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01화 (101/260)

# 101

#101. 잔인한 계절(3)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여기서 연주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친해진 이들도 있다.

연주를 끝내고 나면 기분 좋게 맥주를 시켜주려고 해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직 미성년자라는 걸 밝히기도 뭐해서 그냥 술이 안 받는 체질이라고 말은 했지만, 언제까지 이게 통할지도 모르겠다.

“여어! 킴! 오늘도 멋지게 한 곡 부탁해!”

픽하고 웃고는 첫 곡으로 에디 하긴스 트리오의 ‘Autumn Leaves’를 쳤다.

재즈다.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곡.

경쾌하지만 천박함은 느껴지지 않는, 빠른 템포에 어딘지 모르게 달달한 느낌의 재즈곡이 가게 안을 채우기 시작하자 다들 어깨를 흔들며 미소 짓고 있다.

직역하면 가을 잎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제목처럼 지금 계절에 딱 맞는 곡이기도 하다.

“와아아아아!”

연주를 마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차례 손을 흔들어주곤 이어서 ‘백만 송이 장미’를 쳤다.

우리나라에선 신수본 선생님이 부른 곡으로 그 때문에 트로트로 분류되고 있지만, 실제론 러시아 정확히는 라트비아의 민요. 원곡명은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피아노 소리가 아름답고 애잔한 선율이 되어 흐르고.

“Жил - был художник один(쥘 브일 후도쥬닉 아진)”

또 하나의 번안곡인 ‘Million Alyh Roz’가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Жил - был художник один,

(쥘 브일 후도쥬닉 아진,)

Домик имел и холсты.

(도믹 이몔 이 할스뜨이.)

Но он актрису любил,

(노 온 악뜨리쑤 류빌,)

Ту, что любила цветы.

(뚜 쉬또 류빌라 쯔비뜨이.)

가난한 어느 화가의

외로운 사랑이야기.

그가 사랑한 그녀는

별처럼 빛나는 여인.

원곡에는 나오지 않는 장미. 그런데도 원곡만큼이나 사랑받는 노래. 알레이 푸가체프가 부르는 ‘백만 송이 장미’를 러시아어로 부르고 있음에도 다들 몽롱한 눈빛이 되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궁금한지 눈을 빛내고 있다.

그래서 1절을 마치곤 간주를 연주한 후 2절부턴 영어로 불러주었다.

“In the morning you'll wake up at your window.(그녀의 창문 밖에서 새벽부터 기다린다네)”

- Million, million, million of red roses.

From your window, from your window.

From your window you can see.

Who's in love, who's in love.

Who's crazy in love with you.

My whole life for you.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장미를.

그대에게 그대에게.

그대에게 드리리.

사랑밖에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남자가 영혼을 바치네.

후회 없이 모든 것을 주었던.

“I will turn into flowers.(꽃 속에 남겨진 사랑.)”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보였다.

뉴욕 한복판에서 러시아에서 온 어느 가난한 화가의 외로운 사랑이 백만 송이의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

아르바이트……. 아니 파트타임을 끝내고 찰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늘도 수고했네.”

“뭘요. 저도 즐거웠어요.”

“공부하는 것도 힘들 텐데,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일당으로 받기로 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돈을 찔러주는 찰리였다.

얼마 되진 않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특히나 일부러 내 연주와 노랠 듣기 위해서 찾아와준 사람들이 준 팁은 소중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일과를 마치고 막 식당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저…….”

두 명의 여자가 날 막아서고 있었다.

응?

이 여자들은…….

익숙한 얼굴이다.

피아노 수업에서도 본 적이 있었고, 심지어는 내가 가수라는 걸 아는 건 아닌가 의심했던 적도 있는.

그리고 오늘도 가게 안에서 날 바라보며 시종일관 눈을 빛내던 여자들이었다.

한쪽은 아름다웠고, 또 한쪽은 세련미가 풀풀 풍기는데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까.

“무슨 일이신데요?”

내가 묻자, 모델 같은 여자가 얘기했다.

음, 아무래도 금발의 여자는 좀 숫기가 없는 모양이다. 뒤에 숨어서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저번에 봤죠, 우리.”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 전공?”

대답하기가 좀 난감한데?

딱히 전공 같은 거 없는데…….

굳이 얘기하면 보컬 아트나 작곡 쪽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은 그쪽도 듣고는 있어요. 뭐 니콜 교수님께서 지도교수님이기도 하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 그녀가 활달한 몸짓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이도 비슷한데, 편하게 말할게. 난 조안나. 이쪽은…….”

“……크리스티나.”

나 역시도 이름을 밝히곤 말했다.

“슬슬 가봐야 할 거 같은데, 혹시 기숙사 가는 거면 가면서 얘기해도 될까?”

“바라는 바야.”

조안나가 말하고, 크리스티나가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그 모습에 난 웃으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근데, 크리스티나는 낯을 많이 가리나 봐? 아니면 수줍음이 많은 건가?”

별스럽지 않게 말했지만, 조안나의 얼굴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살짝 째려보자 조안나는 슬그머니 표정을 바꾸며 시선을 돌려버린다.

그 후로 줄리아드 스쿨로 돌아오면서 그녀들과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사소한 얘기부터 출신 얘기까지.

일부러 그러는지 느리게 걷는 그녀들.

나 역시도 바쁠 건 없기에 속도를 맞춰주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더 걸려서 도착.

덕분에 그녀들과는 상당히 친해질 수 있었다.

에단에 이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순간이었다.

***

수업을 마치며 니콜 교수가 얘기했다.

“다음 시간에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 하겠어요.”

힘이 쭉 빠진다.

니콜 교수가 왜 마녀로 불리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Crescendo(점점 세게)! Crescendo(점점 세게)!

엄청나게 몰아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지휘봉이 악보대를 두들겼다.

정말 미묘한 실수인데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잡아낸다.

그러니 다들 지칠 수밖에.

특히 레슨 때의 그 박력이란…….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니, 더 빡센 느낌이었다.

어째 다른 사람보다 더 몰아치는 경향이 있달까.

한숨을 내쉬며 막 강의실을 나서고 있을 때였다.

“킴!”

돌아보니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다.

손을 흔들고 있는 조안나와 그 뒤로 한발 물러나 눈을 반짝이고 있는 크리스티나. 그녀들에게 웃어 보이곤 물었다.

“오늘은 연습 없어?”

“그럴 리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조안나가 조잘거린다.

“수업하고 연습하고, 수업하고 연습하고, 그러다 테스트. 또 수업하고 연습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공연이 코앞에 다가와 있지.”

과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 줄리아드 출신들이 각광받는 거겠지.

원래부터 재능이 충만한데다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니까.

당연히 실력이 늘 수밖에.

“그래도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거 아냐?”

“흐흐흐. 그러니까. 크리스티나가 밥 사준대.”

“비싼 거 먹어도 돼?”

“글쎄. 하는 거 봐서?”

“뭐래? 뭐든 먹고 싶은 거 먹어. 내가 사줄게.”

얘들 왜 이러지?

어젯밤부터 이런다.

꼭 날 무슨 가난한 예술가 대하듯 하는 눈빛이다.

뭐, 나야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이상하긴 이상하다.

더치페이 문화가 확실히 자리잡혀 있는 미국인데…….

따로 초대를 하지 않는 한, 여기서는 당연히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내는 거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들을 뒤따랐다.

***

“어떻던가요?”

니콜 교수의 물음에 스테판 교수는 무슨 얘기인가 의아해하더니 이내 질문의 요지를 알아듣고는 웃어 보였다.

“말씀하신 대로더군요. 확실히 번뜩이는 재능은 아닙니다만, 착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높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제까지 보아온 누구보다도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것만큼은 발군입니다.”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니콜 교수.

그녀가 마치 동생, 아니 아들 자랑이라도 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리라.

“감각도 뛰어나죠.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을 정도니까요. 게다가 그런데도 계속해서 발전하는 중이랄까. 아무튼, 진짜 몇 년 뒤가 기다려질 정도에요.”

“아무래도 푹 빠지신 모양이네요. 하긴, 놀라긴 했습니다. 만일 교수님께 듣지 않았더라면 킴이 바이올린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수업 때의 일을 떠올리는지 스테판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특히 연주 중에 여러 사람의 스타일을 모방하고 패턴을 익혀나가는 걸 보니 교수님이 왜 킴에게 기대를 거는지 알 것 같더군요.”

“쯧, 그런 녀석이 온전히 클래식에 매진하지 않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지.”

듣고만 있던 허먼 교수까지 끼어들자, 어느새 대화의 중심은 도준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도준에 대해서 얘기하던 교수들.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스테판 교수가 던진 얘기가 그들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다만, 걱정입니다. 킴 때문에 다른 이들이 혹여라도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는지.”

다들 말은 없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밥을 먹고 난 뒤, 그녀들이 하도 졸라서 하는 수 없이 기숙사로 향했다.

딱히 감출 이유도 없었고, 다행스러운 일이랄지 에단도 오후엔 수업이 있어서 방에 없을 테니까.

“너도 진짜 피곤하겠다.”

룸메이트가 에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안나가 얘기하자, 크리스티나가 맞장구를 친다.

“걔가 어릴 때부터 좀 그랬지.”

“친한가 보지?”

내가 묻자, 안 그래도 큰 눈이 한층 더 커지더니 완강히 부인하는 크리스티나.

“전혀!”

“그래?”

“그냥 좀 집안끼리 아는 사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온 두 여자.

그녀들은 마치 스캔하듯이 방을 한차례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몸이 굳는다.

그러더니 조안나가 얘기했다.

“쯧, 답네 다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쳐다봤더니, 조안나가 방 한쪽에 주욱 늘어서 있는 악기들을 가리켰다.

“어머, 이거 과르네리 아냐?”

크리스티나가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곤 감탄한다.

“돈이 썩어나나 보네. 누군 밤에 일까지 해가며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자식은 방안을 명품 악기들로 도배를 했네, 도배를 했어.”

조안나가 혀를 차며 플롯부터 시작해서 콘트라베이스, 비올라, 클라리넷. 첼로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이게 얼마야? 별장이라도 한 채 팔았나?”

“하여간 에단, 얘는 어릴 때부터 너무 생각이 짧다니까.”

“생각이 짧은 게 아니라 없는 거지.”

그러면서 날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는 두 사람.

음, 되게 머쓱하네.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그거다…….”

“……?”

“……?”

무슨 얘기하나 하고 날 바라보는 그녀들에게 이실직고했다.

“……내 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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