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 그냥 꽃길만 걸으라고? (1)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전에 걱정부터 앞섰다.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죠!”
“왜? 늙은이 오지도 못하게 하려고?”
얼른 음식이 담긴 봉지들을 내려놓곤 외할아버지의 안색부터 살폈다. 혹시라도 편찮으신 기색이라도 보이나 싶어서. 만일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진짜 후회막급일 테니까.
“아, 진짜.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혹시 편찮으……. 불편하신 덴 없으시고요? 얘기를 하시지. 그럼 제가 갔을 텐데. 뭐하러 고되게 먼 길을 오시고…….”
그때였다.
“너 뭘 그렇게 중얼대냐? 어째 비 맞은 중 같다?”
형이 면박을 준다.
어이가 없어서 형을 노려보다가 옆에서 형수가 겁먹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곤 재빨리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젠장! 짝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던 참이었다.
한차례 코웃음을 치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묘한 어조로 물어오셨다.
“부럽더냐?”
“누가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형을 한차례 흘겨보자, 외할아버진 그제야 피식 웃으시며 가만히 내 얼굴을 뜯어보셨다.
그러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리시며 또 한차례 혀를 차셨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기에 얼굴이 그 꼴일꼬. 이 실장.”
“예. 회장님.”
언제 왔는지 이 실장님이 대답하고 있다.
“자네가 봐도 그렇지? 한 3킬로는 빠진 거 같아.”
“안 그래도 보약 지어왔습니다.”
헐. 귀신같은 우리 할아버지.
어떻게 아셨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3킬로 조금 안 되게 빠진 상태였는데…….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였다.
“아들 왔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뿐한 걸음으로 걸어오시는 어머니셨다.
근데, 어째…….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남들 눈에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겠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이미 팔짱을 풀고 한 걸음씩 물러난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여전히 묵직한 음식 봉투를 양손에 들고 있는 에단을 어머닌 즐겁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희주를 힐끔거리시는데…….
흠, 희주 때문인가?
나 역시 다시 시선을 돌려 희주를 바라보다가,
흠칫.
아까까지만 해도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를 향해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고 있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날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살갑게 얘기한다.
그것도 영어로.
“도준아, 미안. 저번에 밤새 통화할 때 말해주려고 했는데, 어머님께서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 그래도 화난 건 아니지?”
우리 사이 친한 사이라는 걸 팍팍 드러내려는지, 인사 따윈 훌쩍 건너뛰고 몇 개의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고 있는 희주였다.
밤새라든가, 어머님이라든가……. 하는 단어들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있는데, 저만치에 서서 돌아가는 상황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세 남자, 아버지와 아저씨 그리고 고 팀장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킴, 우리 그냥 갈게.”
“그, 그러는게 좋겠다.”
크리스티나와 조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을 놔줄 우리 어머니가 아니시지.
“어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난번 우리 큰애 결혼식 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보냈지만, 오늘은 안 돼요. 그때 진 신세도 못 갚았는데……. 어서들 들어와요. 얼른.”
손짓까지 해가며 그녀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
반면 희주는 무슨 생각인지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
에단이라는 남자는 그렇다 치고.
크리스티나?
조안나?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희주가 보기엔 그녀들은 자신의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들이 매력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희주의 눈에는 어디까지나 일방통행. 도준은 그녀들을 이성으로 대하지 않는데, 여자들 쪽에선 그게 아니란 얘기.
여자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 도준이가 여간 잘 났어야지.
잘 생겼지, 똑똑하지, 건강하지, 노래도 잘하지. 게다가 이젠 돈도 잘 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이러니 계속해서 여자들이 달라붙는 거겠지.
하긴 자신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사실, 여자들이 도준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땐 살짝 욱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자들한테 화가 난 것일 뿐.
당연히 도준에게 화가 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도준이 뭔 짓을 해도 희주는 무조건 도준이 편이니까.
그만큼 도준에 관해선 절대적인 신뢰를 지닌 희주였다.
게다가 도준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준비된 여자가 바로 그녀였고.
마음 같아선, S그룹을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을 터다.
물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시니,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만은 그렇다는 거다.
“안 그래도 지금 음식 만들던 중이었는데, 잘 됐네요.”
“아, 어머니! 저희 먹으려고 이거 사왔…….”
“아들! 이게 다 뭐니? 전부 인스턴트……. 너 설마 매일 이런 것만 먹고 다니는 거니?”
“아, 그런 게 아니라…….”
모자가 투닥거리며 정답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희주 역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건 살짝 데치기만 해야 해. 푹 삶으면 못쓴다?”
“예, 어머니! 걱정 마세요.”
“아, 희주야, 넌 그만 하고 가서 쉬라니까.”
“아녜요. 어머님, 저도 이러고 있는 게 즐거운 걸요.”
잠시 후, 희주는 소연과 함께 주방에서 도준의 어머닐 도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소파에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가 힐끔거리고 있었지만, 희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점입가경이란 말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이지.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샤오린과 브레드가 왔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뭐, 이젠 실가는 데 바늘 간다고. 우리의 사진사이자 SNS계의 전도사이신 빨강머리 실비아가 빠지면 서운할 거 같으니 그건 웃으면서 넘어가자.
하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영화 촬영을 무슨 격주로 하냐?
주간지야? 아니면 드라마 찍냐고!
할리우드로 간지 얼마나 됐다고.
“오! 마미,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와아! 어떻게 늙지도 않으세요?”
“저번에도 느낀 건데, 도준인 진짜 어머닐 많이 닮은 거 같아요.”
“도준! 넌 인마 어머니께 감사드려야 해! 그 잘난 얼굴이 어디서 나왔겠냐!”
하아, 이것들이 진짜!
영화를 찍고 온다더니, 어디 가서 아부의 신에게 구공이라도 배워왔나?
왜 어머닐 막 칭찬하고 그래? 그런다고 우리 어머니께서 넘어가실 거 같……. 어라? 좋아하시네?
음, 우리 어머니도 여자였네.
아무튼, 레이크헬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닐 띄워 드린 덕분에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는 게 참 보기 좋다.
지금이라면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주실 것처럼 보일 정도다.
쯧, 이래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 거구나.
“내 생일은 어떻게 알고 왔냐?”
“어? 생일?”
“진짜?”
“너 생일이었어?”
피식.
모르고 온 거구만.
“선물은?”
농담처럼 물었다.
한데, 들려온 대답은 농담이 아니었다.
“응? 선물?”
되묻는 콜린.
한참 고민하더니 불쑥 물었다.
“집은 있고……. 뭐 사줄까?”
어라?
뭐 이리 진지해?
“큭큭큭. 깜짝 파티에 깜짝 선물인데 이거?”
그렇지. 디알로처럼 저러는게 정상인 건데…….
“그러지 말고, 너 저번에 주문 제작으로 산 페라리 있잖아. 그거 주지그래?”
“오, 난 그럼 기타 한 대 사줄까?”
“지난번에 보니까, 시계 파텍사 거 찼던데 나랑 매장 한 번 가볼래?”
이것들이 미쳤나?
무슨 선물이…….
하, 진짜! 단위가 다르네, 단위가.
“자, 그럼 그렇게 결정된 거로 하고. 그러면 우린 위로 올라가면 되는 거지?”
자, 잠깐! 뭘 경정해?
미친놈들!
뇌물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께서 미소와 함께 말씀하셨다.
“마침 딱 적당한 때들 왔네. 근데 한국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어머니, 삼겹살도 있어요?”
아, 깜짝이야!
언제 올라온 거야?
아까 4층에 있는 거 같더니.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샤오린이 종종거리며 달려와 눈을 빛내자, 어머닌 방긋 웃으셨다.
“삼겹살은 없지만, 대신 살치살 구울 거에요. 우리 아들이 좋아하거든요.”
“살치살이요?”
“호호호. 한우라고……. 암튼 한번 먹어봐요. 아마 입에 넣자마자 녹을 걸요?”
샤오린의 입안에 침 고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다시금 레이크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왜 온 건데? 아직 촬영 안 끝났잖아.”
“스튜디오에서 찍어야 할 건 다 찍었어. 현장 촬영은 다음 주부터고. 그동안 우린 네가 준 곡들 녹음하려고.”
아, 그래서 지난주에 그렇게 OST 달라고 노래를 부른 거였구나.
응? 근데 녹음한다면서 왜 여길?
“너희 회사엔 녹음실 없어?”
“에이, 여기 설비가 더 최신인 걸. 장비도 더 좋고.”
“아무렴. 녹음은 무조건 장비빨이지.”
“악기도 죽인다니까요.”
“크크크. 한마디로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는 거지.”
이 자식들이 아무래도 여길 지들 아지트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안 되겠다.
이러다간 진짜 눌러앉겠다는 말이 나올 판이다.
“안돼.”
“어어! 그게 무슨…….”
“어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기가 스튜디오야?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여긴 내 집이야, 집!”
“야! 도준! 너 진짜 이러기…….”
내 말이 뜻밖이었던 걸까.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크헬 멤버들.
그때였다.
“아들?”
“……?”
“장난은 그쯤 해두렴. 호호호. 걱정들 마세요. 우리 아들이 다른 건 몰라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건 확실하니까. 설마 지 형 결혼식에 축가 불러주려고 한국까지 날아온 친구들을 모른 척하겠어요?”
구원 투수로 등판하신 우리 어머니.
상황 종결이다.
***
크리스마스만 이브가 있는 게 아니란 걸 오늘에야 알았다.
내 생일은 내일인데, 왜 오늘 파티냐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5층이 바글바글하다 못해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식탁만으론 모자라서 거실 테이블은 물론이고 방에까지 상을 차려야 했다.
바닥에 앉는 게 불편한 이들은 식탁과 거실 소파에 앉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오히려 바닥 쪽이 편하다고 방안에 모여 계셨다.
물론 그전에 삼단 케이크……. 하아, 진짜 저런 건 어디서 사온 거야? 아무튼, 초를 켜고 한 살 더 먹은 티를 팍팍 내려고 하던 참이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고, 마루 누나가 일어나려는 걸 내가 막아섰다.
올 사람이 있었으니까.
2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보니, 역시나 예상대로다.
분위기가 딱 파티인 거 같기에, 내가 연락드렸더랬다.
저번에 무척 서운해하셨었는데, 오늘도 안 불렀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니까.
난 그렇게까지 간덩이가 부은 제자가 아니거든.
“어서 오세요.”
“자, 여기. 선물.”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그렇고 어디다 써먹지도 못할 걸 내미시는 교수님.
한 다발의 튤립을 받아 안으며 감사드렸다.
“뭘 이런 걸 다……. 참 예쁘네요. 교수님처럼.”
아닌게아니라. 니콜 교수님께선 세련된 정장 차림에 우아한 모습으로 서 계셨다.
***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원래대로라면 서로 알지도 못했을 이들이지만, 이미 형의 결혼식 때 서울에서 한차례 보기도 했었고 또 나를 중심으로 모여든 이들이 태반이다 보니 다들 음악 얘기를 하는 사이 서먹함은 금세 가셨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심의 불빛에 홀려 바라본 발코니.
그곳에서 니콜 교수가 베릴과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라, 어째 분위기 묘한데?
두 사람이 발코니에서 와인을 홀짝거리는 중이다.
한데 우리 교수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계시네?
게다가 베릴이 저렇게 입꼬리가 치켜 올라갈 정도로 웃는 건 또 처음 보는……. 뭐야? 이거? 썸이야?
그때였다.
교수님이 날 가리키며 뭐라 뭐라 하자, 베릴 역시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둘이 또 무슨 얘긴가를 나누다가 이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베릴이 내게 물었다.
“크리스마스 때 카네기 홀에서 공연한다며?”
응?
카네기 홀?
“자, 잠깐만요. 그런 얘기는 없었잖아요, 교수님?”
교수님께서 진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