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11화 (111/260)

# 111

#111. 가치관의 차이(2)

샤오린이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 확실해요?

“잠시만요. 좌표 보낼게요.”

조마루가 곧바로 팬 카페에 올라온 게시글 주소를 따서 보내자 잠시 후 샤오린이 말했다.

그 짧은 사이 차가워진 음성이었다.

- 음, 이건 좋군요.

“그렇죠. 좋죠.”

두 사람 대화 속에는 어쩐지 속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 조차 가지지 못한 걸 감히!’ 뭐 이런 뜻이랄까.

- 여자네요.

“그런 거 같죠?”

- 각도로 보나 타이밍으로 보나. 확실해요. 남자의 시선으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각이에요.

“예. 제 생각도 그래요.”

그렇게 왠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던 대화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 사실 샤오린이 아닐까 의심했어요.”

- 후우.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그것도 굳이 서브 아이디까지 만들어가면서.

“그렇지만, 도준이가 뉴욕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으니까…….”

- 전요, 좋은 걸 절대로 남이랑 나누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의미로 흠칫한 조마루. 그녀가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아무튼, 이거 대책이 좀 필요한 거 같지 않아요?”

- 확실히 위험해 보이긴 하네요.

“솔직히 단순 팬인지 아니면 스토커인지 판단이 잘 서지가 않아요. 그래서 상의차 전화드렸어요.”

- 글쎄요. 스토커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대처를 잘못했다간 도준 씨가 줄리아드에 있다는 게 알려질 공산이 크다는 거에요.

“흠, 그랬다간 도준이가 많이 불편해질 텐데.”

- 그렇겠죠.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오갔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샤오린이었다.

- 우선은 제가 뉴욕에 있으니까, 한번 파볼게요.

“그럼 전 신상파악에 주력하죠. 아이피 추적되면 위치 파악도 시도해 보고요.”

그걸로 두 사람은 전화 통화를 끝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양측은 서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놀랍도록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아끼던 걸 훼손당한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

찰리는 여전히 어두운 안색이었다.

사실 그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그냥 말해줄까 하는 유혹이 일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여기서 일하는 건 끝.

설사 일할 수 있다고 해도 여태껏 유지해오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겠지.

사람 사는 데는 다 같은 건지.

하나님 위에 건물주라고 하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내가 이 건물의 소유주라는 게 알게 되는 순간, 찰 리가 날 어떻게 대할지는 뻔했다.

겉으론 어떨지 몰라도 마냥 편하게 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냥 몇 시간만 참으면 되는데, 뭐하러 그런 위험을 감수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냥 신경 끈 채로 연주에만 열중했다.

대신 평소와 다르게 조금 신 나는 곡들로 연주했다.

덕분에 가게 안의 분위기는 살짝 들뜬 느낌이었다.

나중에 보니까, 올해 들어 가장 매출이 높았다고 해서 조금 놀라고 말았을 정도였다.

“킴, 오늘도 수고 많았어.”

일을 끝내고 돌아가기 전 내게 다가와 말하는 찰리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아마 예전 건물주가 전화를 했거나, 아니면 그 반대거나 하겠지.

어느 쪽이 되었든 알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새로 바뀐 건물주가, 물론 내가 전면에 나선 건 아니고 브레드가 대리로 진행한 거지만, 아무튼 계약서에 확실히 집어넣은 조항. 즉 1층 상가에 세들어 있는 찰리스에 대해선 임대차 계약을 승계하고 재계약 역시 임차인의 별다른 의사변동이 없으면 그대로 자동 연장한다는 조건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일 거다.

아니면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 있는 돌이라도 내려간 느낌이거나.

“찰리도 기분 좋아 보이네요. 뭐 좋은 일 있어요?”

“하하하. 있지. 방금 건물주……. 아니 전 건물주랑 전화했는데…….”

일개 파트타임 고용인에 불과할 텐데도 찰리는 스스럼없이 얘기해 주었다.

그 모습에서 그동안 내가 자신을 염려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일타삼피라고 했었나?

생각해보니까, 그중에 광이 하나쯤 껴 있는 것 같다.

***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온몸이 결리는 느낌이더니…….

“쯧, 어젯밤엔 너무 무리했나?”

어젠 평소와 달리 찰리스에게서 일을 마치고 나서도 곧바로 퇴근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던 찰리와 얘기를 나눈 끝에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유?

일을 맡은 이상 이왕이면 빨리 완성하고 싶은데, 마땅히 작업할 때가 없어서랄까.

돌아가 봐야 좁다란 기숙사 방이 기다리고 있을 뿐.

답답한 공간에서 작곡을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에단. 안 그래도 예민한 녀석이 자신 때문에 깰까 봐서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는 수없이 선택한 게 찰리스 한쪽 구석에서 작곡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찰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밝았고,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는 나로선 더없이 기분 좋게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찰리가 주스를 가져다주기도 하면서 날 챙겨주었고.

그렇게 한참을 열중하다 보니,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있고 말았다.

그 시각이 새벽 3시.

기숙사로 들어와 얼마 자지도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한 후 나오는 길이었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너 뭐하는 거냐?”

날 따라오던 에단이 멈춰 서더니 딴청을 부린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수업 없어?”

“남이야 수업이 있던 없던.”

“하아, 그래. 알겠는데……. 왜 날 따라오는 건데?”

“누, 누가? 마침 같은 방향이었을…….”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전방에 있는 강의실을.

복도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막다른 곳이란 거지.

그리고 그 강의실은 플롯 레슨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당연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가 꿈인 에단은 듣지 않는 강의이기도 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녀석이 울컥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대체 뭘 얘기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다.

“크, 크리스티나가 그러던데…….”

지금 고백하냐?

왜 얼굴은 빨개진 거며, 시선은 돌리고 있는 건데?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눈치챘으니까.

그럼에도, 그냥 말없이 듣고만 있었던 건…….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괴롭혀주고 싶달까.

솔직히 에단의 저런 모습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무던히 애쓰는 중이었다.

“그 뭐냐……지난번에 하던 거……. 계속하기로 했다며?”

“지난번에 하던 거?”

“……연주.”

“어.”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에단은 망설이는가 싶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혹시…….”

근데 말을 이어나가질 못한다.

하긴, 그때 더럽게 떽떽거렸던 걸 생각하면 쉽게 말하긴 어렵겠지.

“혹시?”

“…….”

“아!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대번에 달라지는 얼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낸다.

모른 척하고 되물었다.

“지니하운드?”

에단의 얼굴이 팍 구겨지는 걸 보곤 픽하고 웃었다.

이쯤 해야겠다.

더했다가는 진짜 삐칠라.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닌가 보네?”

“뭐, 그것도 있고…….”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랑 소모임이랄까. 정기적으로 모여서 함께 연주하기로 했는데, 그거 말하는 건가?”

눈을 반짝였다가 이내 아닌 척하는 에단.

그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그때 보니까 애들이 너랑 합이 잘 맞긴 하더라.”

눈에 띄게 밝아지는 얼굴.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흥! 그야 내가 걔들 실력에 맞춰졌으니까 그렇지!”

“뭐, 그렇다 치고. 우리도 바이올리니스트가 필요하긴 한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에단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고개를 바짝 쳐든 채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하는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도와준다는 식으로 말하는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고 있다.

“오케이.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애들한테도 말해놓을 테니까, 이따가 수업 끝나고 보자고.”

입술 끝이 올라가려는 걸 참는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던지 서둘러 돌아섰다.

아니 그러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어제는 왜 그렇게 늦게 왔냐?”

어? 이 자식 뭐지?

설마 어제 내가 늦게 들어와서 걱정했던 건가?

묘한 눈빛이 되어 녀석을 바라보았을 때, 에단은 이미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틱틱거리며 내뱉은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멍청이! 뉴욕 밤거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피식.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왔을 때, 녀석이 뒤척거렸던 거 같기도 하고…….

황당해져서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흠칫.

설마 저놈 게이 아냐?

에이, 아, 아……아니겠지.

아씨! 진짜면 어쩌지?

“아! 몰라, 몰라!”

머리 아파지려고 해서 신경 꺼버렸다.

그러곤 강의실로 들어갔다.

***

니콜 교수와 허먼 교수의 배려로 현재 내가 받고 있는 레슨은 네 개.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플롯이었다.

클래식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하기에 선택한 것들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공연이 있을 거에요.”

당연한 얘기다.

줄리아드에선 매년 700여 개에 이르는 무료, 유료 공연을 한다.

그중 몇 개는 파리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지에서 스페셜 게스트들까지 초청할 정도로 규모 면에서나 질적으로도 꽤 성대한 공연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크리스마스 공연.

링컨 센터에서 8개의 무료 콘서트가 진행되는데, 막시밀리안 교수가 지금 얘기하는 것도 그때 공연하게 될 필하모닉을 말하는 것이다.

재밌는 건 그 공연에는 니콜 교수 역시 참가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빠질 수 없는 공연이기도 하다.

단, 내가 연주자로 뽑힌다는 전제하에.

“적당히 뽑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다들 최선을 다해주시길.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각자 자신 있는 곡을 연주해보도록 하죠.”

별거 아닌 듯 얘기하고 있지만, 입가에 미소를 함빡 머금고 있는 게 나름 1차 오디션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기야 티오가 많은 바이올린 같은 경우와 달리 플롯은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으니까.

“자, 그럼 순서대로 나와서 곡을 연주하도록 하세요. 아, 시간제한은 없습니다.”

일곱 번째인가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난 한차례 뿔테 안경을 고쳐 쓰곤 조용히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러곤 플롯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곡을 부를지는 이미 결정해둔 상태.

솔직히 플롯은 다루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세를 취한 채, 학생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설마 아는 사람은 없겠지…하는 마음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오, 생각보다 괜찮다.

소리도 그렇고, 연주도 그렇고.

곡이 곡이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기분 좋게 연주를 끝마치고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쳐드는 순간,

흠칫.

다들 멍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다.

뭐야? 다들 왜 저래?

막시밀리안 교수마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더듬거리며 물어온다.

“이, 이 곡은 뭐죠?”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곡인데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막시밀리안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좋군요. 킴은 작곡에도 재능이 있었군요. 예, 느낌 좋아요. 곡도 곡이지만 감정도 잘 녹아 있…….”

그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시간이 지나도 지지 않는 꽃!”

망할!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한 번 소리치고 있었다.

“키, 킴도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