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105. 잔인한 계절(7)
눈을 감았다.
참아?
미쳤냐?
이걸 참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 새끼가 돌았나?”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화가 안 날 수 없다.
그래, ‘LONGING TIMES’를 지 꼴리는대로 편집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
아주 화려하게 연주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었던 마음도 이해한다.
하필 고른 곡이 그 곡이라는 게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참았던 건 다름이 아니다.
내가 그 곡을 만든 이유를 모를 거란 생각.
노래방에 갇혀 있는 동안 쌓이고 쌓였던 그리움이란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걸 그로선 알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참아줬다.
모르고 저지른 짓은 죄가 아니니까.
설사 그게 날 이용해 인기를 얻으려는 얄팍한 속셈이라는 게 훤히 보였음에도.
하지만, 이건 아니다.
한국땅에서 내가 ‘조금만 더’를 왜 만들었는지, 어째서 그 곡을 불렀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다.
한국이 이럴진대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곡은 날 애타게 기다리는 중국팬들을 위해서, 나아가 한국팬들까지 포함해 날 사랑해주는 모든 팬들을 위해 내 나름대로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만든 곡이었다.
물론 안다.
그래서 가사가 어설프다는 것쯤은.
내가 직접 쓰다 보니 그럴 수밖에.
그럼에도, 팬들은 받아주었다.
기쁘게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불러주었고, 웃고 웃어주었다.
그런 곡이다.
그 곡은.
그런데 그걸 건드려?
아니 건드린 건 좋다.
다 좋은데…….
뭐든 정도라는 게 있는 거다.
원곡을 제 입맛에 맞춰 바꾸더라도 최소한의 존중이란 게 필요한 법. 적어도 이 곡을 왜 만들었는지를 안다면.
한데, 댄스곡처럼 가볍고 빠르게?
뿐만 아니라 무슨 장난치듯 피아노 연주에 맞춰 흥얼거리는 노래라니.
그러면서 뭐?
싸구려 감성?
아,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네.
진짜 화가 나면 머리가 차가워진다는 게.
“킴! 왜 그래?”
“괜찮아?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양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면서 속으로 안도했다.
아까 빡쳐서 내뱉은 욕이 한국어라는 걸.
물론 분위기는 고스란히 느껴졌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아까 보았던 영상에서 알렉스 박이 치던 피아노를 떠올리면서.
“아, 밥 먹자고 했지?”
어안이 벙벙해져서 날 바라보는 그녀들에게 웃어 보였다.
“가자. 할 얘기도 좀 있으니까.”
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나아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크리스티나와 조안나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
식사 후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간 뒤,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부터 얘기해야 해서 꽤 시간이 걸리긴 했다.
그녀들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도저히 못 믿겠던지 인터넷을 뒤지며 한참을 검색하고, 또 유투븐에 올라온 영상들까지 확인할 정도. 특히나 중국 천안문 광장 공연을 본 두 사람은 멍하니 날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후에야 내 얘기가 사실이란 걸 받아들였다.
“킴! 정말 이게 너라고?”
“……진짜 이렇게 대단한 시, 싱어였어?”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의미 모를 탄성을 내지르는가 싶더니 벌써 몇 번째인지 묻고 있다.
“서운한 건 아니지?”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정답이었나 보다.
날 바라보는 눈빛에서 서운함이 묻어난다.
특히 크리스티나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다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려던 건 아냐.”
“알아. 이제 안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말을 해주겠어.”
크리스티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을 때, 조안나가 뭔가 이해했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어쩐지, 잘 부르더라니.”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이것 참. 쿨하다고 해야 할지. 태세전환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좀 더 놀라워한다거나, 섭섭함을 떨치지 못하고 투정이라도 부릴 줄 알았더니만.
조안나는 물론이고 크리스티나마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먼저 말했다.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에 앞서서.
“다들 고마워.”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뭐, 뭘……. 우리 사이에…….”
조안나 역시 활달한 목소리로 외쳤다.
“왠지 재미있을 거 같은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재밌을 거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들에게 말해주었다.
“장담할게. 평생에 다시 없을 경험들을 하게 될 거야.”
***
“내가 왜 널 도와야 하는데?”
에단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룸메잖아.”
간단히 대답하자, 에단은 황당한 눈빛을 해 보였다.
자식이, 까칠하긴.
“좋아. 이번에 도와주면 밥 한 끼 살게.”
“미친! 내가 그런 말에 넘어…….”
“두 끼.”
“야이….”
“세 끼! 지니하운드에서.”
“지, 지니하운드?”
“싫어? 그럼 관두고.”
“누, 누가 싫다고 했나? 왜 널 도와야 하는지 궁금하다는 얘기였지. 큼…. 근데 당연히 코스겠지?”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당연하지.”
“알겠다. 돕도록 하지.”
지니하운드라는 말 한마디에 깨갱거릴 것이.
미슐렝 별 3개를 받은 레스토랑.
우리나라 돈으로 40만 원 이상을 지불해야 1인 정식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지니하운드였다.
맛?
안 먹어봐서 모른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에단이 미식가라는 것쯤은.
잘은 몰라도 그의 집안이 무척 좋은 걸로 아는데, 아마 그 탓일 거다.
그렇다곤 해도 학생 처지에 한 끼에 40만 원씩 쓰기엔 부담스러울 테지.
그것도 세끼.
미끼치곤 나쁘지 않다는 거지.
아무튼,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밟아주는 일만 남았다.
내가 한국어로 중얼거리자, 에단이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너한테 한 말 아냐. 신경 쓰지 마.”
***
나름 준비를 끝내고 나자, 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독거렸다.
내가 무시를 넘어 모욕을 당한 게 그렇게나 분했던지 말리지 않았으면 S그룹의 힘이라도 동원할 태세였다.
그런 그녀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아저씨께 연락했다.
- 어떻게 할 거냐?
기다렸다는 듯 물어오시는 아저씨.
“좀 시끄러울지 몰라요.”
- 언젠 조용했고?
SIDE B라는 닉을 사용하고 있을 때, 표절 의혹이 일어났던 걸 얘기하시는 걸 테다.
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 건지.
“제가 먼저 건드린 적은 없는데요?”
- 줄리아드 간 거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었냐?
“별로 그런 생각은 없었는데요. 알려진다면 좀 귀찮아질 거라곤 생각하지만.”
- 그럼 상관없네.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것도 아니면서 묻긴 뭘 물어? 하고 싶은 대로 해.
“에이, 그래도 소속사에는 말해둬야죠.”
- 헛참.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더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와, 진짜!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식는다더니. 이러실 거에요?”
- 바빠. 앞으로 너 사고 칠 거 생각하면 일분이 아깝다. 준비되면 그때 전화해.
“예.”
눈앞에 그려진다.
아저씨가 웃고 계신 게.
그리고 고 팀장이 여기저기 전화하고, 마루 누나가 카페마다 들려서 댓글 달고 있는 모습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이제 뭐부터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
“어쩐 일인가요?”
다리를 한차례 꼬면서 니콜 교수가 묻고 있었다.
“부탁 드릴 게 좀 있어서요.”
“부탁?”
의아하다는 듯 날 쳐다보던 그녀는 책상 위에 팔을 괴곤 턱을 받치며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수업이랑은 관계없어 보이고……. 뭔가 재밌는 일을 하려 나보네?”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그러자, 니콜 교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들어보고.”
그렇게 나올 줄 알았기에 준비한 얘기를 꺼냈다.
“여기 와서 마음 맞는 애들을 몇 명 만났거든요.”
“그런데?”
“걔들하고 연주를 한번 해볼까 해서.”
“그럼 하면 되잖아?”
“방음이 좀 잘되는 데가 필요하거든요.”
“응?”
니콜 교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흥미롭다에서 몹시 흥미롭다로.
“왜지?”
“저……. 간만에 노래를 해볼까 해서요.”
또다시 가늘어지는 눈.
그러더니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대체 얼마나 내지르려고 그러는 거지?”
대답은 필요 없었다.
이내 다시 물어왔기 때문이다.
“근데, 정말 아까 그 이유 때문이야?”
“……?”
“방금 말한……. 친해졌다는 애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째 그것만은 아닌 거 같은데?”
다 알고 있다는 듯 보였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을 보면.
“혹시 신곡이라도 내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원래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이쯤 되면 차라리 정면돌파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상황 자체가 간단했으니까.
특히 버클리라는 단어는 일종의 트리거였나 보다.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건가?
잠시 후,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니콜 교수. 그녀의 입꼬리는 대체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 걸까? 광대까지 뻗어 올라간 입매. 난 오늘 어쩌면 그녀의 진면목을 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야.”
“…….”
“제대로 밟아줄 자신은 있는 거겠지?”
대답이 필요한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이자, 그녀 역시 미소 짓는다.
“근데, 그런 것까지 나한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나? 아무 곳이나 빈 연습실에서 하면 됐을 일을.”
저렇게 묻고는 있지만, 표정은 또 다르다.
확실히 내 판단은 맞았다.
나중에 알게 됐으면 분명 말이 나왔을 터다.
“제 지도교수님이잖아요.”
흐뭇한 표정.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 되어 그녀가 말했다.
“이왕이면 녹음실로 해.”
“그럴 필요까지는…….”
“해!”
“……예.”
다소 강경한 얘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니콜 교수가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도준.”
“네. 교수님.”
“내 새끼가 어디 가서 처맞고 왔는데,”
“아, 그 정도는 아니…….”
“가만히 지켜만 볼 부모는 없어.”
한기를 풀풀 날리는 눈동자.
뿐만 아니라 왠지 몸서리가 쳐지는 음성이었다.
“필요한 건 뭐든 얘기해!”
아니 그러니까, 이 정도까지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데…….
“지금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대신….”
“…….”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정도로!”
화려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얘기했다.
“잔인하게 밟아주도록.”
씨익.
“후회하게 해주죠.”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나오는데, 니콜 교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버클리 따위가!”
***
수업받는 중에 시간을 쪼개가며 틈틈이 연습해야 해서 녹음까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시간이 걸렸다.
그래 봐야 알렉스 박의 도발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좋아!”
가볍게 손뼉을 치곤 돌아보았다.
그러곤 두 사람, 크리스티나와 조안나에게 물었다.
“크리스티나 준비됐지? 근데 조안나, 진짜 켤 수 있어?”
“소싯적에 장난삼아 몇 년 가지고 놀았어.”
“그럼 됐고.”
씨익 웃고는 에단에게 말했다.
“잘 부탁해.”
“흥! 걱정 마시지.”
나는 급조된 밴드, 아니 필하모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나.
첼로를 세우고 긴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조안나.
비딱하게 서서 바이올린을 턱에 붙인 채 활을 잡고 있는 에단.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곤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곤 이미 돌아가고 있는 무비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얘기했다.
“나중에 잘라낼 거니까, 얼굴 나올 걱정은 하지들 말고. 그럼 이제 시작한다. 원, 투…….”
쓰리는 굳이 외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녹음, 아니 녹화가 진행되었다.
알렉스 박의 노래, ‘흐느낌’의 커버곡이.
온갖 장비가 갖춰져 있는 줄리아드의 녹음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