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 재밌겠는데? (4)
방송?
그걸 나더러 하라고?
머릿속에 흘러간다.
방금까지 카메라 앞에 앉아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방송을 하던 존의 모습. 그리고 게스트로 출연해 그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기던 그 시간들이.
확실히 재미있을 거 같긴 하다.
그렇긴 한데…….
나한테 그만한 여유가 있을까?
빡빡하게 짜인 커리큘럼도 쫓아가야 하고, 밤에는 찰리스에서 연주도 해야 한다.
게다가 이젠 여기서 사귄 친구들과 소모임까지 할 예정이다.
“글쎄. 가능할지 모르겠네.”
내가 웃으면서 얘기하자, 존이 마주 웃어 보인다.
그러곤 정말 별생각 없이 던지고 있었다.
아마도 적극적으로 권유할 생각까진 없는 모양.
남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전형적인 미국인들 특유의 태도다.
“흐흐흐. 너무 깊이 생각진 말고. 그저 재미삼아 한번 해보라는 거였으니까.”
재미삼아 한 번쯤…이라.
“그래. 생각은 해볼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존이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 진짜 와줘서 고마워.”
씨익 웃어 보이곤 돌아섰다.
그렇게 존과 헤어져 찰리스로 향하면서 방금까지 존과 나눴던 대화들을 곱씹어보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응?
마루 누나한테 메시지가 들어왔다.
- 오늘 방송 진짜 좋더라. ㅎㅎㅎ 오랜만에 눈이 호강.
참네. 별걸 다…….
그래 봐야 라방인데.
웃으면서 막 답장을 보내려던 찰나였다.
부르르르.
다시금 울리는 진동.
희주네?
- 방송 재밌었어. 끝날 땐 얼마나 아쉽던지……. 근데, 한국 들어올 때 되지 않았어?
가긴 가야겠지.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형님 결혼식인데.
그때 다시 울리는 핸드폰.
부르르르.
부르르르.
부르르르.
- 여어, 핸섬 보이! 화면빨 잘 받던데?
- 크크크. 얼굴 때문에 노래가 묻힐 판이야.
- OST는 끝내놓고 그러고 있는 거냐?
- 즐거워하는 거 보니까, 나도 즐거웠음.
- 언제 우리 다 같이 라방 한번 할까?
레이크헬이 연이어 보내온 메시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식들.
말도 안 해줬는데, 알아서 챙겨본 모양이네.
아무래도 SNS로 소식이 돌았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들 볼 리가…….
부르르르.
- 꺄아아아악! 도준 님. 너무 좋아!
이건 또 뭐야? 싶어서 이름을 확인해보니, 우리 빨강머리 앤 되시겠다.
부르르르.
다시금 날아드는 메시지.
보니까, 사진이다.
정확히는 캡처 사진.
내가 방송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있는 장면.
히야, 진짜 잘 찍……. 아니 캡처 잘했네.
누가 보면 직접 찍은 줄 알겠다.
진짜 우리 빨랑머리 앤 사진 하나는 기똥차게 뽑아내는구나.
근데 그 실력을 왜 이런 데 쓰는 거냐고.
헛웃음이 나와서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샤오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 샤오린.”
- 방송 잘 봤어요. 하아, 꿈꾸는 줄 알았다니까요. 진짜…….
말을 잇지 못하던 샤오린.
뭔가 감동한 모양인데, 나로선 그 점이 잘 이해가 안 간다.
“에이, 뭘요. 샤오린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부끄럽네요.”
- 아니에요. 진짜라니까요.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그렇게 봐주시니 고마울 뿐이죠.”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한번 해볼까?”
***
다음날, 연습실.
나는 그렇다 치고, 세 사람은 무슨 마네킹이라도 되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뭣들 하는 거죠? 기껏 연습실을 마련해줬는데, 이렇게 시간만 보낼 건가요?”
니콜 교수가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음, 뱀과 마주친 개구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다들 바짝 쫄아서 니콜 교수의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날 힐끗 바라보는데…….
에휴! 뭘 그렇게까지 원망스러운 눈빛들을.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섰다.
“크리스티나, 혹시 ‘Someone Like You’ 알아?”
“아르델?”
“응.”
“아, 알기야 알지.”
가지고 온 가방에서 파일첩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거기서 악보를 빼내어 나눠주자, 다들 멀뚱멀뚱 날 쳐다본다.
“한번 맞춰볼까?”
잠시 머뭇거리던 세 사람.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끼어들었다.
연습실 안에 금세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반주가 끝날 무렵 내가 끼어들었다.
“I heard that you're settled down.”
- I heard that you're settled down.
That you found a woman and you're married now.
I heard that your wishes came true.
Guess she gave you things I didn't give to you.
당신이 정착했다고 들었어요.
한 여자를 찾아서 지금 결혼했다고….
당신 소망들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제가 당신께 주지 못했던 것들도 줬나 봐요.
크리스티나의 피아노 소리가 주축이 되어 두 사람, 첼로와 바이올린이 절묘하게 녹아들며 내 목소리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처음 맞춰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곡은 처음. 그런데도 꽤 그럴듯하게 연주하는 세 사람이었다.
그만큼 실력들이 있다는 얘기겠지.
느리면서도 잔잔하게 흘러가던 음이 어느 시점에서 천천히 고조를 높이다가 한순간 뻗어 올라갔다.
그리고 여운을 남기며 흩어졌다.
마치 안개처럼.
마이크를 놓고 바라보니, 다들 연주를 마치고 나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음악을 두고 나라에서 허용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했던가.
다들 취한 거겠지.
자신들이 연주한 음악에.
나는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게 원곡.”
순간 깨어나듯 날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게 다시금 악보를 나눠주었다.
“이건 내가 살짝 손본 건데…….”
크리스티나를 보면서 말했다.
“피아노는 좀 더 튀듯이 쳐줬으면 좋겠어. 원곡이 아마빌레와 돌체라면, 이번 건 아니마토랄까? 따안 따안 따아아안……. 하던 걸 따단 딴! 딴! 딴! 이런 식? 오케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곤, 조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첼로는 원곡에 대한 느낌은 아예 버리고, 좀 더 화려하게 가줘.”
“알겠어.”
뒤이어 에단을 바라보자, 그가 먼저 말한다.
“콘푸오코(열정적으로)겠지.”
씨익.
다들 감 잡은 거 같았다.
“자, 그럼 한번 가볼까?”
***
니콜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전주 후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도준의 노랫소리는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렇게 노래를 잘했나?’
싱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노래도 들어본 적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듣는 건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다.
뭐랄까. 귀가 아니라 머리통으로 직접 꽂혀 드는 그런 느낌이랄까.
게다가 다들 실력들이 있어서 그런가 합주도 그럴듯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다듬으면 적어도 이 노래, ‘Someone Like You’만큼은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연주할 수 있게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니콜이었다.
그러나…….
도준이 직접 손을 봤다던, 즉 편곡한 곡을 치기 시작하자, 그녀의 심장은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템포가 빠른 건 아니다.
리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멜로디도 원곡의 틀을 벗어나진 않는다.
그런데도…….
다르다.
그냥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곡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뀌었다.
그 이유를 니콜이 모를 리 없었다.
음을 쪼개고 재배치한 결과였다.
아니, 그것만으로 지금의 이 느낌을 설명하긴 어렵겠지.
아까, 도준이 했던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니마토.
다시 말해 생기있게! 아니, 과장되게!
원곡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노래였다면, 지금 이들이 도준의 주문에 맞춰 연주하는 곡은 감정을 끌어올려 과장되면서도 화려하다.
그러는 가운데, 도준의 성대가 한계치까지 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Don't forget me, I beg
I remember you said
절 잊지 마세요, 제발요.
당신이 말했던 걸 기억해요.
순간, 니콜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고 말았다.
뿐인가. 입이 벌어진 채였지만,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이, 이럴 수가!’
이 곡을 이렇게 부른다고?
그것도 남자가?
강력하고 폭발적인 에너지가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화려하게 소리친다.
자신을 잊지 말라고!
함께 했던 날을 기억하라고!
원곡이 잿빛의 흑백필름이라면, 지금 곡은 햇살 한 줌까지 고스란히 재현하는 칼라필름.
덕분에 선명하게 틀어박히는 주문들.
니콜은 몸을 떨었다.
그 밝으면서도 풍부한 감정의 쇄도.
그것은 폭압적인 강요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미롭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
아니, 그 화려함 때문에 더욱 가슴 깊숙이 찔러오는지도.
그래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짜르르 울리는 느낌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하아!”
노래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왔을 때, 니콜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
다들 어안이 벙벙한 모습.
그들을 한차례 둘러보곤 가볍게 말했다.
“느낌 나쁘지 않지?”
순간 에단이 헛숨을 내쉬었다.
“허! 이게 지금……. 나쁘지 않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크리스티나가 흔들리는 눈빛이 되어 물었다.
“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거지?”
조안나 역시 같은 눈빛이 되어 묻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곡의 분위기가 바뀐 게 편곡 때문이라는 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감정이 다르니까.”
세 사람, 아니 니콜 교수까지 포함해서 날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원곡이 절절하게 자신을 잊지 말라고 애원하는 거라면, 방금 우리가 연주한 건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
“그냥 말하는 거야. 당신이 떠나든 말든,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 하나라고. 죽을 때까지. 말하자면, 받아들일지 말지는 상대편 몫일 뿐인 거지.”
잠시 말을 골랐다.
가장 적당한 말을.
이게 좋겠군.
“이기적인 사랑이랄까.”
아무런 말도 못하는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한동안 연습실 안이 조용해졌다.
다들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에단이 물어왔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스케르찬도가 낫지 않냐?”
흠, 해학적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저……. 피아노는 그럼 도입부터 포르티시모로 가는 건 어떨까?”
크리스티나의 얘기에 조안나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는다.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처음부터 너무 세게 연주하는 것보단 오히려 크레셴도가 좋을 거 같아.”
그녀가 점점 세게 가자는 쪽으로 얘기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킴의 의도대로라면 떠나버린 상대방을 향해 어딘지 모르게 비웃는 느낌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아예 세게 가버리는 것도…….”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얘기는 갈수록 깊어져 간다.
그럴수록 곡은 점차 수정되고, 그때마다 시험하듯 연주를 거듭했다.
그러길 한참.
우리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니콜 교수가 끼어들었다.
“레치타티보로 시작하는 건 어때?”
“레치타티보요?”
레치타티보는 오페라 중에 말하듯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 즉 대사를 말하듯 노래하는 창법을 말한다.
“흠, 재밌을 거 같은데?”
내가 턱을 매만지다가 곧바로 종이를 꺼내 악보를 수정했다.
가사는 물론 원곡에서 따왔다.
“오! 이거 괜찮다!”
“깔깔깔. 근데 이말 너무 웃겨! 떠나면 죽여버릴 거라고 했잖아? 되게 터프하다!”
“근데, 이래도 되나? 이래선 ‘Someone Like You’라고 할 수 없잖아?”
“뭐 어때? 우리 마음이지.”
그렇게 또 한차례 곡이 바뀌고, 그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해서 몇 번이나 상의를 거쳐 수정하며 연주를 거듭했다.
“후우, 힘들다. 그래도 재밌었지?”
“크크큭. 무슨 프랑켄슈타인 같아. 찢었다가 붙였다가……. 곡이 걸레가 됐네.”
“그런 게 즐거운 거지.”
다들 만족했는지, 힘든 줄도 모르고 웃으며 얘기하는 그들에게 말했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여기까지만 하자. 대신 다음에 만날 땐 이 곡을 다른 방향으로도 바꿔보는 걸로 하지. 음, 뭐랄까 좀 더 퇴폐적이고 끈적끈적한? 그런 느낌으로. 어때? 재밌겠지?”
모두의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어리고 있었다.
니콜 교수까지 포함해서.
***
기숙사로 돌아온 뒤에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에단. 그러다가 가끔 날 보는 눈빛이 흔들리고…….
다시 또 생각에 잠기고.
그러길 몇 차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내게 물었다.
“넌 대체 뭐냐?”
음, 이 소린 왜 가는 데마다 듣는 걸까?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김도준?”
와락 일그러지는 에단의 얼굴.
녀석이 눈가를 파르르 떨다가 막 말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내가 먼저 그를 불렀다.
심각해지는 건 질색이니까.
안 그래도 물어볼 것도 있었고.
“에단.”
“……?”
“혹시 너 컴퓨터 가지고 있냐?”
너무 느닷없는 질문에 사고가 정지된 걸까?
멍청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던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컴퓨터? 그건 뭐하게?”
“아니, 뭐.”
“…….”
“라이브 방송이나 한 번 해볼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