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100. 잔인한 계절(2)
에단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자식이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생각 같아선 눈이라도 비벼보고 싶지만, 자신은 긍지 높은 인간. 그런 가벼운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도준이 사라질 거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하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스테판 교수가 들어오면서 수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키가 커서 그런가 조금 여리여리한 느낌이 드는 스테판 교수. 짧게 쳐올린 갈색 머리칼이 은색 안경과 잘 어울려 무척 세련되게 느껴진다.
아닌게아니라 그가 매우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란 걸 에단은 잘 알고 있었다.
“첫 수업이지만, 조만간 있을 공연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겠군요.”
다들 불만스러운 표정들은 아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스테판 교수는 상냥한 편이라서 수업도 꽤 느슨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레슨이 그렇다는 거고, 연습까지 대충대충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랬다간 나중에 테스트 때 형편없는 점수를 받을 수도 있는 일.
어떻게 보면 니콜 교수처럼 학생들의 실력을 일일이 체크해 몰아붙이는 타입보다 더 까다로울 수도 있는 게 바로 스테판 교수의 방식이기도 하니까.
“조금 어렵겠지만, 여러분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는 곧바로 바이올린을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첫 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 강의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다.
에른스트의 에튀드 6 Die letzte Rose. 즉 여름의 마지막 장미.
원래 18세기 아일랜드의 국가적 시인인 토마스 무어가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에 감명을 받고 서정시를 지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이올린 멜로디에 가사를 부친 것이었는데, 이를 에른스트가 편곡해서 몇몇 사람들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고난도로 만들어버린 곡이었기 때문이다.
즉, 어지간한 실력으론 시도조차 하지 못할 곡이란 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스테판 교수의 연주에 취해서 몽롱한 눈빛을 해 보이고 있다.
에단은 슬쩍 시선을 돌려 도준을 바라보았다.
흠칫.
눈에서 불이라도 내뿜고 있는 줄 알았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저러다 눈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저런다고 켤 수 있는 곡이 아닐 텐데.
적어도 지금의 도준으로서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내젓고 마는 에단이었다.
다른 곡도 아니고 그 에른스트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다.
가능할 리가 없다.
잠시 후, 연주를 끝낸 스테판 교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모두에게 얘기했다.
“자, 그럼 다 함께 해보는 걸로 하죠.”
잠시 부산스러워진다 싶더니 강의실 안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일제히 활을 켜기 시작한다.
물론 그 안에는 도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지?’
에단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활을 멈추지 않는 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켜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힐끔힐끔 도준을 관찰한 결과.
에단은 깨달았다.
도준이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그렇게 느낀 건 아니다.
이 역시도 당연한 일.
지난번 방에서 있었던 일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그런 식으로 한두 번 본다고 해서 따라 켤 수 있는 수준의 곡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초반부까진 악보를 보며 간신히 음을 내느라 낑낑거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카, 카피하고 있다?’
자신의 스타일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학생들의 스타일을 하나하나 모방하면서 점차적으로 곡을 따라 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스테판 교수의 연주 스타일이 기둥처럼 버티고 있었고, 세세한 부분에서만 여러 사람들의 스타일을 녹여내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곡을 연주하는 도준이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가 무슨 스폰지야?
보는 족족 빨아들이게?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에단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가 이내 허탈함이 내려앉았다.
***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스테판 교수가 날 부른다.
“자네가 킴?”
“예.”
“니콜 교수에 얘기를 들었던 대로군요. 당신은 소질이 있어요. 열심히 해봐요.”
그걸로 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처음에 곡을 따라갈 때, 조금 아니 많이 헤맨 경향이 있어서 주위 학생들에게 눈총을 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날 대하는 스테판 교수는 흥미롭다는 눈빛만 보일 뿐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올린 첫 수업을 마치고 난 뒤 강의실을 나오며 에단을 찾았지만, 어느새 사라졌는지 녀석은 보이질 않았다.
대신 날 막아서는 무리가 있었다.
“여어, 우리 오늘 처음 보는 같지?”
떡대라고 부르기에 딱 좋은 몸집의 백인 남자가 날 가로막았다.
“난 도미니크.”
“아! 김도준이라고 해.”
“일본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인이었군. 그래서 좋았어?”
“……?”
무슨 뜻인지 몰라서 도미니크를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슬쩍 밀며 얘기했다.
“남의 걸 그렇게 함부로 훔쳐가면 쓰나?”
아, 그런 뜻이었구나.
아까 중반부부터 이 녀석의 연주 스타일을 참조했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모양이다.
흠, 생긴 거랑 다르게 눈치가 빠른 듯하네.
“불쾌했다면 미안. 그럴 생각은 아니었…….”
툭툭!
다시금 내 어깨를 밀려 그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경고는 한 번뿐이야. 그 어설픈 실력이나마 계속해서 바이올린을 켜고 싶으면 조심해. 안 그러면, 이 잘난 어깨를 작살내 버릴 테니까.”
와악하고 웃고 있는 패거리들을 몰고서 사라지는 도미니크. 녀석을 보면서 웃고 말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하아, 진짜 어딜 가든 저런 새끼들은 꼭 있구나.
쯧, 입장에 따라선 기분 나쁠 만도 하니까.
훔친 거라고까진 말하기 어려워도, 아무튼 그로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저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렸을 뿐이다.
***
기숙사로 향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에단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게거품을 물며 덤벼들 듯하더니,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일어나 나가버린 그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표정으로 봐선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방에 들어가 보니 역시 마찬가지.
침대에 누워 있는 에단. 그는 내가 들어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대신 몇 번인가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 역시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언젠가는 하겠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도 에단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클라리넷 수업을 받기 위해 잠깐 나갔다 왔고.
“너……. 대체 뭐냐?”
에단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게 물은 것은 막 방에 들어왔을 때였다.
어쩐지 너덜널덜한 느낌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설마 내 이름을 몰라서 묻은 건 아닐 테고, 뭐가 궁금한 건데?”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그를 바라보자, 에단은 이 층 침대의 위쪽에 걸터앉아 멍하니 날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피아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냐?”
별걸 다 가지고 시비다 싶었다.
“니콜 교수님한텐 미리 허락을 받았는데, 문제가 있나?”
“하아, 또 그 마녀…….”
중얼거리던 에단이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불쌍하군.”
“……?”
“네놈 주위에 있는 놈들이. 아니, 이젠 나까지 포함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녀석이 씁쓸한 표정이 되어 내뱉는다.
“경쟁상대로도 봐주지 않는다는 건가?”
“…….”
“아마 넌 모를 테지? 널 바라보는 그들이, 아니 내가 어떤 심정일지.”
대충 알만하다.
아마도 그런 얘기겠지.
천재 운운하는.
일테면 오해인데.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에단의 말대로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쪽이랑은 좀 거리가 멀어서 말이지.
이쪽은 이쪽대로 사정이 있는 거니까.
나는 그를 불렀다.
“에단.”
말없이 날 노려보는 그를 향해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네가 아닌데 그 심정이란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 그래도 꼭 내가 그러길 바란다면 한가지는 말할 수 있겠네.”
여전히 노려보곤 있었지만, 그래도 귀만은 열어놓은 듯 보였다.
그래서 확실하게 얘기해주었다.
“남이랑 비교하는 거 되게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냐?”
인상이 확 구겨지는 그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조롱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로서도 꽤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였다.
“이왕 비교하려면 오늘 내 모습이랑 내일의 날 비교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현학적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누군가는 꿈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고 할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무한경쟁의 시대에 좀 잘났다고 떠드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
근데 어쩌겠냐?
이게 진실인데.
노래방안에서 뼛속까지 깨달은 진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분명 다를 거라는, 근거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나 자신만을 믿으면서 한발 한발 나가갈 수밖에 없던 시간들.
지금이야 ‘빵은 이제 물렸어!’ 따위 말과 함께 웃으면서 그때를 회상할 수도 있겠지만, 우습게도 뇌리에 틀어박힌 기억들은 확실하게 말해준다.
진짜 잔인한 건 자신을 비교할 상대조차 없을 때란 걸 말이다.
그래서 힘든 거다.
자기를 깎아 나간다는 게.
좆나게 오랜 시간 동안 해온 거라서 장담할 수 있다.
“뭘 그렇게 멀리서 찾아? 평생 싸워도 모자랄 놈이 내 안에 있는데? 안 그래?”
에단에게 내 말이 고깝게 들렸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어쩌면 지금쯤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머리에 박혀 들었다면 다행일 테지만.
아무튼, 말은 안 했지만, 마음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재능?
있으면 좋지.
근데, 그거 별거 아니더라.
아마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자기가 바이올린 켜는 걸 내가 한번 보고 곧바로 따라 해서 그런가 본데.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아나 모르겠다.
음악이랑 관련되면 나도 모르게 초집중하게 되는 상태.
한 천 년쯤 노래 부르고 나니까, 마이크만 들이대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더라는 거지.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멍한 눈빛으로 말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에단을 그대로 둔 채 방을 빠져나왔다.
***
당연한 얘기지만, 에단을 배려한 행동은 아니었다.
밥도 먹어야 하고 파트타임으로 하기 시작한 피아노 연주도 해야 해서다.
줄리아드 스쿨 빌딩을 빠져나와 뉴욕의 밤거리를 걸었다.
9월이라 그런가 찬 기운이 감돈다.
에단의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잘은 모르지만, 쉽게 무너지진 않겠지.
줄리아드까지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어차피 자기 인생은 자기가 버팀목이 돼서 지탱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딸랑.
찰리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들려오는 종소리가 날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준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러곤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거봐! 올 거라고 했잖아?’
‘진짜 여기서 일한다고? 아니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뭔가 사정이 있나 보지?’
‘설마 돈이 없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솔직히 어지간해선 학비 대는 것만으로도 벅차잖아?’
‘그런……. 저 실력에 그런 환경이라니. 어쩌면 좋아.’
안타까운 표정이 역력한 크리스티나를 보면서 조안나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선 ‘너야말로 어쩌면 좋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턱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확실히 크리스티나의 마음도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뭐라고 꼭 짚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도준의 연주는 사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마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테고, 재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어느 쪽이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도준은 비범하다.
천재란 얘기.
그렇기에 그의 미래가 빛나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도준에게는 대개 돈 없는 천재들이 그렇듯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안타깝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면이 오히려 누군가에겐 소녀적 감성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 산 증인이 눈앞에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어딘지 모르게 몽롱한 눈빛이 되어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도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걸 봐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준은 그녀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마 이런 상황이 매일 반복된다면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도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조안나 역시 마찬가지.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눈동자에도 안쓰러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이, 진짜 나 왜 이러지? 미쳤나 봐? 그치만……. 저 동양에서 온 가난한 예술가를 도와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