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 그냥 꽃길만 걸으라고? (2)
묘한 미소를 머금고 계신 니콜 교수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교수님이 물으신다.
“왜 싫어?”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 사람…….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은 저마다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해맑은 표정으로.
심지어는 에단 조차도.
그들을 잠시 보다가 교수님을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리곤 씨익 웃었다.
“아뇨. 좋아요.”
난데없는 얘기라서 조금 황당했을 뿐,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좋다.
여기서 누군가 내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등 떠밀려 움직이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바보다, 그건.
외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는 말씀마따나 기회는 언제나 주위에 널려 있다.
그걸 잡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렸다고 하셨다.
다만…….
움켜쥔다고 해서 그게 잡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란 게 함정.
준비된 자, 즉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만이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격 문제인 거다.
그럼 나는?
카네기 홀에 설 만큼 실력이 될까?
솔직히 말하면 어림도 없다.
단, 그게 클래식 한정이라면.
그리고 아마도 니콜 교수님께서 내게 제안한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 터다.
어쩌면 이건 작은 시험일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내가 오르려는 길에 놓아준 계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고개를 내젓는다?
멍청한 것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겠지.
“표정 좋은데?”
교수님께서 날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계셨다.
고개를 살짝 쳐든 채로.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교수님을 보아온 바에 따르면, 저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정답이었나 보네.
나 역시 웃어 보이곤 얘기했다.
“애들한테 아직 말하지 않는 게 좋겠죠?”
그러자 니콜 교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장단점이 있겠지. 그래도 좀 더 있다가 얘기하는 게 재밌지 않을까?”
여기서 장단점이란, 부담감이라든지 동기부여 따위를 말하는 거겠지.
피식.
“그럼 저만 알고 있을게요.”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얘기가 얼추 끝났다고 느꼈는지 베릴이 끼어든다.
“표는 보내줄 거지?”
나는 베릴을 보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비싸게 팔 거야.”
내 말에 니콜 교수가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
어느 집이든 가풍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흔히들 콩가루라 부르는, 개떡같은 집안조차도.
어떤 집안은 가족들이 대체로 근면하다든가, 또 어떤 집안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다든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침잠이 많지 않은 것도 그중 하나일 거다.
어제는 어른들이 많아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덕분에 새벽 6시쯤 되자 절로 눈이 떠졌다.
겨울을 코앞에 둔 계절인지라 아직 밖은 어둡기만 했다.
그래도 이미 잠에서 깼는데, 계속해서 침대에만 있기도 뭐해서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평소처럼 샤워를 하곤 간단한 차림으로 연습실로 내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도준이냐?”
4층을 지나쳐 3층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아, 할아버지. 벌써 일어나셨어요?”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
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잠이 늘기도 하더구만.
형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얘기했다.
“그래도 좀 더 주무시지 않고요.”
“쯧, 사내 녀석이 뭔 말이 그렇게 많을꼬.”
4층은 손님용으로 꾸며놓은 터라, 거실이 꽤 넓은 편이었다.
그래도 걱정된다.
그 사이 눈에 익은 어둠 속에서 외할아버지께서 소파에서 일어나시는 걸 보고 있자니.
연세 드신 분들은 곧잘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뼈가 부러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나는 재빨리 움직여 불을 켰다.
삑하는 전자음과 함께 거실이 환해졌다.
눈을 치뜨고 날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눈치 빠른 건 또 누굴 닮은 건지.”
“누군 누구예요, 할아버지죠.”
내 말이 기꺼웠던 것일까.
외할아버지께선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곤 걸음을 옮기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바람 좀 쐬자.”
“발코니로 갈까요?”
“그러자꾸나.”
“아, 차라도 한잔 타올까요?”
“커피로 타오너라.”
“원두 좋은 거 있는데, 에스프레소 괜찮죠?”
“에스프레소는 무슨. 그냥 믹스로 타오너라.”
그럴 줄 알았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었을 뿐이니까.
그렇게 외할아버지와 함께 다시금 5층으로 올라온 후, 주방에서 커피를 타서 발코니로 나왔다.
***
뉴욕답게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점점이 박힌 불빛들로 빛나고 있었다.
새벽녘이라 밤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아직 잠들지 않은 이들과 이제 막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이 뒤섞여 있을 도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 앉아 계신 외할아버지께서 물어오셨다.
“사는 게 즐겁더냐?”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걸까?
그게 뭔지는 몰라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요.”
가만히 날 바라보시던 외할아버진,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되었다, 그럼.”
그러더니 또다시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앞쪽만 바라보신다.
그러길 10여 분쯤 흘렀을까.
날씨가 많이 추운 건 아니지만, 공기 자체가 싸늘해서 이대로 있다간 감기들기 십상이지 싶었다.
그래서 말씀드렸다.
“들어가시죠. 슬슬 식구들 깰 때도 되었…….”
“도준아.”
“예?”
“이 할애빈 욕심이 많다.”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다 아는데.
그래도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근데, 참 세상 뜻대로 되질 않아.”
“…….”
“딱 네 나이 때 대구로 올라왔지.”
안다.
정말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얘기니까.
외할아버지께서 18살 때 집을 나오셨고, 그때부터 온갖 궂은 일은 다 하시며 돈을 모으시던 중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난리 통에 가족들을 잃으셨다는 것도.
전쟁이 끝난 후 미군 부대에서 뒤로 빼돌린 물건들을 파는 가게에 사환으로 일하시다가 나중에 직접 가게를 연 게 오늘날 D그룹의 모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전쟁통에만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모른다. 근데 웃긴 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좀 나을 줄 알았더니, 외려 더 죽겠더구나. 그건 재산이 불어 가게가 회사가 되고, 회사가 그룹이 되어갈수록 심해졌지. 망할 놈들!”
할아버지의 얘기대로라면, 이 땅에 세워진 초대 민주정권과 군사정권은 이리떼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뜯어가고, 저기서 뜯어가고. 나중엔 총칼로 밀고 들어와 기업을 통째로 빼앗으려 했다고 들었다.
그걸 죽기 살기로 버티며 지켜낸 외할아버지셨다.
“그때, 결심했지. 내 자식들은 그렇게 힘들게 만들지 말아야지 하고. 후후후. 웃기지도 않은 얘기지. 너도 나중에 애 한번 낳아봐라. 처음에야 애지중지 보물도 그런 보물이 없지. 근데, 애가 클수록 욕심도 같이 자라더구나. 그리고 하나둘 못마땅한 구석이 보이고, 실망이 늘어나지. 그쯤 되면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게야. 저놈이 오냐오냐 커서 그런 거 아닐까…하고.”
한숨을 푹 내쉰 외할아버진 날 지긋이 바라보셨다.
“나만큼 하라는 게 아닌데……. 반의반만 해도 좋으련만. 세상 일 중에 제일 어려운 게 자식 농사라더니. 정말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더구나.”
음……. 우리 할아버지, 이러신 분 아닌데.
어째 오늘은 자꾸 얘기를 빙빙 돌리시네.
안 하시던 외삼촌들 험담까지 하시면서.
비록 간접적으로 비치신 거긴 하지만.
아무튼, 불안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변죽을 울리시는 걸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더는 욕심 안 부리마.”
“……?”
“강 대표, 그 친구한테도 얘기했다만. 자본은 내가 댈 테니, 회사 제대로 키워서 주식 상장해라.”
또 그 얘긴가?
이미 회사엔 안 들어간다고 말씀드렸는데.
“혹여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회사 들어오란 얘긴 아니다. 그리고 회사를 키워도 그룹 계열사로 두려는 거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아, 오해였구나.
다행이긴 한데…….
결론은 이거였나?
에둘러 말씀하시지만, 결국 나더러 사업을 하라는 말씀이시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여쭈었다.
“아저씨……. 대표님은 뭐라시는 데요?”
외할아버진 날 가만히 보시다가 담담히 말씀하셨다.
“결정은 너한테 맡기겠다더라.”
움찔.
나도 모르게 눈가가 씰룩였다.
뭔가 속에서 불이 솟구치는 느낌이라서.
배신감?
아니 그런 거랑은 조금 다른데……. 아무튼 뭔가 기분이 좀 그렇다.
하아, 진짜 마음에 안 드네.
회사가 내 건가?
그 결정을 왜 나한테 맡긴대?
절로 인상이 써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시선을 돌렸다.
밤도 더럽게 기네.
아직도 어둡기만 하다.
도심 쪽, 줄리아드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 채 입술을 달싹였다.
“제 생일이라고 선물 주시는 거에요?”
살짝 웃으시는 게 그런 면이 아주 없는 건 아닌가 보다.
“왜, 싫으냐?”
“에이, 선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럼 이 할애비가 주는 선물, 받아 줄 테냐?”
아, 진짜 마음 약해진다.
‘준다’도 아니고 받을 거냐고 물으시는 외할아버지.
가만히 보니, 그새 많이도 늙으셨다.
흰머리는 예전에도 많았지만, 어째 숱이 줄어든 느낌이다.
게다가 얼굴에 피어난 검버섯도 늘어난 거 같고, 주름은 그보다 더 많아졌다.
눈빛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 아, 이건 좀 아니려나. 옛날부터 할아버진 유독 나한테만은 그러셨으니까. 다른 사람 대할 땐 진짜 무시무시하셨지만.
아무튼, 가슴이 아린다.
외할아버지께서 저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오냐.”
“제가요.”
“…….”
“할아버지 손자예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얘기했다.
“제가 욕심 많은 거야 아실 테고. 할아버지 보시기에 지금의 제가 남이 깔아준 꽃길 위로 걸어갈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래, 예전엔 분명 그랬다.
그땐 그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께서 변호사시고, 어머니께선 남몰래 꿍쳐놓은 돈 좀 갖고 계실지 몰라도 그 정도로는 두 분 노후 계획 짜는 데만도 벅찰 테니까.
게다가 형도 있고.
나한테 떨어질 몫?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했더랬다.
그래야 외할아버지 눈에 들 테니까.
그렇게 남이 깔아준 꽃길만 걸으면 되는 인생. 그러면 성공할 수 있는 인생이 내가 꾸는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꿈이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아직 누군가에게 말할 단계도 아니었고.
“알아요. 할아버지께서 절 얼마나 예뻐하시는지는. 근데, 저 그냥 혼자서 할게요.”
시험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아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날 바라보시는 외할아버지의 눈이 빛나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아마도 이렇게 얘기하는 내가 기특하신 모양이지만, 지금의 나로선 전혀 감흥이 없다.
“가시밭길이 될지언정 한번 가보려고요.”
“…….”
“왜냐면, 저…….”
“……?”
“자신 있거든요.”
어딘지 모르게 서운해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쁘다는 눈빛으로 날 보시는 할아버지께, 덧붙였다.
“나중에 자랑하실 생각이나 하세요. 손자 하나는 끝내주는 놈으로 낳아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