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 잔인한 계절(4)
당최 이해가 안 간다.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왜 얘들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야?
뿐만 아니라 눈빛이 흔들리는 게 혼란스럽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실망한 건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좀 대책 없이 지르긴 질렀지?”
아무런 말도 없이 날 바라보는 그녀들을 보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그러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그래도 비싼 악기가 소리도 좋겠지 싶어서…….”
그때였다.
크리스티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꼭 잡는다.
“몇 개월이야?”
“응?”
“할부 아냐?”
하, 할부?
생각도 못했다.
저런 말이 나오리라곤.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액 현금. 온라인으로 쏴줬어. 일시불로.”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른다.
어느새 내 손을 쥐고 있던 크리스티나도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어색함이 흐르는 공간 안에서 그 침묵을 깨버린 건 조안나였다.
“와아! 너희 집 부자구나!”
음, 우리 집이 부잔가?
기준의 문제이긴 하지만, 가난하진 않지.
게다가 외할아버진 확실히 부자……. 아니 거의 재벌급이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하지만, 저 악기들은 내 돈으로……. 굳이 이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랬다간 왠지 다른 의미로 시달릴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편이지.”
근데, 쟨 또 왜 저래?
크리스티나가 또다시 눈을 빛내고 있다.
그러더니 감탄한 말투로 얘기한다.
“그런데도 일하는 거야?”
“응? 으…응.”
“진짜 누구랑 비교되네.”
이쯤 되면 그 누구가 누군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미안 에단.
절대 의도하진 않았어.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킴.”
이번엔 조안나가 눈을 반짝인다.
지금 당장에라도 가을 신상품을 걸치고 도도한 표정으로 런웨이를 걸어야 할 것 같은 모습으로.
“노래도 배운 거야?”
배우긴 배웠지.
엄청 오래.
그것도 일대일 과외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는 다시 한 번 씁쓸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 옆에 딱 붙어 앉아 날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크리스티나가 덤벼들 듯 물어왔다.
“피아노는 언제부터 치기 시작했는데?”
이거 뭐지?
무슨 청문회 같은…….
살짝 귀찮아져서 그냥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는 두 여자.
뭐가 그리 놀라운 건지, 크리스티나가 외쳐 물었다.
“한 살?”
얘도 살짝 나사 하나둘쯤 풀린 거 아닌가 싶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그럼?”
“한 달.”
갑자기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하는 크리스티나.
조안나도 같은 모습이다.
아니,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놀라운 건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게 그렇다는 거지, 어느 정도 지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 씨! 이러니까 진짜 무슨 청문회 같잖아.
“아,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건반이라면 이전부터 쭉 다뤄왔어.”
“건반?”
“신디사이저.”
“아!”
뭔가 납득한 표정이 된 두 사람.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역시……. 신디사이저는 오래 쳤나 봐? 근데 좀 이해가 안 되네. 한국에서는 그래? 보통 조기 교육은 피아노로 하지 않나?”
“조기 교육? 뭔 소리야? 열일곱 살 때부터 쳤는데.”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조안나의 외침과 함께 단박에 깨져나갔지만.
“지금 몇 살인데?”
“열여덟. 아, 미국에서는 생일을 기준으로 하니까, 열일곱인가? 헷갈리네.”
잠시 날 신기하단 눈빛으로 쳐다보던 두 사람이 느닷없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근데…….”
“……?”
조안나가 눈짓으로 첼로를 비롯한 악기들을 가리켰다.
“저걸 다 칠 줄 아는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손을 내저었지만, 어째선지 둘 다 못 믿겠다는 눈빛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잘 다루지도 못하는 악기를 비싼 돈까지 줘가며 샀을 리가 없으니까.
“이제부터 연습해야지.”
“풉!”
왜 웃지?
의아해하는데, 크리스티나가 못 참겠다는 듯 피식 거리며 말했다.
“저게 얼마짜린데.”
음, 얼마짜리였더라.
통장에서 바로 쏴서 기억도 안 나네.
“스트라디바리우스야, 스트라디바리우스! 그걸 연습용으로 쓰는 사람이 어딨어? 얘는 농담도 참 .”
크리스티나의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기도 한데…….
그때, 그녀가 은근슬쩍 말해왔다.
“그러지 말고 첼로 좀 한번 켜봐.”
어? 첼로는 아직 좀 그런데?
아직 몇 번 안 켜봤는데.
“왜? 안돼? 나 들어보고 싶은데,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하는 거.”
“체, 첼로 소리가 다 똑같지, 뭘.”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조안나는 적절한 감탄사까지 내뱉는다.
“히야! 역시 노는 물이 다르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머, 얜. 그렇게 겸손해할 필요 없어.”
조안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진짜 소꿉친구 대하듯 말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여긴 그런 거 안 통해. 능력만큼 철저히 대우받는 곳이 바로 여기니까. 그러니까 기회가 되면 무조건 어필해야 하는 거야. 자신이 지닌 능력을!”
그런 얘긴 들어본 것도 같은데…….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은 고맙다고 말했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그래서 첼로 안 켜줄 거야?”
“응?”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에라, 나도 이젠 모르겠다.
***
몇 번 연습해 본 적은 있어서 그런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괜찮은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연주 중인 곡은 다름 아닌 ‘LONGING TIMES’.
어차피 클래식 곡들 중 아는 게 거의 없으니, 이왕이면 내가 만든 노래를 연주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으로 고른 곡이다.
내 노래 중에서 가장 멜로디가 부드러운데다가 미국에 와 있어서 그런가 요즘 들어 자꾸만 이 곡이 땡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피아노 수업 때도 그렇고.
참네, 한국 땅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나 싶어서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들고 있는 활은 제법 그럴싸하게 네 줄의 현을 오가며 꽤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들을 만하다.
그 증거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살짝 입을 벌린 채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한참 만에 연주가 끝난 뒤였다.
“킴! 너 진짜 천재구나! 피아노만 잘 치는 줄 알았더니…….”
“진짜 자존감 팍팍 떨어진다. 난 피아노 하나만 해도 벅찬데.”
두 사람의 칭찬 아닌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게 어디 가서 막 자랑하고 그럴만한 실력은 아니지 않나?
“근데, 이거 무슨 곡이야? 왠지 모르겠는데 왠지 마음이…….”
“응. 엄마 아빠도 생각나고. 괜히 가슴이 아파.”
“LONGING TIMES라고…….”
“팝이야? 싱어가 누군데?”
음, 말해주면 문제가 있으려나?
얘들 하는 걸로 봐선 한국 가수한테 관심이 있을 거 같지 않으니까.
그리고 친구인데, 어때.
상관없겠지, 뭐.
잠시 고민하다가 고백했다.
“내가 만들었는데?”
둘 다 멍하니 날 쳐다본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호호호. 농담도. 아까도 느꼈는데, 너 보기보다 재밌는 데가 있구나.”
“말해봐! 진짜 누구 노랜데? 응?”
여자들이고 남자들이고 둘 이상 모이면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차이점이라면 한쪽은 술이 좀 들어가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한쪽은 술 따윈 필요 없다는 점 정도랄까.
그때였다.
“여기가 휴게실이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해서 바라봤다.
아놔, 왔으면 기척이라도 좀 낼 것이지.
사람 놀래키기는.
“아, 에단!”
“오랜만이야!”
“까칠한 건 여전하네.”
“다들 볼일 끝났으면 나가주지? 수다라면 여기가 아니라도 떨 곳 많잖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는 에단.
그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여자들. 특히 조안나가 인상을 팍 쓰면서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걸 보곤 재빨리 둘을 돌려세웠다.
그러곤 양 떼를 몰 듯 그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물론 나 역시 방을 나섰다.
몇 번인가 희주를 만나는 동안, 쌓인 경험상 이런 경우엔 무조건 달달한 걸 입안에 넣어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자, 내 친구가 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혼자 있게 두자고. 대신 내가 슈퍼벅스가서 커피랑 케익 사줄 테니까.”
***
그 시각, 한국에선 뜻하지 않게도 격한 논쟁이 일고 있었다.
- 지금 그게 말이 되나? 지가 무슨 김도준급이라고!
- 하여간 좀 떴다 하면 아무 데나 갖다 붙인다니까!
- 윗분들 말들이 좀 심하네요. 우리 알렉스 박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데!
- 얼마나 대단한데요? 그래 봐야 이제 갓 데뷔한 신인 아니에요?
- 활동기간이 중요한가? 그렇게 따지면 김도준은요? 끽해야 일 년 됐나?
- 주니 오빠랑은 다르죠! 무려 열 곡이 넘는 곡을 냈는데. 게다가 전부 직접 작곡한 곡들이고.
- 알렉스 박도 싱어송라이터 아닌가?
- 급이 다르죠, 급이!
비단 네티즌들만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심한 경우는 절친끼리 머리끄댕이 잡고 싸운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 이유는…….
이번 달에 데뷔하자마자 음원 사이트 1위에 오른 알렉스 박. 재미교포 출신인 그가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김도준과 비교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한 대답 때문이었다.
[김도준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세계다. 전 세계인들이 듣고 열광하는 노래를 만드는 게 내 목표다.]
안 그래도 검정고시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너무 오래 쉬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데, 난데없이 튀어나온 신인가수 하나가 야심만만하게 던진 한마디가 도화선에 불을 붙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정말이지 삽시간에 번져버렸다.
더불어 한동안 식어 있던 김도준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
도준이 아름다운 금발 머리 여자와 외국으로 보이는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뿔테 안경을 쓰고 있지만, 누가 봐도 김도준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난리가 났다.
대체 저기가 어디냐부터, 도준과 함께 있는 여자는 누구냐까지.
그렇게 한국이 발칵 뒤집어졌을 때, 크리스티나 그리고 조안나와 함께 벌써 두 시간째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도준. 그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도준이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직감은 여자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두 명이나 되는 여자, 그것도 아리따운 외국 여자들과 함께일 때는.
꼭 집어 얘기하긴 어려웠지만, 뭔가 불길했기 때문이다.
그냥 받지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 받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알게 된다면 후환이 만만치 않을 거 같아서.
“어, 그래. 희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