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 스캔들(3)
깨달음은 한순간에 오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은 하나였다.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날 수 있구나…였다.
뭔 빛 기류?
기가 막혀서.
내가 캘리인지 뭔지 하는 여자랑 말이라도 한마디 섞어보고 이런 말을 들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을 거다.
“설마 믿는 건 아니죠?”
마루 누나한테 물었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누명을 쓰고 십 년 옥살이를 눈앞에 둔 사람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날 의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누나에게 말했다.
“진짜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제야 누나가 뒤늦게 얘기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아, 진짜! 뭐냐고, 이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희주한테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거?
그래, 스캔들이고 나발이고 희주가 모른다는 게 중요한 거지.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
하아, 걔가 알아봐라.
그 성격에 가만있겠나?
아마 S그룹의 힘을 총동원해서라도…….
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으슬으슬해진다.
***
원래는 곧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회사로 먼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
“비행시간이 꽤 길었을 텐데, 혈색 좋네?”
아저씬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어오셨다.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아저씨도 대답 따윈 바라지 않으셨다는 듯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신다.
“어쩔래?”
저만치 앉아서 날 보고 있는 고 팀장님께 눈빛으로나마 인사를 하곤 되물었다.
“뭐가요?”
빙글빙글 웃으시는 아저씨.
간만에 보면 무조건 반갑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저씨보다 한 살, 아니 한 달만 일찍 태어났으면 진짜 한 대 때렸을 거다.
“보통 이런 식의 스캔들…….”
“아,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거 아니라고.”
“그건 네 주장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문제지.”
말을 하면서 눈길을 던지시는 아저씨.
그 시선을 쫓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볼만큼 봤으니까.
우리 조마루 선생님께서 열심히 확인 중이신 게시글들과 댓글들을.
- 미쳤다! 김도준 미국 가서 대어를 잡아왔구나!
미치긴 내가 미칠 판이다. 그리고 대어는 무슨! 여자가 무슨 연어냐? 잡긴 뭘 잡아!
- 역시 갓준의 클라스는 다르다!
그런 클라스 필요 없거든!
- 주니 오빠, 그럼 안 돼요. 전 오빠 없인 못산다구요!
저 어디 안 갑니다. 없어지지 않는다구요.
- 형님! 저는 어쩌라고!
……네가 이러면 나는 어쩌라고.
- 캬하! 줄리아드 간 것도 혹시 캘리 때문 아냐?
논리적으로나 문맥적으로나 문제 있는 거 같은데? 일단 초등학교부터 다시 갔다 와서 얘기해보자.
- 오오오오올. 도준이 장가 가는 거냐?
장가는 우리 형님께서 가거든요.
- 진짜 믿었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응. 이럴 수 있어. 그리고 나도 믿었는데, 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어쩜 그렇게 팔랑귀냐고.
후우, 대충 이런 식이다.
물론 이 정도는 약과다.
악플도 만만치 않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얘기부터 외국인은 안된다는 얘기까지. 심지어는 나라를 팔아먹느냐는 말까지 하고 있다. 그 결과 나는 어느새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뭘 어째? 하는 표정으로 아저씨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뭐, 네가 여자면 문제가 되는데 다행히 넌 남자잖아?”
그것참 다행이네요.
“남녀 차별하자는 게 아니니까 오해 말고. 현실을 말하는 거다, 현실을. 알잖아? 여자의 경우엔 이 정도 스캔들만으로도 심각해질 수 있다는 거. 근데, 남자의 경우는 좀 다르지.”
무슨 얘기인지는 아는데, 참 씁쓸하다.
“솔직히 이런 스캔들이면 오히려 호재란 거다. 웃긴 얘기지만, 할리우드에서도 손꼽히는 여배우랑 스캔들? 그 자체만으로도 네 이름이 전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됐을 걸?”
“예. 예. 감사드리고요, 그래서 저 지금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못마땅하단 표정을 감추지 않자, 아저씬 픽하고 웃으셨다.
“둘 중에 하날 골라. 이 상황을 이용할 건지, 아니면 사실무근이라고 밀어붙일 건지.”
난 가만히 아저씰 바라보았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결정권을 나한테 넘긴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지만, 광대뼈가 치솟을 정도로 입꼬리가 올라간 아저씰 보고 있으니…….
나 참, 이것도 시험이라고.
“아저씬, 제가 양아치였으면 좋겠어요?”
씨익.
“내 말이.”
결론이 났다는 듯 아저씨께선 손뼉을 치셨다.
“자, 다들 들었지? 고 팀장은 얼른 자료 준비해서 언론사에 뿌리고, 마루는 팬들 관리 들어가. 아, 이왕이면 줄리아드 간 거 확실하게 밝히고. 그리고 뉴욕이랑 LA랑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제대로 설명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
마루 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저씨는 간단하게 일축하셨다.
“도준이 팬들 중에 중·고등학생이 절반이 넘어요. 오케이?”
“아!”
깨달음은 나만 얻는 게 아닌가 보다.
마루 누나가 납득했다는 표정이 되어 마우스를 움켜잡고 있었다.
***
한강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냐고 물으면 좀처럼 대답하기 어렵다.
사전적 의미로 얘기하자면, 태백산맥에서 발원해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서울특별시를 동서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강이 한강이지만, 사람들은 한강이라고 하면 대부분 일산 즈음에서 시작해 암사동 근방까지 뻗어 있는 강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그곳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경계선과 맞닿은 까닭일 터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벗어날 때, 교외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데 도심과는 달리 대체로 한가로운 편이라 서울 시민들은 머리가 복잡할 때나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넣고 싶을 때면 곧잘 찾곤 한다.
양평으로 가는 길목.
서울 외곽, 교외 어느 카페에서 최수연 팀장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 희주였지만, 평소와 달리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제 최수연 팀장에게 부탁한 일에 대한 결과를 듣는 것뿐이었으니까.
“우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캘리 제니퍼는 도준이를 만난 적이 없어.”
그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진짜 궁금한 건 그 다음이다.
“캘리가 도준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단 하루.
그 짧은 시간 만에 최수연이 미국에 주재하고 있는 S 무역 상사의 직원들을 동원해 캐낸 정보에 따르면, 지난 한 달간 도준의 타임테이블과 캘리 제니퍼의 스케줄을 확인한 결과, 그 둘의 동선은 한차례도 겹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캘리는 자신의 SNS에 거의 매일이다시피 도준의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캘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알아낸 바로는 요즘 그녀는 도준의 음악에 빠져 살다시피 한단다.
그러면서 도준의 얘기만 나오면 무슨 광신도라도 되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거의 찬양조로 떠들어댄다고.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희주가 물은 게 어떤 의미인지 못 알아들을 최수연이 아니었다.
“심각하지. 적어도 너한테는 위협적이야.”
한마디로 적이란 얘기다.
희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어느새 다부진 얼굴을 해 보인 희주는 눈을 빛냈다.
이미 결심이 섰다는 걸 깨달은 최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싸우지 않으면 지켜낼 수도 없는 거란다.’
그것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삼키며 최수연이 말했다.
“뭐든 필요하면 얘기해. 언니가 도와줄게.”
“예, 언니만 믿을게요.”
희주가 맑게 웃고 있었다.
***
그 시각, 미국 내 라디오에선 ‘Dancing With Me’와 ‘In The Center Of The World’가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새인가부턴 DJ들이 도준의 다른 곡들도 하나둘 틀기 시작했다.
이유?
신청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낯선 싱어의 이름 때문에 도준의 노래를 트는 걸 거부하던 DJ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도준이 라이브 방송을 한 짤들이 유투븐과 SNS를 휩쓸고 있었고, 그 덕분에 그의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이 미국 내 그의 팬 카페에 가입하는 동안 스캔들이 터졌던 것이다.
무려 캘리 제니퍼의 이상형 발언.
거기에 레이크헬과 도준이 친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심지어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의 OST 작업에 도준이 참여한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한두 가지도 아니고, 여러 가지 일들이 뒤섞여 화학작용을 일으키자, 대번에 불길이 일어났다.
그 결과가 바로 라디오로 이어진 것.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음원 판매량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호수 한가운데 떨어진 돌이 만들어낸 동심원이 점차 그 파장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
저녁 늦게 들어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대로 들어가 침대에 늘어져 버렸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회사로 가서 여태까지 있다가 돌아와서인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씻어야 하는데…….”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집안이 휑하다.
그새 다들 출근한 모양.
어머니께서도 어딜 가셨는지 보이질 않는다.
이따가 저녁에 보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얼른 씻고 집을 나섰다.
“음, 진짜 일 잘하시네.”
회사로 가는 길에 핸드폰으로 확인해보니, 하룻밤 사이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회사의 발 빠른 대처에 힘입어 매스컴과 언론에서 캘리와 관련된 얘기가 쏙 들어갔던 것이다.
“이상하네.”
사무실로 들어가자, 날 아는 척 하는 둥 마는 둥 마루 누나가 고개를 내젓는 것도 이해가 간다.
고 팀장님이 베테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 되는 이슈가 겨우 하루 만에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다른 이슈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무리 이쪽에서 압력을 넣고, 구슬렸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빠르게 정리가 되다니.
의아하긴 나 역시 마찬가지.
짚이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어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내일인가?”
“예?”
“형 결혼식 말이야.”
아저씨께서 팔짱을 끼고 묻고 계셨다.
“아, 예……. 벌써 결혼식이 코앞이네요.”
아닌게아니라, 형하곤 결혼 전에 한 번쯤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번 스캔들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외할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나마 전화 한 통을 한 게 다였다.
내일 만나면 또다시 외할아버지께서 ‘업어 키운 자식’ 운운하시면서 얼마나 서운해하실지 눈에 훤하다.
“그나저나 큰일이긴 하던데…….”
아저씨께서 조심스럽게 하신 말씀에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예?”
잠시 날 바라보시던 아저씬,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아직 못들은 모양이구나.”
“무슨……?”
“네 형 말이다.”
형?
형이 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동시에 지난번에 어머니와 얘기했던 대화들이 속속 떠오른다.
무슨 일이지?
의구심이 솟구쳐서, 얼른 물었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마루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것 좀 보세요!”
응?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
둘이서 거의 동시에 시선을 돌렸을 때, 마루 누나가 모니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나가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마른 침만 삼키며 가리킨 기사 제목.
[씨크릿걸스 소연과 결혼하는 남자는 재벌 3세……. 그는 김도준의 친형?]
그제야 깨달았다.
스캔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