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 그냥 꽃길만 걸으라고? (3)
예전부터 궁금하던 게 하나 있다.
부처님 오신 날도 그렇고, 사람들은 왜 남의 생일날 축제를 벌이는 걸까?
성인이라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분들이라 그런가?
축하의 의미로 그런다는 것쯤은 나도 아니까.
아, 이건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이게 궁금하다는 건 아니다.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않던가?
여기서 질문.
어째서 생일 전날, 즉 이브 날 사람들은 축제를 벌이는 거지?
보통은 생일날 파티를 하기 마련 아닌가?
혹시 12월 31일 새해 마지막 날 신년을 기다리며 카운트다운을 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어릴 때부터 그게 줄곧 궁금했었다.
더불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물론 예수님처럼 되겠다는 뜻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생일. 그러니까 전날에 한번, 당일 날 또 한 번 축하를 받으면 좋겠다는 치기 어린 바람이었다.
근데,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일 전날 파티 아닌 파티를 거하게 하고 났더니…….
막상 당일이 되니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기분이다.
실제로도 다들 파김치 꼴이 되어 있었다.
그런 채로 일어나 좀비처럼 허우적거리며 한마디씩 건네온다.
“생일 축하해.”
“축하한다, 동생아.”
“축하드려요.”
“오래 살아라.”
그나마 어머니만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주고 있었다.
“아들, 이제 한 살 더 먹었으니까 면허도 따고 하고 싶었던 것도 하면서 살아. 만날 일이랑 공부만 하지 말고. 그리고 미국에 혼자 있다고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면 안 된다? 호호호. 엄마가 아들 사랑하는 거 알지?”
닭살 한 줌도 잊지 않으셨지만.
희주의 경우엔 같은 말이라도 태도가 달랐달까.
날 생각한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해 주었다.
“저……. 그, 그러니까, 18살 생일을 진심 축하해.”
아니, 그게 뭐 그렇게 부끄러운 말이라고 저러는지.
얼굴이 살짝 빨개져서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더니 희주는 결국 자폭해버렸다.
“뭐, 뭐라는 거니? 헤에.”
혀를 쏙 내밀곤 서둘러 말을 마치며 돌아서는 희주였다.
“도준아, 올해도 건강해야 해?”
그리고 4층으로 내려가기 전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걸 보면서 나 역시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턱하고 내 목을 둘러오는 두툼한 팔뚝.
“여어, 저렇게 예쁜 걸프렌드가 있다고 왜 말 안 한 거냐?”
“치워라. 목 졸린다.”
디알로에게 을러보지만, 이빨도 안 먹힌다.
아놔, 이 백곰 같은 자식이 진짜!
“어? 몰랐어요? 지난번에 보니까 둘이 엄청 썸 타던데?”
제롬까지 나타나 빙글빙글 웃고 있다.
“썸? 그게 뭔데? 여름이라는 건가? 뜨겁다?”
“그건 핫이고!”
“하하하. 그런 거 있잖아요. 밀당 같은 거?”
아니, 제롬 이 자식은 이런 말들은 다 어디서 알아오는 거야?
“밀당이 뭔데?”
디알로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 되었고, 그 틈에 나는 놈의 팔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푸쉬 앤 풀! 서로 밀고 당기면서 간보는 거요.”
“간을 봐? 간이 뭔데?”
끝도 없을 거 같은 이 만담 콤비들에게서 멀어지며 한마디 툭 내던졌다.
“궁금해하지 마라. 둔탱이 같은 자식아! 간보는 거 따윈 너랑 평생 관련 없을 테니까.”
그러곤 가족들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좀 그렇죠? 우리 나가서 시내 구경할까요?”
내 말이 그렇게 웃긴가?
다들 깔깔 웃고 난리다.
그 와중에 형이 촌스럽다고 한 건 진짜 충격이었다.
“뉴욕 처음 와보냐? 뭔 관광이야? 난 그냥 편하게 집에 있으련……. 끅.”
어느새 나타난 형수가 형의 등 뒤에서 배시시 웃고 있다.
형은 움찔했다가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억지웃음을 내보이고.
명진이 형, 다리 위에 자리 깔아도 되겠네.
형이 어떤 남편으로 평생을 살아갈지 눈에 훤히 보인다.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래요, 그럼. 각자 알아서 보내시고, 이따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죠, 뭐.”
“오오! 오늘도 파티인가?”
뒤에서 디알로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오늘은 진짜 밥만 먹을 생각이었다.
어제 한바탕 했으니까 유난스럽지 않은, 조용한 생일을 보냈으면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바람은 단 한 시간 만에 박살 났다.
빠아아아아앙.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경적소리.
뜨끔.
뭔가 기시감이 들면서 불안해졌다.
그때였다.
“우워, 저 컨테이너들은 다 뭐야?”
창밖을 내다본 형의 물음에 누군가 대꾸해주고 있었다.
대답이 아닌 지적질로.
“트레일러겠지.”
응?
누나?
언제 올라왔담? 마루 누나가 날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마치 별님에게 소원을 빈 소녀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자 환하게 웃는 것처럼.
내 말이 맞지? 하는 눈빛이다.
후우, 아닌게아니라…….
찰리스 건물 앞 도로에 서 있는 두 대의 트레일러들.
다들 저게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지만, 나를 비롯해 회사 식구들로선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작년에 비해선 줄긴 했지만……. 아니, 배송 트럭 대신 트레일러가 온 거니까 오히려 규모면에선 커진 건가?
아무튼,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딩동!
시기적절하게 초인종이 울리고.
당연하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샤오린이 해맑게 웃으며 외치고 있었으니까.
“도준 씨! 해피 버스 데이!”
파앙!
뒤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폭죽을 쏘고 있는 브레드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젠 꼬리처럼 당연하다는 듯 붙어 다니는 실비아가 카메라를 터뜨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나라의 팬들에게서 온 선물들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역시 중국팬들의 씀씀이는 정말이지 대륙급이 아닐 수 없다.
온갖 선물 상자들을 토해놓듯 내린 뒤, 트레일러가 빠져나갔을 때였다.
부릉……부아아아아아앙!
배기음과 함께 빨간 스포츠가 한 대가 질주해오더니 트레일러가 서 있던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내린 건…….
브라이언이었다.
눈이 뻘건 모습으로.
그걸 본 디알로가 콜린을 향해 외쳤다.
“네 차 가져왔는데?”
“어, 그래?”
그리고 잠시 후,
집으로 올라온 브라이언이 신경질적으로 키를 내던졌다.
그걸 받은 콜린이 씨익 웃으며 내게 키를 건네주며 말했다.
“해피 버스 데이.”
옆에서 디알로가 킥킥거렸다.
“크크큭. 집 빼곤 다 있는데?”
“여자도 없잖아.”
“그건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고.”
“글쎄. 아까 보니까 그것도 아닌 거 같…….”
“근데, 진짜 부럽네.”
“뭐가? 선물들이? 저런 건 그냥 사면 되잖아? 혹시 돈 떨어졌어? 내가 빌려줘?”
유진의 물음에 디알로가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곤 대답 대신 내가 들고 있는 걸 가리켰다.
사진첩이었다.
두께는 어지간한 사전만 했고, 앨범 안엔 내가 데뷔했을 때부터 방송에 출연한 모습, 그리고 공연한 사진들과 함께 최근 SNS에 돌아다니는 사진들로 가득했다.
그것도 사진 밑에는 어딘지 모르게 삐뚤 거리긴 하지만 귀엽고 앙증맞은 한글로 지금 있는 곳이 어디고, 또 뭘 하는 중인지, 또 내가 어떤 기분일 거 같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털썩.
소파에 앉아 사진첩을 보고 있으니, 전부 모여들어 양옆과 어깨너머에서 다 같이 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탄성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루 누나가 예전 생각이 나는지 훌쩍이기도 했고.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창의 편지가 붙어 있었다.
메이린이 보낸 편지였다.
- 제가 오빠를 만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네요. 그동안 한결같이 저희를 아껴주신 오빠. 아시죠?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오빠한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중략)……. 진짜 아프면 안 돼요? 메이린도 오빠의 새 노래를 듣고 싶지만, 꾹 참고 기다릴 테니까.
울컥한다.
아, 나……. 이게 뭐라고, 진짜.
이러니 내가 남이 깔아준 꽃길 따위를 편히 갈 수 있겠냐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서 천천히 사진첩을 덮고 일어나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선물들을 둘러보았다.
가족들과 회사식구들, 그리고 레이크헬과 샤오린, 브레드까지 나서고야 전부 풀어볼 수 있었던 선물 박스들.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선물들이 보인다. 그중에서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랑은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의 헝겊 인형을 발견하곤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저게 나라고?
참네. 내가 저렇게 못 생겼나.
그때, 어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러곤 말씀하신다.
“아들, 미역국 끓여놨어. 밥 먹어야지?”
가슴이 따스해졌다.
***
싹 다 떠났다.
한바탕 휘몰고 간 듯, 전부 떠나고 난 집이 어째 허전하게 느껴진다.
집안을 둘러보고 있자니, 공항에서 보았던 이들이 떠오른다.
외할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희주는 안쓰러운 눈길로 날 보다가 비행기에 올랐고, 그 뒤에 마지막까지 남아준 샤오린과 브레드 역시 아쉽다는 얼굴로 떠났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만큼 알게 되었다.
내 옆에서 묵묵히 날 지켜주는 이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지…….
“도주우우우우우우운!”
그래, 이놈들은 빼자.
디알로가 쿵쿵거리며 뛰어오더니, 내 사색을 무참히 박살 내고 있다.
“이것 좀 어떻게 해봐!”
“뭐가 문젠데?”
“최신식이라 그런가? 장비가 너무 어려워!”
“아, 그러니까 니네 회사로 가라니까 그러네.”
왜 사서들 고생인지 모르겠다.
전부 신식 장비들이라 나도 아직 사용법을 다 익히지 못했는데, 무슨 도움이 될 거라고.
후우,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제 놈들 딴에는 지들까지 떠나면 내가 외로워할까 봐 저러는 모양인데…….
“아, 뭐해! 얼른 도준이 불러오지 않고!”
“이러다 녹음 못 끝내면 어떻게 해요?”
제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진의 대답이 이어진다.
“형들만 믿어, 형들만!”
제일 못 믿을 녀석이 하는 말이니 제롬은 아마 지금쯤 방긋 웃으면서 콧방귀를 끼고 있을 터다.
픽하고 웃고는 녹음실로 내려갔다.
***
사람마다 재능은 다르고, 심지어는 품고 있는 열정도 다르다.
게다가 어디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운명은 극적일 만큼 갈린다.
그렇다.
세상은 분명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은 적어도 한 가지만은 공평하게 나눠주셨다.
시간.
자신을 옭매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운명의 벽을 뚫어낼 가장 강력한 무기.
그걸 어떻게 쓰느냐는 오직 본인에게 달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한가지 마음을 품고 달려갈 것이다.
받은 만큼 갚겠다는.
아니 그 이상을 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려면,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여기서 이대로 멈춰서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
한걸음, 한걸음……. 느릴지는 몰라도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설사 전 세계에서 모여든 천재들과 경쟁해야만 한다고 해도.
연습실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뒤, 두 손을 펼쳐 잠시 바라보았다.
열 개의 손가락.
지금부턴 이 손가락에 달렸다.
아니, 손가락을 움직이는 내 마음에 달린 거겠지.
그래, 한번 해보지 뭐.
누군 날 때부터 쳤냐고.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하지 싶었다.
머릿속엔 이미 악보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고, 어떻게 쳐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문제는 그걸 내 손끝으로 옮기는 과정인데.
그거야 무한히 반복해서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을 테니.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왜?
이미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안 할 거면 모를까, 도전한다면 반드시 내 걸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또…….
외할아버지한테 그렇게까지 호언장담했는걸.
그러니까 이번 경합, 반드시 뽑혀서 오케스트라에 서주겠어.
안 그러면…….
“쪽팔리잖아.”
건반 위에 손을 올린 뒤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악보가 떠오른다.
마치 음표들이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피식.
웃음 지으며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