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 신호탄(1)
미국에 한 달쯤 있으면서 느낀 건 다름이 아니다.
‘차트’의 나라.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나라답게 팔리고 있는 모든 것에 순위가 매겨진다.
그것이 유형의 물건이든, 무형의 상품이든 간에.
심지어는 사람까지 순위를 매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 역시 마찬가지.
그 중심에 있는 게 바로 빌보드 차트다.
1894년 뉴욕에서 창간한 빌보드지.
매주 발간되는 주간지로서, 1936년 첫 차트를 발표한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차트를 발표해오고 있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로.
무려 35가지에 이르는 차트가 존재한다.
요즘 들어 추가된 ‘Digital songs’를 비롯해 ‘Radio songs’까지.
여러 가지 장르와 집계로 순위를 매기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알아주는 건 싱글 차트인 ‘HOT 100’과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이 두 가지로 특히 ‘HOT 100’에 오른 곡들이 주목받는다.
말하자면 흔히들 ‘빌보드 차트’라고 부르는 건 바로 ‘HOT 100’인 셈이다.
미국에서 발매된 모든 싱글 앨범을 대상으로 판매량과 방송 횟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정하는데, 디지털 다운로드 횟수, 에어플레이 즉 방송횟수, 온라인 스트리밍 횟수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1주간 라디오에서 얼마나 많이 틀어댔는가, 또 디지털 음원과 CD 음반의 판매량과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각각 정해진 비율대로 합산해 순위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공정성?
개뿔 없다.
웃기는 얘긴데, 그냥 지들 맘대로다.
무슨 뜻이냐면…….
비공개란 얘기다.
왜?
순위를 매기는 과정 따위가 알려져 봤자 골치만 아프니까.
그럼에도, 미국, 아니 전 세계 음악인들은 빌보드 차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는 빌보드 차트가 단순히 많이 팔린 것만 가지고 매겨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인기가 있는 게 어떤 곡인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달까.
그 이유는 바로 라디오에 있다.
알려진 바로는 미국 내 라디오 방송순위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하는데, 직접 음원을 다운받거나 음반을 사서 듣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계층, 즉 이러나저러나 알아서 찾아 듣는 사람들이란 얘기고 실제로 해당 곡이 인기가 많은지 적은지 알려면 일반적인 대중들의 반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무튼, 다소 복잡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과정을 거쳐 발표되는 빌보드 차트의 발표시간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걸 왜 지금?”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기도 했지만, 의아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토요일. 목요일 저녁에 발표한……. 아, 그렇구나.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 같은 서부와는 시차가 대략 열두 시간 차이가 난다. 그렇다는 건, 그쪽이 목요일 저녁일 때 우리나라가 금요일 오전이란 얘기고.
그 사이 결혼식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뒤늦게 알게 된 것도 이해는 간다.
그렇긴 한데 브라이언이라면…….
“CDM 쪽으로서도 예상 밖이었다는 거겠지.”
“아저씨!”
갑자기 들려온 아저씨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외치자, 아저씬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였다.
“우리도 ‘댄싱 위드 미’가 순위 안에 들어갔다고 해도, 설마하니 역주행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요즘처럼 노래의 수명이 짧은 시대에 출시한 지 몇 달이 넘은 노래가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건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닐 테니까.
아무리 CDM이 내 노래에 대한 미국 내 판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뜻밖의 상황이었다는 거겠지.
그때였다.
“와아! 그럼, 도준 씨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
“햐! 진짜 대단한데?”
수아와 이성원 형님이 거의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고, 레이크헬 멤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준. 방금 빌보드 얘기하지 않았어?”
“무슨 일인데?”
“우리 얘기야?”
“그건 아닐걸? 춉이 말 더듬는 거 들었잖아? 저 여자가 우리 일로 그럴 리……. 큭!”
유진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찬 마루 누나가 소리쳤다.
“누가 춉이에요!”
그렇게 갑자기 전해진 소식 때문에 무대 아래쪽이 정신없는 가운데, 스탭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음 팀 준비해주세요!”
여전히 멍한 상태였지만, 일단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할 필요가 있었다.
“아, 이따가 다시 얘기해요.”
“그, 그래. 얼른 다녀와.”
마루 누나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뒤돌아섰을 때였다.
“돈 많이 벌어와요!”
요 몇 시간 동안 친해진 수아가 키득거리며 외치는 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사교성 하나는 장난 아니네.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막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아! 도준아! 근데, 다른 곡도 빌보드 진입했어.”
“……?”
조금 놀라서 뒤돌아보자, 뒤늦게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마루 누나가 말하고 있었다.
“In The Center Of The World…‘세상의 중심’에서가 현재 72위야.”
***
빌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지난해부터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와 있는 그는 현재 Y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김도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니, 한국에 있는 이상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터다.
그만큼 한국에선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김도준의 인기는 급상승 중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신드롬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김도준의 음악을 접할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그는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한국인이 어떻게 이런 음악을?
물론 한국이 좋아서 교환 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정도이니 한국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는 걸 넘어서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한류의 중심이 되는 한국 대중음악 역시 그는 좋아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안에 소울이 있다곤 생각지 않았다.
그건 흑인음악에서 비롯되어 반세기 넘게 발전되어온 미국 나아가 서양 특유의 음악이었으니까.
한국 음악에서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소울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깨달았다.
김도준의 음악을 듣던 바로 그날.
노예로 끌려와 극악한 환경 속에서 눈물 대신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웃음을, 분노 대신 흑인 특유의 리듬감으로 승화시킨 노래와 율동. 그게 바로 소울. 한데, 그게 있었다. 김도준의 음악 세계에는.
놀랄 수밖에.
팬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고 난 뒤 갑자기 활동을 멈추었던 김도준이다.
빌리 역시 여타 팬들과 마찬가지로 김도준이 컴백하기만을 기다리며 그동안 김도준이 발표했던 노래들을 듣고 또 들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또 시간이 흐르고, 근래 들어 미국에서도 김도준의 팬 카페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가입한 건 당연한 일.
빌리는 팬 카페에서 거의 김도준을 찬양하다시피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국 내 팬 카페도 드나들며, 거의 하루에 한 번은 꼭 김도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정말 우연히 들어간 팬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결혼식?
아니, 이건 콘서트다!
그는 시계까지 가져다 놓고서 예고된 시간을 기다렸고, 표가 풀리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리고 폭풍 같던 그 시간들이 지난 후,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결혼식을 가장한 콘서트 표를 손에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하아! 이제 드디어 나오는 건가?’
그는 차오르는 기대감으로 손에 땀을 쥔 채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1부와 2부에 걸쳐 진행된 축하공연과 예식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오직 하나. 김도준을 직접 보고, 현장에서 그의 음악을 두 귀로 듣는 것이었으니까.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 촬영을 할 준비를 끝마친 채 그는 다리를 덜덜 떨어댔다.
흥분감과 긴장감이 혼재한 상태.
이미 팸플릿을 통해 프로그램을 봤기 때문에 이번 순서에 누가 나오는지는 알고 있었다.
어서 빨리 김도준과 레이크헬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빌리는 마른 입술을 한차례 혀로 훑어 침을 축였다.
‘이걸 올리면 난리가 날 거야.’
조금 전까지 핸드폰을 통해 미국 내 팬 카페에 접속해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 중이었다.
웃긴 건 아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새벽임에도 다들 깨어 있는 채로 채팅 중이란 점.
특히 아이디 KELLY_LUV_DJ와 PT7654가 계속해서 끝도 없이 김도준에 대해 썰을 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언제 김도준이 나오느냐고 물으며, 만약 나오면 얼른 녹화해서 카페에 올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아!”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빌리의 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푸슉!
무대 곳곳에서 스모그가 뿜어지며 다섯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스타디움을 흔드는 가운데, 빌리 역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
엄청난 환호성을 뒤로하고 막 공연을 마친 씨크릿걸즈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수님.”
내 얘기에 유나가 눈을 반짝이며 부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현아는 거친 성격답게 소연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며 함께 기뻐해 주고 있었다. 막내인 지연은 언제나처럼 나랑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중이었고.
준영이 형?
아주 땀에 절어서 헉헉거리는 게 꼭 늙은 개……. 쯧, 안쓰럽다.
아무래도 언제 날 잡아서 보약이라고 좀 먹여야지 싶을 정도였다.
그전에 운동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형, 힘들죠?”
“헉헉! 말 시키지 마. 지금 심장이……헉헉…목구멍…목구멍에서…흐억…깔딱거리고 있으니까.”
하여간 엄살은.
“이따 봬요.”
“인사는…헉헉…무슨! 그냥……좀…헉…헉……가라니까!”
진짜 힘들긴 한가보다.
준영이 형을 일별하곤 레이크헬과 무대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섰다.
순서는 레이크헬이 먼저.
나는 중간부터 들어가면 된다.
푸슈우우우욱!
무대 곳곳에서 스모그가 솟구치는 가운데, 레이크헬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각자 맡은 자리로 가서 악기들을 집어들었다.
콜린 역시 기타를 메곤 마이크 스탠드 앞에 서 있었고.
무대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무척이나 여유로운 느낌이다.
역시 베테랑이란 건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벽 한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연주가 시작된 것이다.
둥! 둥둥둥! 둥둥! 둥둥!
내 쪽과 가장 가까이 있는 제롬의 베이스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가운데, 디알로가 무지막지한 파워로 탐들을 두드려댔다.
그러는 동안, 베릴이 신들린 듯이 기타를 쳐댄다.
평소엔 말수도 적고, 그렇게나 차분한 사람이 어떻게 무대에만 서면 저렇게 백팔십도 바뀌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다.
유진 역시 시니컬한 성격과는 다르게 매끄러운 솜씨로 키보드를 부드럽게 다루며 리듬을 타고 있다.
- Here is a remarkable storyteller.(여기 놀라운 이야기꾼이 있어.)
콜린의 속삭이는듯한 음성이 노래가 되어 스타디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From now on, we'll hear a really interesting story.
He is still young, but he is also a friend to us.
Who is it?
Do not be so hasty.
I will introduce him soon.
지금부터 우리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될 거야.
그는 아직 어리지만, 우리와 친구이기도 해.
누구냐고?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제 곧 그를 소개할 테니.
놀랍다.
역시 천재들이란 건가?
겨우 한 번이었다.
그들이 리허설이 거의 끝나갈 때 도착하는 바람에 딱 한 번 맞춰봤을 뿐이다.
그런데도 저토록 능숙하게 연주를 하고, 또 노래를 한다고?
못 당하겠다, 진짜.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나지?
가슴은 왜 또 뛰는 거고.
그래, 아까 마루 누나한테서 들은 얘기는 잊자.
지금은 즐기는 거야.
우리 형과 형수를 위해 어젯밤 만든 노래.
그 노래를 들려주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고 있는지.
- DOJUN!
Where are you?
Can not you hear me calling you now?
도준!
어디 있는 거야?
지금 널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노랫소리가 마치 대화처럼 들려온다.
그런 가운데, 콜린이 크게 외쳤다.
마이크를 뽑아들고 관객석으로 향한 채.
“김! 도! 준!”
관객들, 아니 하객들이 소리쳤다.
김-도-준!
그 소리에 이끌리듯 눈을 번쩍 뜨곤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시작했다.
단 한 사람……새로운 가족을 위해 만든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