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10화 (110/260)

# 110

#110. 가치관의 차이(1)

내가 돈 얘기부터 들이밀 줄은 생각지도 못했나 보다.

정적이 흐른다.

전화가 끊긴 줄 알았을 정도.

크크큭.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러려는 찰나 브라이언이 웃었다.

- 굳! 아주 좋아, 그런 자세. 그렇지. 자신의 능력에 합당한 대우. 중요하지! 하아, 우리 애들도 제발 좀 널 본받았으면 좋겠다.

말끝에 다시 한 번 웃고 있는 브라이언이었다.

이래서 미국인들과의 대화는 편하다.

한국 같았어봐라, 당장 싸가지 없다고 했을 거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돈만 밝히네 마네…하면서.

그리고 예술의 값어치를 돈으로 매기려 든다고 몰아갈 게 뻔하다.

근데 그게 알고 보면 다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우습게 보고 그런다는 거지.

스무 살도 안 됐으니까, 세상 물정 모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애 다루듯 하다가 뒤통수 맞고 어어 하다가 순간 열이 뻗치게 되는 거랄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럴 공산이 높다.

호구될 공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미국은 철저한 능력주의.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실력 없으면 나이가 많든 적든, 심지어는 친구라도 비즈니스 상대론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 차라리 돈을 빌려주거나 아예 도와주면 모를까.

봐라, 브라이언은 벌써 돈 얘기부터 꺼낸다.

- 일단 계약금으로…….

하지만, 진짜로 구체적인 금액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여기부턴 내 영역이 아니니까.

“아니, 그러지 마시고 돈 얘기는 회사랑 얘기세요. 우린 일 얘기부터 하죠.”

말을 하다만 브라이언 때문에 또다시 침묵.

하지만, 다시 한 번 들려온 웃음소리에 침묵이 깨지며 브라이언이 혀를 내두른다.

- 이거이거, 내가 널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구만. 미스터 강한테서 제대로 배웠어. 이러니 콜린이 늘 끌려다니는 거겠지.

그의 말마따나 흔들어대는 건 이쯤 해두고.

“12곡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좀 더 구체적인 얘기는 자료들을 봐야 알 것 같아요. 알고 있겠지만 OST라는 게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감독 성향이라든가 연출될 장면이 어떤 분위기인지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니까…….”

일전에 송 감독님 영화의 OST를 맡았던 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은 브라이언과 한참을 얘기했다.

- 오케이. 시나리오는 받았다고 하니까 감독 및 배우들 프로필이랑 필모그래피부터 보내면 되나? 아, OST 들어갈 장면 콘티부터 챙겨서 보내도록 하지. 그럼 되겠나?

“우선은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할게요.”

그렇게 브라이언과의 통화를 끝내고 난 후, 곧바로 아저씨한테 전화했다.

“……그렇게 된 거에요.”

어제 레이크 헬 멤버들이 들이닥친 일부터 시작해서 오늘 샤오린이 와서 건물을 보고 간 것. 그리고 방금 브라이언과 통화한 거까지 전부 얘기했다. 물론 찰리스 얘기도 잊지 않았다.

웃긴 건, 꽤 긴 통화였는데도 그중에 알렉스 박에 대한 얘기는 단 한마디로 나오지 않았다는 거다.

아저씨도 묻지 않으셨고, 나 역시 언급조차 안 했다.

왜?

그럴 가치가 없었으니까.

애당초 위협적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되지도 않는 짓거리로 날 가지고 놀려다가 제대로 역풍을 받고 무너져버린 놈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

만일 알렉스 박과 관련해서 주의할만한, 혹은 내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생기면 마루 누나가 연락해 줄 거다.

그전에는 회사가 알아서 처리할 테고.

법적 문제가 되었든 언론 플레이가 되었든 간에.

- 그러니까 네 얘길 정리해보자면, 건물 한 채를 사려고 하는데 100만 불 정도가 더 필요하다? 근데 그걸 브라이언에게서 받아내고 싶다?

크큭.

아저씨 입으로 들으니까, 내가 꼭 강탈하려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래도 말하고자 하는 건 충분히 전해진 것 같다.

“예.”

-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 건에 관해서 내가 알아서 하지. 근데, 넌 거기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뭔 일감을 따오고 있는 거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 자식이, 웃기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끊는다. 브라이언한테 전화 들어오는 거 보니까, 저쪽에서 똥줄이 타나 보다.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메일을 확인해보니 브라이언으로부터 자료들이 넘어와 있었다.

자 그럼 간만에 작업 좀 해볼까?

***

카페에 혼자 앉아서 연필을 끼적거렸다.

사각거리며 음표를 그려나가는 모습이 꼭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나쁘지 않다.

모든 일이 다 순조롭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열에 아홉은 내가 원하는 바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아저씨께서 협상을 잘하신 덕분에 작곡료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다.

물론 당장 계약금만 받아서는 자금이 부족해서 나머진 이번 분기에 미국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메우기로 했다.

사실 조금 놀랐다.

미국에서 낸 음반이 많이는 아니지만,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얘기에.

아무튼, 회사에서도 내가 건물을 사는 걸 반기는 분위기다.

여기에 활동 거점, 즉 외국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를 마련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뭐, 사실상은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지만.

건물 매입을 비롯해 리모델링은 샤오린이 맡아서 해주고 있다.

물론 워낙 바쁜 그녀라서 계속해서 뉴욕에 머무르진 못했고, 그녀를 대신해 날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콴페이펑, 다시 말해 브레드 콴이었다.

옥스퍼드 출신으로 샤오린의 비서이기도 한 그는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빈틈이 없는 남자였다. 뭐, 일터를 벗어나는 순간 180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줘 또 다른 의미로 날 놀라게 하곤 했지만.

부르르르.

전화가 걸려온 건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이 자식들은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는 게 분명하다.

“왜 또?”

- 아니 다 됐나 해서.

콜린 전화가 분명한데, 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제롬인 거냐고?

하, 진짜. 어딜 가나 팀의 막내는 서러운 거구나.

그렇다고 좋은 말이 나갈 리가 없다.

“뭔 전화를 두 시간마다 해? 그리고 작곡 시작한 지 하루도 채 안 지났거든?”

- 두 시간은 넘었는데? 정확히 두 시간 삼십칠 분 지났…….

“야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나도 모르게 목청이 커지는 바람에 카페 안의 사람들이 날 쳐다본다.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확 죽인 후, 속닥이듯 말했다.

“자꾸 그렇게 방해할래?”

- 나도 그러고 싶은데……. 다른 멤버들이 자꾸만……. 아, 유진이 한 곡이라도 됐으면 먼저 좀 달라고 하…….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

그대로 끊어버렸다.

그러곤 잽싸게 짐을 챙겨서 가방에 쑤셔 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라 창피해서 안 되겠다.

일단 여길 벗어나는 게 먼저다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찰리스에 갈 시간이 다되기도 했고.

그때, 다시 한 번 전화가 걸려왔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전화여서 바로 받았다.

“아, 브레드.”

브레드가 반가운 소식을 말해주고 있었다.

- 방금 계약 완전히 마무리 지었습니다.

능력 좋네.

제대로 배운 인재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진짜 일사천리로 진행하는구나.

“수고하셨어요.”

- 뭘요. 건물 한 채 구입하는 것뿐인데요.

이미 금액은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이나 아래쪽.

샤오린은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저쪽에서 급전이 필요하다는 걸 간파하곤 놀랍게도 730만 달러까지 후려쳤던 것.

800만 달러에서 무려 70만 달러를 세이브하다니.

나라면 아마 더 주면 더 줬지 이렇게까지 깎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브레드에게 다시 한 번 수고했다고 말한 뒤, 중얼거렸다.

“이젠 마음이 좀 편해지려나?”

찰리도 곧 건물이 팔렸다는 소식을 접할 터. 물론 내가 그 건물을 샀다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잖아?

굳이 그걸 알려줄 이유도 없으니까.

다른 건 모르겠고 찰리는 가게를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도 직장을 잃지 않으면서 작업실 겸 숙소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이를테면 일타쌍피 아니 일타삼피인 셈.

밤거리를 걸어 찰리스 레스토랑으로 향하면서 기분 좋게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응?

근데 뭐지?

방금 저쪽에서 뭔가 번쩍한 느낌이었는데…….

잘 못 본 건가?

“아씨, 뭐야? 괜히 오싹하게.”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곤 침을 삼켰다.

어두워진 거리.

아직은 차도 많이 다니고, 사람들도 적지 않게 오간다.

세계적인 도시답게 사방에 불이 밝혀져 있어서 음침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아, 이놈의 자의식 과잉이란…….

나는 픽하고 웃고는 뿔테 안경을 고쳐 썼다.

***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

땅값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도 탑급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조마루는 여기로 이사 온 걸 두고두고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왜?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 걸어서 2분.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전부 때려 박긴 했지만, 출근 때 복잡한 도로 위에서 시간을 버리는 대신 침대 위에서 꿀잠을 택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으니까.

더불어 이러한 장점은 퇴근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야말로 넘어지면 코 닿을 데였으니.

특히 피곤한 날에는 바로 달려와 샤워 한판 하고 소파에 늘어져 와인 한잔을 마시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녀는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터라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대충 둘둘 말아놓고선 가운을 걸친 채로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그러면서 와인을 홀짝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전면에 탁 트인 유리창 너머로 도심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17층인지라 누가 볼 거라곤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핸드폰으로 팬 카페를 둘러보고 있던 중이었다.

“어?”

눈에 띄는 게시글 하나.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도준 님 사진 겟. 그중 한 장 공유합니다.]

나이가 좀 있는지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문체. 하지만, 내용은…….

파괴력이 어마어마하다.

올린 지 1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클릭수와 추천수가 1,000을 훌쩍 넘은 게 그 증거다.

그럴 수밖에.

게시글을 클릭해 들어가자, 떡하니 뜨는 사진은 다름 아닌 김도준의 최근……. 아니 바로 전이라고 할 수 있는 따끈따끈한 사진.

외국으로 보이는 카페에 혼자 앉아서 연필을 쥐고 뭔가를 끼적이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 적힌 내용은 심플하다.

화장실 다녀오는 척하며 몰래 봤는데, 작곡 중이신 거 같습니다. 사진 찍는데 떨려서 죽는 줄 알았음. 히히힛. 다행히 눈치채진 못하신 듯. 고뇌하는 모습이 멋지지 않나요?

아닌게아니라 탁자에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치고 연필을 굴리고 있는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캬하! 화보네, 화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 조마루. 하지만 아래쪽에 주욱 달려있는 댓글을 보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 와! 진짜 포스 장난 아님.

- 역시 갓준!

- 흐어어엉. 주니 오빠, 날 가져요.

- 이거 크게 프린팅하면 픽셀 안 깨질까요?

- 근데, 여기 어딤? 지난번에도 그렇고 외국 같은데…….

└ 궁금하지만 참아주세요. 도준 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 혹시 이거 오늘 사진임?

└ 예. 한 시간 전에 찍은 거에요.

- 님, 지난번 사진도 님께서 찍으신 거?

└ 맞아요.

- 지린다. 그럼 님, 지금 주니 오빠랑 같은 도시에 계신다는 거네요? 그것도 매일 주니 오빠 보면서 ㅠㅠ

- 개부럽다!

└ 예. 덕분에 요즘 매일매일 햄볶아요.

- 다른 사진은 없으신가요?

└ 당연히 있죠. 아침에 조깅하는 사진이라던가, 친구분들이랑 대화하시는 사진. 특히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시는 사진은 정말이지…….

- 헉! 님 대체! 혹시 천사이신가요? 제발 이 무지한 신도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훗! 상황 봐서 몇 장 정도는 풀 수도 있어요.

댓글에 꼬박꼬박 답글을 달아주고 있다.

그것도 무척이나 잘났다는 듯이.

확인해 보니 아이디는 JUNLUV.

순간 조마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어느 틈엔가 그녀의 손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아서 살짝 피곤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 어쩐 일이세요?

샤오린은 지금 막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쉬려던 참인 것 같았지만, 그런 걸 배려해줄 여유 따윈 없었다.

“도준이가 노출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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