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 잔인한 계절(1)
다들 멍한 표정이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들의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선곡이었을 테니까.
나 역시 자기들처럼 클래식을 칠 거라고 생각들을 했으니, 저런 얼굴들이 될 수밖에.
이점은 니콜 교수도 마찬가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니콜 교수가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악보대를 가볍게 두들겼다.
탁! 탁! 탁!
그 소리에 자연스럽게 연주를 멈췄다.
그러곤 니콜 교수에게 시선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킴. 이건 무슨 곡이죠?”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한국 노래인데요?”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던 니콜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코리안 팝이란 거네?”
“비슷해요.”
팝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대중가요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그 범주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흠, 뭔가 오해를 한 거 같은데……. 킴, 내가 치라고 한 건 팝이 아니라…….”
설마하니 못 알아들었을까 봐?
하지만,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저어, 교수님?”
한국에서 지금처럼 말하는 도중에 허리를 자르고 들어가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듣기 딱 좋을 테지.
물론 그런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나도 아니지만.
게다가 여긴 미국.
어떤 행동이든 합리적이기만 하면 이해해주는 문
익숙해지고 말고 할 것 없이, 안 그래도 나 잘난 맛에 살아온 나한테는 그야말로 최적화되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을 꿍하니 속에 담고 있을 필요는 없다.
봐라, 교수님도 불쾌하단 표정 대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눈빛으로 날 보고 계시지 않는가.
“아까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라고? 뿐만 아니라 오늘 수업의 목적은 곡에 얼마만큼 감정을 녹여낼 수 있는가…였던 걸로 아는데요? 아닌가요?”
“그랬지.”
순순히 인정한 니콜 교수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게 보인다.
반면 다른 이들의 반응은?
놀랍다는 반응과 함께 뭔가 두렵다는 반응들이다.
어떤 이들은 낯빛이 파래져서 몸을 떨기까지 하고 있다.
마치 폭탄이 터질 것을 예상하며 공포에 떠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크레셴도의 마녀’라는 별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니콜 교수의 눈에는 두 가지 감정이 존재했으니까.
흥미롭다는 감정과 그 흥미로움을 배반하는 순간 다 갈아엎겠다는 감정이 혼재하고 있달까.
당연히 난 니콜 교수의 그 감정을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혹시 교수님께선 이런 곡을 원하시는 건가요?”
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곡을 치기 시작했다.
쇼팽 에튀드 Op. 10-4.
세상에서 가장 빠른 피아노 곡들 중 하나.
열 개의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건반을 누비고 있었다.
마치 음과 음들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듯한 빠른 템포에 반해버려서 요사이 익힌 몇 안 되는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여기에 감정을 싣는다는 건 지금의 나로선 무리.
살짝 거칠긴 하지만, 엄청난 빠르기로 능숙하게 달려가던 피아노 음이 한순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자, 니콜 교수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커진 채 날 바라보고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말했다.
“어떤 곡을 얼마나 잘 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니콜 교수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계속해봐.”
“기교보단 감정. 곡에 그 감정을 담으면서도 얼마나 절제하면서 듣는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그걸 보고 싶으셨던 거라고 이해했는데요.”
이제 니콜 교수의 입매는 완전히 활처럼 휘어 있었다.
그 모습에 강의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하얗게 질려서 어찌할 줄 모른다.
아마도 당장 니콜 교수의 분노가 날 덮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어진 니콜 교수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래서 고른 게 아까 그 곡이다?”
“예.”
날 가만히 바라보는 니콜 교수.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한순간 사라졌다.
대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만일 잘난 듯 떠들어댄 만큼 자신을 만족 시키지 못한다면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좋아. 쳐봐.”
마침내 승낙이 떨어졌다.
속으로 웃으며 건반에 손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아, 이왕이면 노래도 한번 불러보지그래? 지금 킴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히 느끼고 싶으니까.”
흠, 이건 좀 예상외인데…….
그렇다고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러죠.”
씨익 웃고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한국 특유의 정서가 가득 들어 있는 노래.
‘님은 머나먼 곳에’의 멜로디가 피아노 소리가 되어 울리기 시작하고, 이내 내 입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아!”
누군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가 입을 틀어막는 게 보였다.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듣기 좋은 내 노랫소리가 뜻밖이던 거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눈이 커져서 날 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Should've told you so.”
- Should've told you so.
I was in love with you.
사랑한다고,
전할 걸 그랬지.
지금의 내 심정이 건반이 내는 음에 고스란히 실려 퍼져 나간다.
사랑 노래?
아니다.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
희주까지.
날 사랑해주는 이들이 이처럼 소중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가까이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한 번이라도 더 말할 것을…….
- My heart I gave,
My tears I gave,
My dreams I gave,
Gone away with you.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우습게도 한국땅을 떠나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가 들고 있는 요즘이었다.
그래서였다.
니콜 교수가 감정 운운하며 치고 싶은 곡을 쳐보라고 했을 때, 이 곡이 떠오른 것은.
- Forever far away.
While my courage swayed.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원곡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내키는 대로 편곡한 곡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숨을 토해내듯 건반을 두들겼다.
그렇게 피아노 소리가 사리진 공간에 내 목소리만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You just went away.”
정적이 흘렀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노래를 부르고도 박수 한번 받지 못한 것은.
그럼에도, 느껴졌다.
모두는 이미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다들 아련한 눈빛이 되어 있었으니까.
저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들, 밥 먹어!”
“호호호. 누구 아들인지 어쩜 이렇게 멋질까?”
“엄마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 아들······. 우리 아들. 우리 예쁜 아가······.”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얼굴.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손길.
우시면서 날 안아주시던 엄마가 떠올랐다.
아마 다들 같을 것이다.
대상은 다 다를지 몰라도.
그렇게 강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을 때, 니콜 교수의 음성이 들려오며 다들 깨어났다.
“그렇군.”
“…….”
“이게 지금 킴의 마음인가?”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니콜 교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쳐 갔다.
“잘 들었다. 킴의 마음.”
탁! 탁! 탁!
그녀가 들고 있던 지휘봉이 악보대를 때리며 돌아섰다.
“킴은 들어가도 좋아요. 자, 다음은 카렌…….”
수업은 계속되었다.
***
“정말 괜찮겠어?”
회전의자에 앉아 도도하게 허리를 편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니콜 교수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마흔이 채 안 된 나이.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길고 풍성한 금발과 푸른 눈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풍기는 성숙한 매력은 그저 젊음만을 앞세운 이십 대 여자들에게선 절대로 느낄 수 없을 터다.
뭐, 나로서는 어머니 같은 느낌이 강했지만.
그 까닭은 아마도 지금처럼 날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니콜 교수에게 있을 것이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에요.”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해야죠. 여기 놀러 온 건 아니잖아요.”
기특하단 눈으로 날 바라보던 니콜 교수는 알겠다는 듯 얘기했다.
“스테판 교수를 비롯해 미리 말해놨으니 문제는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어차피 내 힘만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기도 하고. 허먼 교수님께서 힘을 실어주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음, 그런데…….”
“……?”
“굳이 일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경험 삼아 해보는 거죠, 뭐.”
“그렇다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에 부치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찰리스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건 그저 부가적인 일일 뿐. 만약에 조금이라도 본업이랄 수 있는 학업에 지장을 준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 하는지는 뻔한 일이다.
“알고 있어요. 제가 집중해야 하는 게 뭔지는.”
날 믿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니콜 교수.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그 큰 눈을 치켜뜨더니 갑자기 책상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사인할 뻔했다.
아, 진짜 어쩌냐? 이놈의 자의식과잉!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물론 눈으로.
‘이게 뭔가요?’
니콜 교수가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듣기 좋더라고.”
“예?”
“아까 수업에서 부른 곡 말이야.”
“……‘You just went away’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턱짓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괜찮으면 적어주면 좋겠네. 이왕이면 가사도.”
느닷없는 요구에 나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씩 웃어 보였다.
“얼마든지요.”
***
에단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도 저 하나만 잘났다는 듯이 오만하게 굴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인해 친구라곤 없던 그였다.
한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첫 수업에 들어와 보니 이건 말 그대로 삭풍이 불고 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은 잔뜩 굳어 있고 꽉 다문 입술과 함께 눈에선 연방 레이저가 쏘아지는 중. 당연히 그의 옆으론 누구도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젠장! 그 자식!’
도준의 연주를 듣곤 허탈했던 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그 후엔 분노가 차올랐다.
피아노를 치는 놈이면 피아노나 잘 칠 것이지, 왜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디미는 건지.
한번 듣고 따라 켤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튀어나온 말.
“쯧, 이래서 돈 많은 것들이란…….”
동시에 그의 시선이 강의실 한편에 앉아 있는 도미니크에게 향했다.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명문가인 펠리스 가문의 막내아들. 그 다르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돈. 월가를 주름잡는 금융재벌이 바로 펠리스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 출신답게 녀석은 돈으로 처바른 레슨 덕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체구도 좋아서 고등학교 땐 미식축구를 했다고 했던가.
한마디로 돈도 많고, 몸도 좋은 전형적인 인기남.
뭐,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선망 어린 눈빛도 이해는 간다만.
문제는 놈을 에워싸고 낄낄거리고 있는 패거리들.
어떻게 줄리아드처럼 재능으로 충만한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신성한 음악의 성지에서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후우…….”
안다.
도준이 저런 놈하곤 다르다는 것은.
뿐만 아니라 괜히 도미니크 같은 양아치와 도준을 똑같이 취급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쯤도 알고 있다.
자신의 눈알이 유리알이 아니라면…….
도준이 지니고 있는 재능은 진짜였으니까.
그 증거로 요새 간혹 들려오는 놈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그렇긴 하지만,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겨우 그깟 놈에게 자신이 밀리는 듯한 이 기분을.
빠드득!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갈고 마는 에단이었다.
그때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떤 미친놈인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말을 거는 놈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상관하지 마.”
여느 때와 같이 보지도 않고, 냉기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쏘아주었을 때였다.
“어떻게 그래? 룸메이트인데.”
순간 에단의 눈이 부릅떠졌다.
홱 하고 바람이라도 일 듯 돌아간 그의 고개.
에단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너, 너……. 네가 왜 여길……?”
“응?”
도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오늘부터 바이올린 수업 듣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