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135. 역주행(2)
어디선가 고함이 들려왔다.
당연히 기쁨에 차서 내지르는 소리다.
또 누군가는 당장에 파티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외쳤고, 누군간 또 당연하지 않느냐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샤오린이 날 힐끔거렸다.
응? 나는 왜?
아직도 멍한 상태였던 내가 눈으로 그렇게 묻자,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물었다.
“집주인이 오케이 해야 파티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녜요?”
“으하하하! 뭘 또 그런 거 물어요? 다 이 자식 축하해주자고 그러는 건데!”
“그러게! 우리가 그냥 놀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당연하죠. 이게 다 도준을 위한 거라니까요?”
“와아아아아! 파티하자, 파티!”
“이런 날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흠, 저게 지금 곡을 내기만 하면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올라가는 놈들이 할 소린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말했다.
“하죠, 뭐. 그럼, 나가서 마실 거랑 좀 사와야…….”
말을 하다 말았다.
샤오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보고는.
아니나 다를까.
“브레드? 주방 꽉 채워놨겠죠?”
“누구 지시이신데요.”
안경을 고쳐 쓰며, 잘난 척 말하는 남자.
그가 옥스퍼드 출신의 유망한 엘리트라고 말한다면 누가 믿을까.
브레드가 샤오린의 칭찬 한번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
“끄응.”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엄청난 돌덩이……. 아니, 허벅지에 신음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더럽게 무겁네!
난 내 허리만큼이나 두꺼운 디알로의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치우곤 거친 숨을 내뱉었다.
“으……. 머리 아파!”
아, 진짜! 이 나이에 숙취라니.
미친놈들!
미성년자라니까!
어젯밤 안 마시겠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녀석들이 기어코 술을 먹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아, 정말이지 어제는…….
그야말로 광란의 밤이었다.
유진은 술판이 벌어진 지 겨우 한 시간 만에 잔뜩 취해서 여자들을 부르겠다고 난리지, 디알로는 혼자서 그 많던 술과 음식들을 폭풍 흡입하며 날 붙잡고 놔주질 않았더랬다.
콜린? 제롬?
망할 만담 콤비들 같으니라고.
둘은 디알로의 암바에 걸려서 파닥거리는 날 앞에 두고서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워 삼키며, 그걸 안주 삼아 맥주를 홀짝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애당초 내 집에 왜 술이 있는 거냐고!
난 속으로 브레드를 원망했지만, 그런 날 유진조차 재밌다는 듯 바라볼 뿐 누구 하나 도와줄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믿었던 아저씨도 브라이언과 함께 일 얘기를 한다며 중간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고, 마루 누나는 샤오린뿐만 아니라 크리스티나와 조안나까지 끌어들여 깔깔거리며 수다 삼매경.
실비아는 연방 카메라를 들고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나마 에단은 좀 도와줄까 싶었는데, 자식은 피식 웃으며 한발 떨어져 혼자서 우아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디알로와 엉켜서 한참 낑낑대다가 풀려나 헥헥거릴 때 누군가 물을 주기에 마셨는데, 어디 그걸로 갈증이 풀려야지. 아니, 분함이 풀리질 않았던 걸 테다.
그리고 이 꼴이다.
그럴 땐 맥주가 최고라고 꼬시는 디알로. 그 꼬임에 넘어가 고개를 끄덕인 게 실수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한 캔만 한다는 게, 어쩌다 보니 만취.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일어나보니까 또다시 디알로다.
아, 진짜! 이놈의 자식들은 날 축하해주는 거 맞아?
난장판이 되어 있는 5층 거실을 쳐다보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이구야, 햇볕이 짱짱하기도 하지.
가을인데도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전혀 춥게 느껴지질 않는다.
슬그머니 일어나 통짜로 되어 있는 창 앞으로 다가갔다가 이내 할 말을 잃어버렸다.
풀장 앞, 바닥에 유진이 홀딱 벗고서 팬티만 걸친 꼴로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코를 드르렁거리며.
아침부터 못 볼 것 봤다는 생각에 얼른 돌아섰다.
피식.
그러면서 웃었다.
역주행?
기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즐거운 건 이렇게 함께 기뻐해 줄 사람들이 있다는 거.
그래서 더 즐거웠다.
노래방에서의 그 외로웠던 시간들이 마치 한바탕 꾼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
점심 무렵, 샤오린과 브레드는 머리통을 붙잡고 비틀거리며 호텔로 돌아갔다. 실비아는 무척이나 흡족하다는 얼굴로 카메라를 무슨 보물 여기듯 가슴에 품고 집을 나섰다.
물론 에단 삼인방도 일찌감치 돌아간 뒤였고.
회사 식구들은 각자 방 하나씩 잡고서 자는지 어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남은 건…….
“이야! 여기 피아노, 죽이지 않냐?”
“죽여? 뭘 죽여?”
“응? 도준이 그러던데? 한국에서는 굿잡일 때 그렇게 말한다고.”
“호오! 그래?”
“그나저나 여기 설비,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거 같지 않냐?”
“설비만? 여긴 천국이야 천국! 층마다 연습실이랑 녹음실에 온갖 악기가 다 갖춰져 있지. 게다가 집 전체가 철저하게 방음이 되어 있는게 너무 마음에 들어!”
“맞아! 한밤중에도 마음 놓고 소리를 질러도 되니까, 속이 다 후련해!”
“크크큭. 그뿐만 아니지, 5층은 더 죽이잖아? 딱 반 갈라서 한쪽은 풀장이 있는 테라스, 또 한쪽은 뭔 짓을 해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공간…. 그리고 한발만 나가면 뉴욕이라고 뉴욕! 길거리에 여자들이 넘쳐나는! 흐흐흐. 유진! 비버리힐즈에 있는 네 집 따위 팔아버리고, 너도 여기에 건물 하나 사서 리모델링이나 하지 그러냐?”
“뭐하러? 그냥 여기서 놀면 되지.”
“응? 듣고 보니 그러네?”
“하하하하. 그거 좋네. 우리 그냥 여기서 지낼까?”
“다 함께?”
“그거 좋은데요?”
“그러니까!”
하아, 내 말이……. 그러니까 다, 이 자식들아!
아니, 왜 여태 안가고 여기서 뭉개는 거냐고.
나는 집안 곳곳에서 들려오는 레이크헬 멤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안 가요?”
“가야지.”
“…….”
“…….”
“언제요?”
“곧.”
흠, 나는 눈이 가늘어져서 브라이언을 보다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언제가 언젠데요?”
나 참, 그게 그렇게 한참 고민할 일인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 브라이언을 의심스럽게 바라볼 때였다.
“너 1등 하는 거 보고 가려나 보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돌아보니, 예상대로 아저씨다.
“어? 일어나셨어요?”
“끙. 간만에 달렸더니. 후우! 이제야 겨우 정신이 드네. 나도 몸이 다 됐나 보다. 얼마나 마셨다고…….”
헐. 브라이언이랑 나눌 얘기가 있다고 내려갈 때까지 마신 술만 해도 소주로 치면 한 세 병은 되겠더구먼.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근데, 방금 그 말 농담이시죠?”
1등 할 때까지?
아니, 어느 세월에.
끔찍한 소리를 다 한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브라이언이 얘기했다.
“둘이 지금 무슨 얘기해? 이봐. 우리랑 있을 땐 영어로 얘기하라고.”
“브라이언이 한국어 배우면 되겠네요.”
“나도 그러곤 싶지. 근데, 이게 굳은 걸 어쩌겠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 있는 브라이언을 보며 픽하고 웃었을 때였다.
브라이언이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아, 아까 하던 얘기…….”
무슨 형광등도 아니고, 뭘 또 이제 와서 대답하겠다고.
갈 때 되면 가겠지…하고 자포자기하는 중이었는데.
“한 달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예?”
그렇게 오래 있겠다고?
아니, 그럼 영화는 어쩌고?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브라이언이 말했다.
“아, 쟤들은 먼저 보내야지.”
그때, 디알로의 고함이 들려왔다.
“난 좀 더 여기 있고 싶은데?”
“저도요!”
아우, 저 자식들 진짜!
“영화 엎어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고 나면 그 엄청난 소송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브라이언의 한마디에 레이크헬 멤버들의 불만이 쏙 들어갔다.
물론 여전히 구시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브라이언이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여기 방송국과 음반사랑 얘기해서 마케팅 좀 해보려고.”
마케팅?
“그게 무슨…….”
“한국 속담에 그런 말 있다며?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그래서…….”
“…….”
“이번엔 우리도 제대로 좀 밀어볼까 해서 말이야.”
***
오후엔 강의가 있어서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째 집을 통째로 강탈당한 느낌이 드는 거지?
나는 학교로 가기 전 찰리스 건물을 불안한 얼굴이 되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없는 동안, 막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하는 건 아니겠지?
유진이 여자들을 불러다 놓고 풀장에서 거들먹거리는 꼴을 상상하니 왠지 배알이 꼴렸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렇다고 저렇게 좋아라 하는 놈들을 내쫓을 수도 없으니.
한숨을 내쉬고 돌아선 뒤 학교로 향했다.
그러면서 아까 나눴던 대화. 브라이언의 얘기를 떠올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참네, 말은 쉽게 하지.”
1위?
그게 어느 동네 개 이름이냐?
혀를 차면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오늘도 수고들 많았어요. 아, 다음 주에 테스트 있는 거 알죠?”
니콜 교수의 얘기에 강의실이 술렁거렸다.
당연한 일이다.
나야 언감생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다들 그럴 수밖에.
크리스마스 공연에 나설 연주자를 뽑기 위한 경합.
다른 곳도 아니고 줄리아드다.
누군가는 겨우 학교에서 개최하는 공연에 참가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말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절대 그런 말 못할 거다.
왜?
연말에 줄리아드에서 개최하는 공연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줄리아드의 최정예들만 모여서 하는 공연. 그렇기에 공연에 초대된 이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다. 말할 것도 없이 커리어가 하나 느는 셈이다.
더구나 여기서 눈에 띄게 되면 여타 오케스트라에 스카우트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줄리아드 자체적으로 일 년 내내 전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 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욕심내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이다.
뭐, 나야 관심 1도 없지만.
봐라.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는 말할 것도 없고 도미니크 저 자식도 눈을 반짝이다 못해 불을 뿜어내고 있잖냐.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하는 짓이랑은 달리 놈의 실력은 상당했으니까.
듣기론 돈 좀 있는 집 자식이라고 하던데.
아무튼, 굳이 얘기하면 도미니크가 뽑힐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하곤 상관없나?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곤 돌아서려던 때였다.
“킴! 킴은 잠시 나 좀 보고 가요.”
니콜 교수가 날 부르고 있었다.
***
“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군요.”
다리를 꼬며 한속으로 턱을 받치고 날 빤히 쳐다보는 니콜 교수.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이 도발적이고 섹시해서?
아니.
싸늘해서다.
그러면서 묘하게 서운함이 담겨 있다.
대체 누가 얘기한 건지?
어쩐지 크리스티나나 조안나는 아닐 거 같단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니콜 교수가 다시 한 번 따져 물었다.
“그러니까, 난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위해서 그 먼 길을 사비를 들여가며 비싼 비행기 표까지 사서 날아갔는데, 그 제자는 나만 쏙 빼놓고 파티를 벌였다는 거네. 그것도 새로 장만한, 2층부터 5층까지 연습실에 녹음실…….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실내 하며 풀장까지 달린, 제대로 럭셔리한 홈에서?”
처음부터 그럴 예정은 아니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변명 같아서 구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려던 찰나였다.
“그래서 즐거워?”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을 거 같은 목소리.
처음 들어본 그녀의 음성에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동자엔 강렬한 눈빛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다.
그런 얼굴로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빌보드에서 7위를 하건 1위를 하건 난 관심 없어. 하지만, 이건 기억하지.”
“…….”
“킴이 줄리아드를 들어올 때 뭐라고 했는지.”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
“내게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찔러온다.
“내가 왜 킴을 좋아하는지 알아? 킴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거든. 그런데 최근의 킴은 설레지 않아. 전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이해져 있었던 건가?
빌보드 차트가 어쩌고 할 때부터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져 버린 건 아닐까?
나름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입술을 잘끈 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니콜 교수 역시 내 얘기를 들을 생각 따윈 없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여전히 싸늘한 음성으로.
“킴이 여길 왜 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