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 일도 아니죠(3)
멍하니 날 바라보던 찰리.
심각한 상황이란 것도 잊었는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사려고?”
“가능하면요.”
안 그래도 기숙사가 조금 불편하던 참이었다.
밤에는 연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다가, 간혹 악상이 떠오를 때도 악기를 다룰 수 없으니 메모로 그치는 경우도 다반사. 게다가 룸메이트까지 있으니 함부로 밤샘을 할 수도 없었다.
지하에 연습실이랑 녹음실까지 갖춰놓고 있는 집이 절로 그리워질 수밖에.
웃기는 했지만, 찰리는 대답해주었다.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고. 대충 800만 달러 정도 하는 거 같던데.”
생각보다 싸네?
800만 달러면 한화로 90억 원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
그 정도면 못 살 것도 없다.
외관밖에는 못 봤지만, 5층 건물이던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찰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꿈은 크게 가져야지.”
***
조금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시차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딱 적당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샤오린,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수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 그래도 언제쯤 전화가 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호호호. 뉴욕생활은 할만해요?
“그럭저럭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요 며칠 알렉스 박 때문에 시끄럽던 일까지 얘기를 나눈 뒤에야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뉴욕에 건물을 하나 살까 하는데, 샤오린 생각은 어떤가 해서요.”
- 뉴욕이면 어디요? 설마 맨해튼?
“예. 이스트 빌리지 쪽인데. 5층짜리 건물이에요.”
잠시 생각하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다가 샤오린이 얘기했다.
- 비행기 표 알아보고, 바로 갈게요. 일단 만나서 얘기해요.
“그럴 것까지는 없…….”
- 무슨 말이에요. 남의 일도 아니고.
아니, 그러니까 이게 왜 남의 일이 아닌 거냐고.
샤오린! 우리 가족 아닌데요?
- 거기 땅값 비싸요. 잘못하면 바가지 쓰는 수도 있단 말이에요.
이렇게 얘기하곤 전화를 끊어버리는 샤오린.
참네.
되게 바쁜 걸로 아는데, 괜히 부담되네.
***
다음날 피아노 수업을 받고 난 후였다.
“저, 킴…….”
크리스티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머뭇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한다.
답답했는지 조안나가 대신 말했다.
“킴, 어제 너랑 헤어지고 나서 우리끼리 얘기해봤는데…….”
“우리라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한텐 아직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일단 우리 두 사람.”
“그런데?”
“저번에 너랑 같이 녹음…녹화했던 작업 말이야.”
“…….”
“꽤 재밌더라고. 뭔가 자유롭기도 하고……. 아,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는데, 이제껏 해왔던 거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랄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까? 줄리아드에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흠, 말인즉슨 재미 들렸다?
한마디로 일정한 틀 안에서만 놀다가 그 틀을 벗어나 보니 즐거웠다는 얘긴데.
아! 그러고 보니, 니콜 교수한테 보고를 안 했네!
어쩐지 아까 수업 때 살짝 노려보는 듯하더니만.
“나쁜 생각 같진 않은데, 시간이 되겠어? 곧 있으면 연말 공연 때문에 바빠진다고 들었는데.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테스트를 통해서 단원을 뽑는 걸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경쟁은 치열할 테다.
그 자체로 경력이 되는 일이니까.
“그럴 리가.”
흠, 피아노는 한 대만 필요할 텐데.
그럼 두 사람 중 한 명은 떨어진다는 말이잖아.
그러고 보면 저 둘의 관계가 묘하긴 하네.
경쟁자라면 경쟁자인데도 저렇게 딱 붙어 다니는 걸 보면.
“일단 알겠어.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니콜 교수님을 뵙기로 한 걸 깜빡했지 뭐야.”
“아! 그랬어? 미안.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네 얘기 들어보니까, 나도 재밌을 거 같긴 해.”
“그럼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거지?”
대답 대신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데, 오늘은 점심 같이 안 먹을 거야?”
“미안. 선약이 있어서.”
샤오린이 어젯밤 직항으로 비행기를 탄다고 했으니, 몇 시간 후면 도착할 예정이었다.
“맛있게들 먹어.”
크리스티나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애써 무시하며 돌아섰다.
그러곤 걸음을 서둘렀다.
아까 수업 중에 날 바라보던 니콜 교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
노크를 하자 들려오는 소리.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니콜 교수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뒤쪽으로 난 유리창 너머로 뉴욕의 시가지가 보였다.
“무슨 일이죠?”
“보고 드리러 왔죠.”
“흐응.”
눈빛이 바뀐다.
사무적인 눈빛에서 흥미롭다는, 아니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말해봐.”
말투도 달라졌다.
즐겁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말투였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씨익.
“확실히 밟아줬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확연히 올라가고 있는 입꼬리. 니콜 교수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눈으로 재촉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빠짐없이 얘기해주었다.
녹화 과정을 비롯해 커버곡을 유투븐에 올린 이후 벌어진 일들까지.
거기에 더해서 누군가 올린 비교 동영상 얘기까지 한 후, 네티즌들의 반응 또한 자세히 말하는 동안 니콜 교수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다가 끝내 활짝 웃었다.
정말이지 화려한 웃음이 아닐 수 없다.
그 모습이 꼭 승리를 거머쥔 전장의 여신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두려워서.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로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아저씨만큼이나 말이다.
내 편일 때는 더없이 든든하지만, 등을 돌리면 한없이 무서운 존재들.
우리 어머니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으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수고했네.”
“뭘요. 교수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니콜 교수는 깔깔 웃더니, 한쪽 입술을 비틀며 날 흘겨보았다.
차라리 이편이 아까보단 덜 무섭게 느껴진다.
“그렇게 안 봤는데, 킴은 노래만큼이나 말도 잘하는 거 같아.”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칭찬 아니에요, 킴. 조심하란 얘기지.”
“예?”
칭찬인 줄 알았더니만.
“농담이 아니라, 조심해야 해. 킴 같은 사람은.”
“……뭐를요?”
“뭐긴.”
“……?”
“여자지.”
다시금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 붉은 입술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
원래대로라면 샤오린을 데리러 공항에 가는 게 맞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보단 그녀가 한 백만 배쯤 더 뉴욕지리에 정통 하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그녀가 차를 한 대 렌트해 직접 운전해 줄리아드까지 달려왔다.
“오래 만이에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특히 웃을 때 활처럼 휘는 눈.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었는데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건 단지 관리를 잘 받아서만은 아닐 터다.
선천적으로 동안임이 분명하다.
그렇긴 해도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지,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이모’ 혹은 ‘누나’란 말이 절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마루 누나의 경우에 비춰보면 이왕이면 누나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지만, 국적이 달라서인지 그냥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
“샤오린도 잘 있었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니콜 교수의 얘기가 머리에 남아서인지 살짝 조심하게 된다.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갈수록 주변에 여자들이 많아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배고파요. 설마 만사 제쳐놓고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밥은 사주겠죠?”
“마침 괜찮은 식당을 알게 됐는데 잘됐네요.”
지니하운드를 이틀 연속 가게 될 줄은 또 몰랐네.
뭔가 뉴욕에 오고 부턴 엥겔지수가 팍 올라간 느낌인데?
***
샤오린은 지니하운드가 마음에 든 듯했다.
식사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더니, 마지막엔 활짝 웃으며 만족한 얼굴로 식당을 나왔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찰리스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뉴욕에는 꽤 자주 오는지, 내비게이션조차 켜지 않고 능숙하게 차를 몰아 목적지에 도착. 대로변에 잠시 정차를 시켜놓곤 차분한 눈으로 건물을 살펴보기 시작하는 그녀였다.
그런 뒤 말했다.
“Mix Use Building이라……. 대지는 한 200제곱미터쯤 되고, 5층 건물에 1층은 상가. 2층부턴 1베드룸 1베스룸 8가구인 거 같네요.”
한차례 주변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얘기했다.
“맨해튼 다운타운 중심부에, 쿠퍼 유니언 예술대와 뉴욕대 사이에 있으니 프라임 로케이션이라고 해도 되겠고. 이 정도면 임대수익으로 연 40만 달러 정도 가능하겠어요. Cap Rate, 즉 연간 수익률은 대충 4.3%? 그쯤 될 거 같네요.”
놀랍다.
그냥 한번 쓰윽 훑어보는 걸로 견적이 나온단 말이지?
투자에 관해선 전문가라고 하더니 헛말이 아니었네.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800만 달러는 좀 세네요. 기껏해야 770만? 잘하면 760만까지도 가능할 거 같은데.”
흠, 그래서 좋다는 건지 나쁘단 건지.
“사지 말까요?”
“아뇨. 나쁘지 않은 선택이에요. 물론 어떻게 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 얘기 안 했나요? 1층은 그대로 세를 주고, 나머진 제가 통째로 쓰려고요.”
뜻밖이었던지, 샤오린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눈웃음을 짓는다.
대충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똑똑하다 싶었다.
“작업실로 꾸밀 생각인가 보네요.”
“예. 5층은 숙소로 이용하고 2층부터 4층은 연습실이랑 녹음실로 만들 생각이에요.”
“괜찮네요. 그 정도면 그리 좁진 않을 거에요.”
“그럼?”
“예. 구매하는 쪽으로 진행 보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맡아서 할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럼 나야 좋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믿을 수 있으니까.
물론 수고하는 데 따른 비용이야 제대로 지불할 생각이었고.
그전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지만.
“어떻게 할까요?”
“뭐를요?”
그녀는 옅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돈 말이에요.”
“아!”
아무래도 이 정도 규모의 거래를 하려면 지금 가진 돈만 가지곤 안 되겠지? 그럼 우선은 환전부터 해야 하나?
당연한 얘기다.
내 돈은 전부 어머니가 관리하고 계셨고, 그 돈들은 한국에 있는 통장에 들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번에 중국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제가 관리하기로 했잖아요.”
아, 확실히 그런 얘기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회사 몫은 그대로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나머진 샤오린이 투자하는 걸로 했었지.
“그게 좀 되는데…….”
‘얼마나요?’ 하는 눈빛을 보내자, 샤오린이 씩 웃는다.
“이 건물 몇 채는 사고도 남을 정도?”
헐! 반년 좀 더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그만큼 벌었다고?
한데, 놀라긴 좀 이른 거 같다.
“아, 혹여 오해하진 말아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현금만 그렇다는 얘기니까. 나머진 여전히 투자되어 있는 상태. 그것까지 포함하면…….”
그동안 꽤 불린 모양이네.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일단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중지시켰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들을게요. 근데, 중국에 있는 돈을 가져오기도 쉽진 않을 거 같은데요? 시간이 막 몇 달씩 걸리는 거 아니에요?”
중국 정부에서 하도 엄격하게 자금 유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묻는 얘기였다.
“훗.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을까 봐서 자금 중 일부는 미국으로 옮겨놨으니까.”
놀랍다.
진짜 복덩이는 따로 있었네.
감탄으로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통제하며 물었다.
“얼마나 되는데요?”
“천만 달러 정도? 흠, 그러보니 건물 리모델링 하고 작업실에 기자재도 들여놓고 하려면 백만 달러 정도 모자랄 거 같긴 하네요. 이렇게 하죠. 급한 대로 모자라는 돈은 제 돈으로 충당하고, 나중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정도 돈은 나올 데가 있으니까.”
“그래요?”
되물으며 날 잠시 바라보던 샤오린. 그녀는 이내 알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내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눈빛이다.
뭐 안되면 자신의 돈을 써도 그만이란 표정 같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가 얘기했다.
“그럼 저는 건물주와 접촉해볼게요.”
“계약 직전이라고 하던데, 가능하겠어요?”
다른 건물을 사도 그만이지만, 이왕이면 찰리를 도와주고 싶었다.
“이 정돈 일도 아니죠. 정 안되면 웃돈 좀 얹어주면 될 일.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세요.”
진짜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는 샤오린이었다.
***
샤오린이 따로 움직이는 사이, 나는 전화를 걸었다.
“브라이언?”
- 아, 도준. 얘기는 들었어. 작곡해주기로 했다면서?
“예. 그러기로 했어요.”
- 고맙네, 진짜.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좀 골치가 아팠거든.
“뭘요. 공짜도 아닌데. 그래서 말인데요.”
자, 이제부터는 돈 벌어야 하는 타이밍.
뉴욕에 집 한 채 가지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머릿속에 샤오린이 말해준 금액을 떠올리며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얼마나 주실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