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 가치관의 차이(3)
누군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시간이 지나도 지지 않는 꽃!”
망할!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한 번 소리치고 있었다.
“키, 킴도쭌?”
살짝 당황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학생들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서 웅성거리는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누구라고?”
“킴도쭌 몰라? LONGING TIMES!”
“진짜?”
젠장! 그래, 진짜다! 왜!
아놔, 이제 와서 뭐냐고.
그동안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 푹 놓고 있었더니만.
강의실 안을 둘러봤다.
한국인은커녕 중국인도 안 보인다.
아니, 아시아 계열은 머리칼 한 올 안 보인다.
아직도 앉지 않은 채로 날 가리키고 있는 남자는 흑인. 그렇다고 흑인 하면 떠오르는 껄렁껄렁한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매우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다.
이름이……존이라고 했던가.
첫 수업에서 소개할 때 그렇게 말했던 거 같다.
행동은 조금 가벼워 보이지만, 활력이 넘치다 못해 무척이나 쾌활한 성격인 거 같아서 인상에 남았었는데…….
그나저나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와! 닮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짜 킴도쭌일 줄이야!”
음,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러니까, 그동안에는 날 그저 김도준을 닮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건데.
그럴 만도 하다.
우리가 외국인들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듯 저들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
그래, 다 좋은데…….
망했다.
이제 곧 소문이 날 테고, 조용한 생활은 물 건너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바라는 건 한가지뿐.
이게 그저 내 자의식 과잉으로 끝나길 바랄 따름이었다.
***
내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현실 자각 부족이었네.
애들과 만나기도 한 카페로 가기 위해 건물을 빠져나오는 동안 어찌나들 쳐다보며 수군거리든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문 쫙 났다.
코리안 어쩌고……. 싱어 어쩌고……. LONGING TIMES 어쩌고…….
신기하단 표정들이다.
언뜻 들어보니, 팝 싱어가 왜 여길 왔느냐는 얘기들이 들린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하아! 존인지 뭔지 하는 자식도 그렇고.
입들도 더럽게 싸네.
이 지경이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플롯 레슨에 이어 피아노 레슨까지 받고 나오니 이미 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와, 진짜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하기야 줄리아드가 넓으면 얼마나 넓겠냐?
천 리는커녕 십 리나 될까?
입 싼 녀석들이 몇 명만 여기저기 떠들고 다녀도 금방이겠지.
한숨을 내쉬며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여어, 이게 누구야?”
뒤통수에서 날아든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망할.
오늘 무슨 날이야?
하필이면 저 자식이랑 여기서 딱 마주칠 게 뭐냐?
아니지.
뒤에서 부른 걸 보면 저쪽에서 날 발견하곤 일부러 다가왔다는 건데.
의도적이구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만 들어봐도 시비 걸겠다는 의도가 팍팍 느껴진다.
다시 한차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예상대로 놈이다.
도미니크인지 뭐시긴지.
“무슨 용건이지?”
“오호호! 왜 이렇게 날이 서 계실까? 우리 아시아의 별께서?”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알만하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바빠서 그런데,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건들건들.
패거리들과 함께 다가오는 도미니크.
이야, 폼 하난 죽인다.
양아치란 이런 거다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네.
근데, 진짜 의아하긴 하다.
어떻게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똑같냐?
거들먹거리는 거 하며, 싼 티 풀풀 나는 주둥이 하며.
양아치란 건 만국 공통인가보다.
바짝 다가선 도미니크가 얼굴을 디밀며 말했다.
“뭘 믿고 그렇게 설치나 했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응? 중국에선 거의 국빈 대접받는 싱어라고?”
“…….”
“내가 말했지? 나대지 말라고. 안 그러면…….”
나직한 말투로 으르렁거리는 녀석에게 툭 던지듯 내뱉었다.
“냄새나니까 좀 떨어지지?”
꿈틀.
녀석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지는 것 같은 착각.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콧구멍이 실룩거린다.
그러면서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잘하면 한 대 치겠네.
덩치로 보나 쪽수로 보나 저쪽이 압승.
그렇다고 겁먹을 나도 아니지만.
격투까진 몰라도 운동은 요즘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진 않을 거다.
물론 싸운다는 전제하의 얘기.
당연히 놈도 머리라는 게 있으면, 여기서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겠지.
주변에서 지금 우릴 쳐다보고 있는 눈이 몇 갠 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벌써부터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도 보였다.
웅성거리며 여길 쳐다보는 사람들.
그 숫자는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엔 이빨 잘 터는 놈이 이기는 거란 말이지.
속삭이듯이, 놈에게만 들리게 얘기했다.
“쫑알쫑알 말 맞네. 덩치는 산만한 게.”
파들파들.
볼살까지 떨리고 있는 게 눈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다.
근데, 이 시점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아 자식은 왜 이렇게까지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 걸까?
기억을 되짚어본다.
그러니, 조금 알 것도 같다.
후우, 아마도 둘 중 하나겠지.
크리스티나이거나 조안나이거나.
이 자식이 좋아하는 건.
아무튼, 그녀들 옆에 내가 얼쩡거리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망할 노란 원숭이 자식이!”
급기야 놈의 입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튀어나왔다.
“진짜 죽고 싶…….”
스윽.
이번엔 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러곤 서늘한 말투로 얘기했다.
“병신아. 이럴 땐 일단 한 대 치고 보는 거야.”
한쪽 입꼬리를 주욱 끌어올리며 비틀었다.
“근데, 못하겠지? 징계라도 먹을까 봐 겁이 나서. 근데 어쩌냐? 잘리면 넌 인생 망가지는 거지만, 난 아니거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만큼 멍청하진 않겠지.
눈앞의 놈이 질투에 눈이 멀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상황이 분명하니까.
서로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놈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기껏해야 학생인 반면 난 이미 성공한 싱어.
나로서는 이왕지사 여기까지 온 거 될 수 있으면 여기 붙어 있고 싶지만, 그걸 저놈은 모르니까.
뭐 정 안되면 여길 나가도 그만이고.
내가 원하는 건 클래식을 배우는 거고. 그건 꼭 여기가 아니라도 얻을 수 있거든.
어쨌든, 놈은 현재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다.
잔뜩 흔들리며 망설이는 듯한 놈의 눈빛이 그 증거다.
창피한 건 아는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곤, 애써 억지웃음을 보이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도미니크. 그에게 말해주었다.
최대한 상냥하게.
“그러니까 그 손가락 내려놔라. 확 분질러버리기 전에.”
저번처럼 내 어깨를 밀려고 하던 놈이 움찔거렸다.
“그래, 말 잘 듣네.”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서로 어지간하면 얼굴 보지 말자. 혹시 봐도 아는 척 말고. 내 말 알겠지?”
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때까지도 놈은 차마 주먹을 내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안다.
저런 놈들은 그럴 용기가 없다는 걸.
왜냐고?
많이 봐왔거든.
한국에 있을 때.
뒤에서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사람들 시선이 많은 곳에선 함부로 날뛸 용기 따윈 없다는 걸.
잃을 게 많은 놈들은 생각도 많은 법이거든.
그만큼 겁도 많은 거고.
뒤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짖기만 하는 개 따윈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
SNS의 파급력은 크다.
국경도 없고, 인종도 구분하지 않는다.
번역기도 발달해서 이젠 언어도 불문.
한마디로 관심만 있다면 말 그대로 소통은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존이 자신의 계정에 올린 글은 나비 효과의 시작점이었다.
“얘, 지금 뭐라는 거냐?”
패트릭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 KIMDOJUN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플롯 연주하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 줄 알았다. 흐흐흐. ‘시간이 지나도 지지 않는 꽃’을 플롯 버전으로 들어본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몇 명 안될 걸? 그것도 본인이 직접 부른…….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녹음을 해두는 건데.
“이 자식! 요즘 이상한 곡들 듣는다 했더니, 아시안의 노래였나 보네?”
제스의 말에 패트릭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뭐, 줄리아드의 도련님 귀는 우리랑 다르나 보지.”
“가치관이 다르다? 그런 얘기?”
“그렇게까진 아니고. 옛날부터 걔가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잖아. 우리가 기타치고 놀 때도 바이올린 켜보겠다고 깝죽거리고.”
“덕분에 이렇게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제스의 말대였다.
원래 한동네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취미 삼아 밴드활동을 하던 세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존이 클래식에 빠져들면서 확연히 길이 갈린 것이다.
패트릭과 제스가 팝을 고집할 때, 존은 플롯을 불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줄리아드가 있는 뉴욕으로 떠나버린 것.
텍사스의 토박이로 누가 봐도 상남자인 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모님들이야 오히려 그런 존을 부러워하며 자신들보고도 좀 더 건실한 미래를 설계하라고 날이면 날마다 닦달하고 있었지만.
“그나저나 킴도쭌이 누군데 이러는 거야?”
패트릭이 중얼거리며 검색을 하자, 옆에서 제스가 고개를 디밀고 낄낄거렸다.
“코리안인가 본데? 미쳤군. 하다 하다 이젠 코리안 팝에 빠진 거야?”
그때, 패트릭이 유투븐에서 찾아낸 동영상, 아니 말이 MP4 파일이지 사실상 음원만 얹어져 있는 영상을 틀었다.
“오! 제법 괜찮은데?”
반주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제스는 깔깔거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도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도 못하는 제스였다.
물론 패트릭 역시 마찬가지.
아직 음반을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골수까지 뮤지션인 그들이 듣기에 도준의 음악은 수준이 절대로 낮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은 만한 노래가 없다고 투덜거리기만 하던 패트릭이 입을 꾹 다물고 집중할 정도로.
***
카페에 들어서기 무섭게 에단이 날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도 보인다.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가니 따지듯 물어오는 에단.
“뭐 이렇게 늦었어?”
“미안 미안. 오다가 누굴 좀 만나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둘러대곤 자리에 앉으며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 들었다.
소모임이랄지, 그때처럼 함께 모여서 연주하는 일에 대해 논의할 참이었다.
“고마워.”
조안나가 눈치 빠르게 주스 한잔을 시켜 가져오는 걸 보면서 얘기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니콜 교수님께 얘기해서 우선 장소부터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말을 끝까지 할 순 없었다.
저만치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세 명의 남녀.
“샤오린?”
그녀를 브레드가 뒤따르고 있다.
그리고 샤오린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오는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빨강 머리에 안경을 쓴, 주근깨가 살짝 보이는 여자.
이름만 앤이면 딱이다 싶은데…….
“이게 무슨……. 아니, 그 여자는 누구예요?”
다소 황당해져서 샤오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빨강 머리 여자를 밀면서 얘기했다.
“도준 씨 팬이요.”
씩 하고 웃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동안 숨어서 도준씰 도촬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