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13화 (113/260)

# 113

#113. 가치관의 차이(4)

여자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앤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딱 빨강 머리 앤인데…….

아쉽게도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그리고 JUNLUV란 아이디로 팬 카페와 SNS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 중인 내 팬이란다.

문제는 그녀가 그동안 찍어온 사진들.

“하지 마. 하지 마! 내 거야, 내 거…. 흐극…흑!”

자신보다 한 뼘은 큰 샤오린의 손에 붙잡혀 대롱거리며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치는 그녀가 안쓰럽긴 한데…….

일단 확인 좀 해야겠다.

샤오린이 건네준 핸드폰에서 갤러리를 살폈다.

“많이도 찍었네.”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침에 조깅하는 모습부터 식당에서 밥 먹는 사진,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사진, 심지어는 찰리스에서 피아노 치는 사진까지 있다.

아니 하루종일 나만 따라다닌 거야, 뭐야?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기분 안 나빠요?”

샤오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기에 그냥 미소만 지어 보였다.

다들 모르겠구나.

이미 뽀록 다 났는데 뭐.

나는 핸드폰을 실비아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무슨 보물이라도 되듯 꼭 끌어안으며 대성통곡하는 그녀.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눈빛들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브레드, 좀 조용히 얘기할 만한 데 없어요?”

“그, 그……. 제가 지금 숙소로 쓰는 곳이 있기는 한데……. 좀 누추해서…….”

“그럼 거기로 가죠.”

***

“패트릭, 뭐해?”

“뭐하긴, 김도준 음악 듣지.”

“무슨 노래 듣는데?”

“댄싱 위드 미.”

“그 곡 좋지.”

‘댄싱 위드 미’. 한국에선 ‘춤을 춰’란 곡명으로 발표되었던 곡이다.

그랬던 걸 미국에서 발표할 땐 영어식으로 바꿔서 음원을 출시했다.

한마디로 패트릭은 ‘춤을 춰’의 영어 버전 노래를 듣고 있는 중이란 얘기.

그들은 이제 김도준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전부 김도준이 직접 연주한 거래.”

“진짜 미쳤네. 걘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그러니까. 곡 죽이지 않냐?”

“곡도 곡이지만, 난 김도준 내지를 때 등골이 짜르르한 게 소름이 끼치더라.”

“난 나직하게 부를 때도 좋던데.”

“낮은음도 제대로 내릴 줄 아니까. 워낙 음역 폭이 넓어야지.”

“근데, 너 이 사진들 봤냐?”

“어? 이건 처음 보는 사진인데?”

“봐봐. 끝내줘.”

제스가 보여주는 사진은 진짜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그럴 수밖에.

오늘 오전에 올라온 사진이었으니까.

“진짜 몸 좋네.”

“아침마다 꼭 이렇게 조깅한다나 보더라고.”

“하긴, 그 정도 퀄리티의 콘서트를 뛰려면 체력도 좋아야겠지.”

“아! 그때 말하는 거지? 천안문!”

“그때도 그렇고. 한국 공연 실황 봤는데…. 와, 진짜! 소름이!”

“예전에 올라왔었던 쾅한리 썸머 페스티벌 때의 공연도 죽였지! 락버전의 ‘have it your own way!’도 끝내주잖아!”

“락 좀 불러주지. 이왕이면 좀 강한 거로. 요새 드는 생각인데, 김도준이 메탈하면 죽일 거 같지 않냐?”

제스의 말에 패트릭이 맞장구를 쳤다.

“으, 생각만 해도 짜르르하다!”

“진짜 근사할 거야!”

“아, 근데 JUNLUV? 얜 이 사진 어디서 났데?”

“직접 찍었대. 봐봐. 얘가 그러는데, 김도준 지금 미국에 있는 거 같더라고.”

“정말?”

“그렇다니까. 그것 때문에 요즘 팬 카페에서 난리잖아.”

“아! 나도 들어가 봐야겠다.”

“쯧. 명색이 팬 클럽 부회장이란 놈이.”

혀를 차듯이 패트릭은 김도준에게 푹 빠지다 못해 지금은 아예 미국 팬클럽의 부회장 자리까지 꿰찬 상태.

그만큼 김도준의 음악에 매료되어 있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이 패트릭을 전율케 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

허름하긴 개뿔.

어지간한 호텔보다 낫구만.

브레드가 민망하다는 듯 쭈뼛거리다가 가져온 음료수를 마시며 실비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들 기다려 주…….

응? 근데, 얘들은 왜 따라온 거냐?

“니들 바쁘면 먼저 가도 되는 데?”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는 고개가 떨어져 나가라 내젓고 있었고, 에단도 시선만 피할 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결국, 그들과 샤오린을 소개시켜주는 걸로 얘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사진들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리고, 팬 카페에 뿌려댔다는 거네요?”

“흐극……. 아니야,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절대 준한테 피해가 갈만한 사진은 올리지 않았단 말이야!”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억울하다는 듯 외치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짠하단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샤오린은 좀 다른가 보다.

그녀는 시종일관 서늘한 표정으로 실비아를 노려보고 있다가 급기야 협박 아닌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상대방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요?”

“으, 응? 죄…죄가 되는 거야?”

실비아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은 여전하지만.

뭔가 불쌍해 보이는 모습으로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고 있는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했다.

“왜 그래요, 사람 겁나게.”

“웃을 때가 아니에요. 이거 진짜 위험하다고요. 스토킹이라는 게…….”

“흐윽……. 스, 스토킹 아니라니까! 난 그냥 주니 보는 게 좋아서……. 멀리서라도 보는 게 좋아서……. 흐그으으으윽. 처음부터 사진 찍으려던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한 장 찍었는데, 그걸 올리니까 다들 막 부러워하고……. 흐어어어어엉.”

참네. 다 큰 어른이 이렇게까지 서럽게 울 것까지야.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크리스티나와 조안나의 눈빛을 무시하며 말했다.

“뭐하는 사람이래요?”

“아직 거기까진…….”

샤오린의 대답에 내가 물었다.

“직업이 뭐에요?”

“흐끅…흑…자, 작가.”

“작가? 소설가 뭐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으, 응……훌쩍……시나리오 작가.”

코를 마시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 모습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왔지만, 그랬다간 또다시 대성통곡이라도 할 것 같아서 참았다.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해요.”

“……?”

“……?”

“……?”

“……?”

네 개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니 실비아까지 포함하면 다섯 개인가?

피식.

“사진 좀 찍은 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다 까발려졌는데.

그때까지 쓰고 있던 뿔테 안경도 벗어버렸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엊그제 레이크헬이 어설픈 변장을 하고 들이닥쳤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할 땐 몰랐는데, 이거 좀 추할지도.

한국 같으면야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나갔다간 몰려든 인파에 한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겠지만, 여긴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굳이 변장……. 그것도 되지도 않게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겠지.

사진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저쪽에서 알아서 홍보해주는 셈인데, 고마울 뿐이지.

단…….

“찍는 것도 좋고, 올리는 것도 좋아요. 대신 몇 가지만 약속해줘요.”

여전히 눈물이 한가득 들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실비아. 그녀의 눈이 갈수록 빛난다고 느낀 건 착각만은 아니겠지?

“첫째, 나중엔 몰라도 우선은 내가 줄리아드 다닌다는 걸 눈치챌 수 없는 사진들만 올릴 것.”

그래 봐야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둘째, 팬 카페 쪽 통제에 따라줄 것.”

이건 마루 누나랑도 얘기해봐야 하겠지만…….

샤오린이 있으니,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마지막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해줄 것.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물론 사진은 찍고 싶은 데로 찍어도 되고요. 아, 말 나온 김에 사인도 해줄까요?”

내 말에 언제 울었나 싶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는 실비아였다.

여전히 눈에는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일리를 보며 캘리는 활짝 웃어 보였다.

“곧 촬영 시작한대.”

지난 몇 년간 스케줄 관리부터 코디까지 자신의 거의 모든 걸 관리해온 에일리에게 캘리는 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고마워. 지금 바로 갈게.”

“그래. 스탭들 기다리는데, 늦는 것도 좀 그렇지. 근데, 지금 뭐 보고 있었던 거야?”

“응? 아! 김도준.”

“김도준?”

“어, 몰라? 요즘 핫한데.”

“처음 듣는데……. 미국인이야?”

에일리의 물음에 캘리가 방금까지 자신이 보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SNS를 보여주었다.

“아니. 한국인. 근데, 굉장해. 진짜 아티스트지. 그런척하는 가짜들과는 달리.”

캘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에일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왜?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

이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역할을 맡아도 소화해내는 연기력은 그 나이대의 연기자들 중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캘리 아닌가.

그 증거로 이미 각종 시상식에서 상이란 상은 다 휩쓴 그녀였다.

특히 지난해 오스카에서 받은 여우조연상은 현재 그녀의 위상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지금 찍기 시작한 작품은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리라는 게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감독도 그렇거니와 참여한 스탭들도 하나같이 베테랑인데다가 시나리오도 굉장하다. 뿐만 아니라 레이크헬까지 연기자로 직접 참여. OST까지 그들이 맡으면서 벌써부터 입소문이 돌고 있었으니까.

그런 여배우가 어째서 한낱 아시아, 그것도 극동의 끝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작은 나라 출신인 한국인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에일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호호호. 그 눈은 뭐야? 내가 이상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에일리도 들어보면 알게 돼. 김도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래?”

캘리가 보여주는 SNS를 읽으며 에일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일단 이거……. 나도 좀 퍼가도 되지?”

“당연한 걸 뭐하러 물어. 얼마든지 퍼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웃고는 사이좋게 촬영장으로 향했다.

***

샤오린은 살짝 못마땅해하긴 했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실비아에게 재량권을 준 게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드러났다.

“또 올라왔네?”

니콜 교수에게 부탁해 얻어낸 연습실로 향하고 있을 때,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핸드폰을 보여준다.

SNS에 올라온 사진.

아, 여기서 말하는 SNS라는 건 회사 공식 계정.

샤오린과는 달리 마루 누나는 무슨 생각인지 아예 실비아에게 공식 계정에 사진을 올릴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뿐만 아니라 팬 카페의 운영진으로까지 영입했고.

그 때문에 샤오린은 살짝 빈정이 상한 듯했지만, 아무튼 결과는 좋았다.

“대체 언제 찍는 거야? 아니, 일을 하긴 하나?”

조안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실비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꾸준히, 거의 매시간에 한 장씩 올라오는 사진이라니.

놀랍긴 하다.

진짜 스토커였으면 소름 끼칠 정도.

아무튼, 덕분에 한국의 팬들을 비롯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팬들은 지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중.

그리고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팬들의 숫자도 급격히 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방 쪽의 팬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느낌이랄까.

그때였다.

앞서 가던 에단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멍한 얼굴이 되어 돌아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자,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채로.

“킴!”

“……?”

“댄싱 위드 미, 이거 네 노래 맞지?”

“어? 어. 맞는데.”

에단이 핸드폰을 내밀며 얘기했다.

“빌보드에 재진입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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