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 결혼식(3)
스타디움 안에선 철저한 통제 속에 무대 설치가 한창이었다.
뿐만 아니라 결혼식장답게 돔구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화이트 카펫. 그리고 양편으로 놓인 스탠드엔 백합이 흐드러지게 꽂혀 있었다.
말 그대로 버진 로드.
거기에 더해 스타디움 전체가 꽃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리고 사방에 늘어져 있는 하얀 천들.
무대 역시 순백의 흰색.
심지어 조명과 앰프들조차 하얗다.
이렇게 해놓으니 일반적인 콘서트장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따로 흐르는 듯하다.
뭐랄까.
거대한 성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달까.
화려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웨딩홀이 눈앞에 있었다.
장관이라면 장관인데…….
그 모습에 크리스티나가 몽롱한 눈빛을 해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앞으로 한 시간 안에 모든 준비가 완료됩니다. 불꽃놀이에 쓰일 폭죽도 이미 설치가 끝났고요.”
총괄하는 남자가 다가와 얘기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다였다.
S그룹에서 나왔다는 그의 말처럼 예식 준비는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으니까.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다가 물었다.
“식사는 어쩌기로 했죠?”
대답은 그 남자가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그건 걱정 마라. 팬들에게 특제 도시락을 주기로 했고, 귀빈들에겐 식이 끝난 후 따로 준비된 장소에서 피로연을 열기로 했으니까.”
“실장님!”
외할아버지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이 실장님이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가움에 활짝 웃어 보이자, 이 실장님은 빙긋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고 있더구나.”
“뭘요. 아직 멀었어요.”
“그래. 그런 마음……. 잊지 마라.”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돌아서시는 이 실장님.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지만, 외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지시들 때문에 바쁠 터였다.
“이따 뵐게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보이는 이 실장님의 등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어머, 미스터 최! 오랜만이야!”
니콜 교수의 목소리에 이끌려 시선을 돌린 나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 명이 넘는 남녀가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각자 손에 악기들을 들고서.
그것도 정장을 갖춰 입은 채.
그중 맨 앞에 있는 남자……. 어디서 봤더라?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그 남자는 니콜 교수와 가볍게 포옹을 하곤 내게 다가왔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악수를 나누는데, 남자가 인사했다.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최명훈입니다.”
아! 맞다! 최명훈!
서울 시립 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마에스트로.
그렇다는 얘기는?
설마 뒤에 있는 남녀가 전부……?
“호호호. 웨딩 음악은 역시 오케스트라지.”
니콜 교수의 너스레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
그 시각, 도준의 외할아버지인 최 회장은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에 기가 차서 헛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미 앞서 받은 전화들로 인해 모든 걸 꿰뚫고 있음에도 물어보는 최 회장.
아니나 다를까.
- 그동안 잘 계셨소?
간단한 안부로 시작된 대화는 짐작했던 대였다.
- 허허. 지난번에 최 회장 덕분에 우리 손녀가 무척이나 기뻐했다오.
“그러셨다니 다행이오.”
K그룹의 김호 회장.
서열 20위안에 드는 굴지의 그룹을 일궈낸 창업주. 그처럼 대단한 그였지만, 손녀 앞에선 그저 할아버지일 뿐. 손녀의 성화에 못 이겨 최 회장을 통해 도준의 사인을 받아갔던 그였다.
이번에 연락한 것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는 걸 모를 최 회장이 아니었다.
역시나 짐작대로였다.
-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다 보니…….
결혼식 소식을 들은 모양인데.
-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 좀 주실 것이지. 아무튼, 축하하오
슬슬 본론이 나올 차례.
- 큼. 혹시 자리 좀 남는 거 없겠소?
“자리라면……?”
다 알면서도 되묻는 최 회장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 VIP석 말이오. 우리 손녀가…….
옛말에도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부모가 이럴진대, 할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가 갖은 애교를 부리며 부탁하는데,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이를 모르지 않을 최 회장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러시다면 드려야지요. 아무 염려 마시고 오십시오. 와서 우리 애 축하도 해주시고, 즐겁게 놀다가 밥이나 한 끼 드시고 가십시오.”
- 하하!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가벼워지는군요.
이걸로 입을 싹 닦을 회장들이 아니다.
그걸 알기에 최 회장의 얼굴엔 웃음이 그득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사업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터.
VIP석에서 친분을 나누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될 테니까.
그게 아니라도 언제 국내 재벌 중에서 20위안에 든다는 이에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보겠는가.
이게 다 손자 하나 잘 둔 덕분이다.
-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예. 그러지요. 그때 뵙지요.”
전화를 끊은 최 회장은 다시 한 번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늙으니까,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
한데, 말년에 손자 때문에 자꾸만 웃을 일이 생긴다.
“허허, 그놈 참!”
재벌에 대한 인식이 안 좋다 못해서 거의 적폐로 취급하는 한국사회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온 기사.
뿐만 아니라 걸그룹 멤버와 결혼한다는 내용은 도준의 이름과 엮이면서 대한민국에 풍파를 일으켰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도준은 단 하루 만에 모든 걸 뒤집어버렸다.
한데, 그걸로 모자라 재계의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계 쪽에서도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전화들을 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이 재밌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도준이 기특해 죽을 판이다.
“적당히 놀고 뒤를 이으면 딱 좋겠는데…….”
그래서 그런가 갈수록 욕심이 생겨난다.
도준이 그룹을 맡으면, 지금의 몇 배 아니 수십 배로 키워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지금도 봐라.
스폰을 해주겠다는 S그룹과 자신에게서만 광고비 조로 10억씩 받아챙기는 배짱. 혈육이고 나발이고 없다. 받을 수 있을 땐 무조건 받는다.
뿐만 아니라 방송사에 방영권을 팔아 챙긴 수익은 또 어떻고.
그것도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 돈만 해도 얼마일지…….
통이 큰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지 형 결혼식으로 이런 장난을 쳐대는 놈이 더없이 기껍기만 하다.
그러니 욕심이 안날 수가 있나.
저런 놈이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고 일선에 나선다면…….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아쉬움과 욕심이 한데 어우러진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또다시 울리는 인터폰.
- M 건설 조 회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최 회장은 연결하라는 말을 전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오후 2시.
순백의 색으로 입혀진 무대와 더불어 스타디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식홀로 재탄생한 시각.
입을 벌리곤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속속 도착하는 출연자들.
원래는 선수들의 대기실로 쓰이는 라커룸에 한데 모여 리허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랜만이에…….”
씨크릿걸즈의 멤버 중 한 명인 유나가 살갑게 인사를 건네오는 찰나였다.
“꺄아아아악! 김도준이다!”
이건 또 무슨 상황?
라커룸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터진 비명.
그 바람에 흠칫한 유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날 향해 다가오려던 현아와 지연이 덜컥하는 느낌으로 멈춰 서고 말았다.
“말도 안돼애애애애!”
그러는 동안에도 꺅꺅거리는 소리.
주인공은 다름 아닌 수아.
그녀가 날 향해 달려들더니 손을 덥석 잡아온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아주 난리다.
“진짜다! 진짜! 김도준! 김도주우우운!”
헛웃음 밖에 나오질 않는다.
근데, 더 황당한 건…….
수아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가 하도 난리법석을 떨어서 그렇지. 다들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아가 ‘사인해 줘요!’를 외치기 무섭게 내게로 몰려들었다.
뭐, 뭐야!
다 같은 가수끼리 이래도 돼?
언제들 준비했는지, 종이……. 아니 얜 뭐야? 왜 등판을 까? 야야! 왜 치마를 내리려…….
야아! 빨강머리! 찍지 마!
아주 그냥 누굴 파묻으려고 그러나? 어디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지랄이야, 지랄이!
찰싹!
누군가 등짝을 때리는 소리와 꺅하는 비명이 들려오고.
언제 쥐어졌는지 내 손에 들린 매직이 종이를 비롯해 티셔츠와 바지, 심지어는 치마에까지 사인을 휘갈기는 가운데 황당한 얘기가 들려온다.
“우후훗! 드디어 받았다!”
“얼른 SNS에 올려야지!”
“오빠! 저랑 사진 찍어요!”
“형! 저랑도….”
이보세요. 제가 여기서 제일 어리거든요?
아놔. 정신이 하나도 없네.
11팀이나 되다 보니, 출연자들만 스무 명이 넘는다.
거기에 코디랑 매니저를 비롯한 스탭들까지 더해지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그나마 최명훈 마에스트로가 데려온 서울 시립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다른 쪽 라커룸을 사용하기로 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휴! 생각만 해도 등이 다 축축해진다.
더구나 니콜 교수님, 아니 에단이 이 꼴을 봤어봐라. 아마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거다.
“자식! 잘 놀다 왔냐?”
뒤늦게 준영이 형과 인사를 하고.
“야, 진짜 얼굴 보기 힘들다. 근데, 너는 또 뭘 배우겠다고 줄리아드를 가냐?”
이성원 형님의 얘기에 멋쩍게 웃었고.
“오랜만에요.”
오랜만에 만난 블루스톰의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 지냈……죠?”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블루스톰.
예전에 보니까, 성격들은 참 좋던데…….
한상철 실장이 지난번 표절사태로 맛이 가면서 덩달아 몰락한 케이스였기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광안리 썸머 페스티벌에서 나 때문에 멘탈이 나갔었다는 걸 알기에 미안한 마음이 컸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언제 시간 내서 한번 봐요.”
진담이었다.
한상철이 나가면서 KSM에서 블루스톰을 포기할까 하다가 김성만 대표가 극적으로 마음을 돌려 이번에 2집을 준비한다고 하던데.
한 곡 정도는 줘도 되겠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반가움을 나누고, 처음 본 이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에야 비로소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마루 누나가.
“자자, 이제 이쯤 해주시고요.”
아이고, 우리 누님. 아주 신 나셨네.
무슨 뽕이라도 넣은 듯 으쓱해진 어깨로 거들먹거리며 가수들을 뒤로 물리곤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란…….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고 있는데, 눈이 마주친 샤오린이 쿡쿡거리는 게 보인다.
브레드 또한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아, 진짜! 말리지는 못할망정.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네요. 슬슬 리허설 시작해야 할 거 같습니다.”
나름 무게를 잡으며 말하자, 다들 눈빛이 달라진다.
역시, 프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뭐, 이제 막 앨범을 낸 사람들도 있었지만.
“형들, 이번에 낸 앨범 반응 괜찮던데?”
“아하하하. 야, 여기서 그 얘긴 왜 꺼내. 창피하게.”
“뭐가 어때서? 타이틀곡이 ‘스파클링’이던가? 10위 안에 들어간 거 같던데, 아냐?”
내가 규철이 형에게 묻자, 세이버스 멤버들이 머쓱해서 어찌할 줄 모른다.
큭큭큭.
이 형들하고 홍대에서 부대끼며 공연하던 게 떠오른다.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아! 이분이 새로 오신 기타리스트?”
“여, 영광입니다! 고광택입니다!”
날렵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이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민망해져서 나도 모르게 같이 허리를 숙이며 손을 맞잡자, 감격했다는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남자.
그 옆에서 지혁이 형이 낄낄거렸다.
“번쩍번쩍하게 광택 내드립니다! 고광택으로다가.”
아우, 진짜!
무슨 드립을 쳐도 하필 아재 개그를.
근데 이게 먹힌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와 함께 깔깔거리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오고 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세상엔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구나 싶었다.
이게 웃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이 빨개진 광택이 형과 함께 무대로 올라갔다.
***
거의 두 시간에 걸친 리허설이 끝났을 때, 마침내 고 팀장님이 도착했다.
레이크헬과 브라이언을 데리고.
“여어, 여기 죽인다!”
“잘 있었어?”
“도준! 한국 여자들 넘 예뻐!”
“OST는 언제 끝나냐?”
“오! 브라더!”
“내가 왜 네 형제야?”
날 껴안으려는 디알로를 피하며 브라이언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후후후. 와야지.”
어째 불안한 웃음을 날리는 브라이언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눈길을 보낸다.
손도 싹싹 비비면서.
그래,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알겠어요. 오늘 진 빚은 꼭 갚을게요.”
“노노! 그런 거 아냐. 네버! 우린 그저 순수하게 네 형제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어서 온 거라고.”
예예. 그러시겠죠.
하다못해 유진이 그런 말을 했으면 믿어주는 흉내라도 냈을 텐데.
안타깝게도 브라이언에게는 그게 안 되네.
나중에 몇 곡 써서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포옹했다.
그러고 나서, 뒤에서 화살이라도 되는 듯 뒤통수에 꽂아 들고 있는 수많은 눈길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얼른 소개해주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역시나 수아가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덕분에 씨크릿걸즈의 멤버들은 이번에도 멈칫하더니 아쉬운 얼굴들을 해 보였고.
그렇게 또 한 번 난리법석을 떨고 난 뒤, 시간이 흘러 관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각 방송사에서 나온 스탭들이 카메라를 움직였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