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03화 (103/260)

# 103

#103. 잔인한 계절(5)

아마 세상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희주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 도준아, 지금 뭐해?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수업에 들어가려던 참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분명 상냥한 음성이었지만,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으니까.

하지만, 찰나와 같은 순간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

무턱대고 전화부터?

내가 아는 희주는 최소한의 배려라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다.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하긴 하지만, 사리분별만큼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미국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먼저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뭐, 아직 사귀자고 말한 적이 없어서 살짝 어정쩡한 관계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것보다는 혹시라도 자기가 전화를 걸었을 때, 내가 수업 중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때문에 늘 전화하기 앞서서 문자를 보내거나 그것도 안 되면 메일이라도 보낸 후에 전화를 걸어오곤 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전화를 걸어왔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려운데…….

뭔가 무섭잖아.

이럴 땐,

“응, 여!자! 동!기!들!이랑 카페에서 차 마시면서 음!악! 얘기 중이야.”

무조건 이실직고가 최고다.

빌미를 줄 만한 건더기를 남겨선 안 된다는 판단……아니 본능적인 감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잠깐의 침묵 속에서 얼음이 서서히 녹아가는 느낌이었다.

그 침묵을 깨고 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푸근한 음성이었다. 마치 안심이라도 했다는 듯.

- 미안. 내가 방해한 거면 어떡해?

“에이, 그런 거 아냐. 아, 잠시만…….”

난 얼른 화상 통화로 전환했다.

그리고 머그잔을 지지대 삼아 핸드폰을 테이블 한쪽에 세워두곤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일부러 영어로 얘기했다.

“인사해. 여긴 크리스티나 그리고 이쪽은 조안나. 피아노 수업 같이 듣고 있어. 아, 얘들아, 희주라고 소꼽……여자 친구.”

핸드폰의 화면 위에 떠올라 있는 희주의 눈빛이 가라앉는 것 같아, 얼른 말을 바꿔 버렸다.

젠장!

뭔가 말린듯한 느낌인데…….

아니다.

어차피 서로 말만 안 했지, 사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괜히 분란 일으킬 이유가 없지.

응?

근데, 얘들은 왜 이래?

조안나는 그나마 좀 나은데,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쳐 간다.

이에 비해 희주는 살짝 고개를 쳐들고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다.

말투도 그렇다.

물론 모국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다.

- 어머, 얘는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 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되게 당당해 보이는데?

- 하이, 반가워. 우리 허, 허니 친구들이라니까 괜히 쑥스럽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허니라는 말을 할 때 더듬긴 했지만, 시종일관 당당하달까.

뭔가 가진 자의 여유까지 느껴지고 있다.

“나도 반가워. 킴의 여자친구가 이렇게 예쁜 줄은 상상도 못했는 걸?”

조안나가 손까지 흔들며 웃고 있다.

크리스티나도 말없이 웃는 게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뭔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이렇게 잘 지나가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 근데, 도준아. 여기 난리 났어.

“응? 그게 무슨 말…….”

- 팬 카페에…….

“자, 잠깐만.”

얼른 음성통화로 돌리곤 크리스티나와 조안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카페를 빠져나왔다.

“아, 미안. 말하는데…….”

- 음, 걔들 너 가수란 거 모르는 거야?

“말해봤자, 괜히 불편해지기밖에 더하겠어?”

- 하긴.

“근데, 아까 하던 말은 뭐야?”

- 실은…….

희주의 설명을 듣고 난 뒤, 황당해져서 물었다.

“그러니까, 뭐야? 열애설?”

부르르.

핸드폰이 울리며 문자가 날아들었다.

첨부된 사진이 보인다.

흠, 그러니까 이게 지금 SNS에 떠돌고 있는 사진이란 말이지.

나랑 크리스티나가 다정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히야, 누군지 몰라도 잘 찍었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사귀는 줄 알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카페 안에 누군가 날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굳이 저 지뢰밭에 다시 들어갈 이유가 없지.

하아, 그나저나 역시 뿔테론 안되는 건가?

쳇! 이래서 영화는 믿을 수가 없다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고…….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 아냐. 바쁘면 꼭 전화할 필요 없어. 나중에 시간 날 때 천천히 연락해도 돼.

뭔가 되게 여유로워진 목소리였다.

알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때 마침 크리스티나와 조안나가 카페에서 나오기에, 바쁜 일이 있다고 얘기하곤 그녀들과 헤어졌다.

아쉬워하는 눈빛들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마루 누나한테 전화했다.

걱정돼서라기보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서였다.

“누나, 전 데요.”

- 오올. 우리 도준이. 어른 됐더라?

뭐야? 알고 있……. 하긴, 모를 리가 없지.

고 팀장님이나 마루 누나가 온종일 하는 일이라는 게 반쯤은 모니터링이라고 할 수 있으니.

“심각한 건 아닌가 봐요?”

- 스캔들 한두 번인가? 샤오린이랑도 났었고 씨크릿걸즈의 경우엔 돌아가면서…….

“그건 일하면서 그런 거잖아요.”

-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가십으로 취급된 거고.

“이번엔 좀 다르지 않아요? 게다가 여긴 미국인데…….”

-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너 그 금발이랑 잔 거…. 응? 혹시?

“누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난 뒤, 마루 누나가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 이쪽에선 그냥 놔둬도 될 거라고 판단했어. 나중에 결국 너 유학 간 거 다들 알게 될 건데, 그럼 자연스럽게 해명될 일이잖아. 어차피 그동안 활동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너도 신경 쓸 거 없어.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누나.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때였다.

- 아, 것보다는…….

누나가 피식 거리더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알렉스 박?

갑툭튀도 아니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누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이상한 말들을 하고 있다.

- 팬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는데, 글로만 보는데도 무서울 정도야.

흠, 이건 좀 신경 쓰이네.

알렉스인지 뭔지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괜히 이런 일로 팬들이 그러는게.

난 아무렇지도 않은 채, 아니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띵까띵까 하고 있었다는 느낌?

뭐랄까.

좀 미안해진달까.

- 팬 카페에 글이라도 남기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뇨.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거 같아요. 그냥 놔두죠, 뭐. 딱히 절 욕한 것도 아니잖아요.”

- 그, 그럴래?

누나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다.

혹여라도 내가 기분이 상했을까 봐 저러는 거겠지.

아마 팬들이 싸우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거고.

누나와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알렉스 박인지 뭔지 하는 놈이 뭐라고 했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솔직히 내 앞가림하는 것도 박찬 판국에 무슨…….

근데, 좀 웃기긴 하다.

“요즘 같은 때에 무슨.”

세계급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진짜 촌스럽게.

픽하고 웃어버렸다.

***

줄리아드 기숙사.

방문 옆에는 크리스티나와 조안나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다.

“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베개를 끌어안고 얘기하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그 모습에 조안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글쎄. 알 수 없지. 아무 일도 없는 거 같진 않은데…….”

그때 들려온 안쓰럽다는 듯한 목소리.

“낮엔 공부하고 밤엔 일하느라 그런 거겠지. 휴우. 우리 킴, 힘들어서 어떡하냐? 근데, 킴 말이야. 진짜 대단하지 않아?”

조안나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언제부터 우리 킴이 된 거람?

어이가 없어서 크리스티나에게 맞장구를 쳐줄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하긴. 킴이 좀 괜찮긴 하지.”

“좀?”

크리스티나의 반문에 조안나가 웃고 말았다.

“그래, 많이! 이제 됐냐?”

솔직히 킴이 대단하긴 하다.

조안나가 보기에도 킴의 집안은 보통이 아니다. 꽤 잘사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킴은 낭비라곤 하지 않는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확실하다.

소탈한 성격에 매사 성실한 타입.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물건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모습 역시 꽤 보기 좋다.

대신 악기에 모든 걸 쏟아부은 모양이지만.

아마 악기를 산 돈은 집안에서 유학비로 보내준 돈일 게 분명하다. 그렇게 모든 돈을 악기……. 아니 자신의 미래에 투자하곤 대신 열심히 일해서 생활비를 버는 걸 테다.

아니 어쩌면 그 돈들도 자신이 일해서 벌은 걸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은 거 같지 않은데, 어쩜……. 하아, 진짜 보면 볼수록…….’

진짜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 잘사는 집 애들은 유학을 오면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돈을 펑펑 써대며 노느라 바빠서 공부를 내팽개치기 일쑤였으니까.

거기에 비하면…….

“그 여자애도 킴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거겠지.”

“하아, 천재인데 소박하기까지 하다니. 나라도 반했을 거야.”

둘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도준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

마루 누나한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 도준아, 유투븐에 커버곡 동영상이 하나 떴는데…….

“커버곡이요?”

- 응. 근데 그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되물었다.

누나의 태도로 보아 짚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제 곡을 부른 모양이네요.”

- 으, 응. 맞아.

빙고.

맞췄으니 웃으면서 즐겁게 대화를 마무리하면 좋을 텐데…….

어째 그럴 분위기가 아니네?

마루 누나가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하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 혹시 보게 되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말고.

“예? 제가 왜요? 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잘 알면서…….”

- 그렇다면 다행이고. 근데, 거기 생활은 어때?

말을 돌리는 누나에게 적당히 맞춰주면서 잠시 통화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유투븐에 들어가 내 이름으로 검색하자, 나와 관련된 동영상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 중 하나. 오늘 날짜로 올라온 영상 하나가 보였다.

대체 뭐기에 그러나.

클릭해보곤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알렉스 박이라고 했던가?

동영상에는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손을 댄 흔적이 많이 보이는 ‘LONGING TIMES’가.

꽤나 화려하게 바뀐 곡.

원곡의 느낌이 싹 사라졌다.

대신 테크닉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 곡 특유의 허밍까진 없었지만, 알렉스 박의 연주 실력은 상당해서 무슨 독주회 영상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그렇게 영상이 끝날 때까지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기분이 참…….

콕 짚어 말할 순 없는데 그다지 좋진 않네.

다른 곡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곡을.

하아, 내가 이걸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그것도 내가 이 곡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깡그리 지워버리고 그냥 지 꼴리는대로 친 거 같은 느낌이었다.

쯧, 그렇다고 뭐라 할 것도 아니지.

커버곡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굳이 말하면 2차 창작물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그래도 마음은 속일 수 없나 보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피아노는 좀 치네.”

여기까지였다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다음날, 마루 누나한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알려준 기사.

제목만 보고도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알렉스 박, 김도준이 만든 곡 별거 아냐. 이 정도 재능은 버클리에 가면 차고 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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