠어요. 다들 알겠지만, 오늘 경합에서 뽑힌 사람은 이번 크리스마스 공연 때 연주자로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한차례 둘러보곤 그녀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진짜!
제발 저렇게 좀 웃지 말지.
그러니까, 마녀라는 소리를 듣는 거라니까요.
“뽑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니까 그리들 아세요.”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뽑겠다는 얘기다.
역시 교수님답다고나 할까.
작게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니콜 교수가 호명했다.
“조안나.”
경합의 시작이었다.
***
도미니크의 연주를 듣고 난 뒤 든 생각은 이거였다.
잘 치긴 더럽게 잘 치네.
그건 그렇고, 하필이면 이 자식 뒤일 게 뭐람.
니콜 교수님이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일부러 이렇게 배치하신 거 같은데.
하여간 심보가 고약해요, 고약해.
“킴. 시작해요.”
니콜 교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피아노 앞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그래,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이를 수 있을 거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 날 공연.
우선은 이것부터다.
날숨을 내쉬며 곡을 떠올렸다.
쇼팽 C#단조, 작품번호 66.
맞다, 그 곡.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행씨바를 외치며 듣는 그 곡이다.
심호흡 한번과 함께 뜬 내 눈에 파스가 감긴 손가락들이 보인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 곡이 그렇게 만만한 곡이 아니거든.
저쪽에서 날 경쟁상대로도 보지 않고 있는 천재들, 그중에서도 특히 도미니크 같은 놈들이야 어떤지 몰라도.
머릿속에서 악보가 넘쳐흐르고, 어떻게 쳐야 하는지 안다고 그게 소리가 되는 건 아니니까.
수없이 치고, 또 치고.
밤새 손가락이 아파서 잠을 못 잘 정도로 쳐댔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첫 음이 울렸다.
내 손끝에서 시작된 즉흥환상곡이 강의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쇼팽이 가장 처음 작곡했으나 죽은 뒤에 출판되면서 가장 마지막 곡이 된 즉흥곡의 첫 음을 때린 손가락.
그 순간, 습관이 되어버린 듯 왼쪽 손이 허공을 내젓는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꼭 춤동작 같다고.
그러나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의미 없는 몸짓이 아니다.
그렇다고 겉멋도 아니었다.
타이밍.
자연스럽게 익힌 리듬감이 그렇게 표출되고 있을 뿐.
그렇기에 정확한 타이밍에 폭풍 같은 질주가 시작된다.
그것은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격렬하게 몰아치는 바람이다.
기승전결로 치면 승부터 시작되는 곡이 바로 즉흥환상곡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간 빠른 템포로 몰아치는 음들.
손가락이 쉴 새 없이 교차하며 건반을 오간 끝에 격렬하기만 하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미풍이 된다.
마치 꽃밭에서 꿈결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주위를 맴돌며 밝게 웃음 짓는 듯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생기발랄한 음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길 얼마간. 다시금 바람은 거칠어진다. 아니 열정적으로 변모해 휘몰아친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한다.
열정은 금세 분노가 되고 다시금 슬픔이 된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져 나가는, 동시에 금방이라도 멎을 듯 숨 쉬는 바람.
그것은 마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애처롭게 매만지는 실프처럼 느껴진다.
그 손길은 갈수록 더뎌지고, 줄어들다가 끝내는 서글픔만 남긴 채 사그라진다.
마치 흩어진 꿈처럼.
연주가 끝났지만, 강의실은 조용하기만 하다.
니콜 교수님조차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강의실이 깨어난 것은 니콜 교수가 눈을 떴을 때였다.
그때까지 넋이라도 잃은 듯 말없이 날 바라만 보고 있던, 혹은 눈을 감은 채 여운을 느끼고 있던 이들. 크리스티나를 비롯해 조안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도미니크까지.
그들을 보며 나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천재들이기 이전에 그들을 아티스트라고 불러 마땅한 까닭을.
경쟁자인 내 연주를 듣고, 경쟁자임에도 박수를 칠 수 있는 저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음악을 할 자격이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좋군요.”
니콜 교수의 감상평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눈빛은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파스로 도배하다시피한 내 손가락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매는 이미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까지 연주를 마친 후,
“테스트는 끝났지만, 설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설사 안 됐다고 해도 실망하거나 해서는 안 돼요.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니콜 교수의 발표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다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마녀라고 불리는 만큼, 번복 따윈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니콜 교수의 입에서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그 사람을 제외한 모두는 연주자에서 관객으로 입장이 바뀐다.
그것이 바로 피아니스트의 숙명이다.
다른 악기에 비해서 설 자리가 그만큼 적었기에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정상에 선 연주자는 찬사 속에서 찬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
그렇다.
피아니스트는 건반 위에서 숨 쉬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니콜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바늘 하나라도 떨어뜨렸다간 맞아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될지도…….
적어도 싸늘한 눈총을 받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다들 기대와 설렘, 더불어 불안함과 긴장감을 안고서 니콜 교수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킴.”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도미니크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막판까지도 그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했다.
니콜 교수가 이름만 불렀다 뿐이지, 이렇다 할 얘기를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니콜 교수는 가차없었다.
“올해는 킴이 고생 좀 해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