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98화 (98/260)

# 98

#98. 누구라고?(4)

말은 안 하는데 눈빛만으로도 알겠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이놈은 뭐야?’ 하는 얼굴이다.

그래도 급하긴 급한가 보네.

“피아니스트?”

고개를 끄덕이자,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날 위아래로 훑어내린다. 그러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킨다.

거참, 그렇게 내가 피아노를 못 치게 생겼나?

글쎄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인종차별을 하는 느낌도 아니다.

단지 어려 보여서일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눈에 백인들이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이는 것처럼 그들 눈에는 우리가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고 하던데.

아무튼, 치라니 쳐야지.

피아노 앞으로 가서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래도 그랜드 피아노라서 소리는 좋겠다 싶었다.

손목을 한두 번 꺾어서 풀고는 페달에 발을 올렸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뭘 칠까 생각하다가 역시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건반을 눌렀다.

***

찰리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썩 꺼지라고 외치고 있어야 하는데······.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분위기가 워낙 자유로운지라 손님들도 자유분방한 편. 그래서 그런지 다들 지금 저 동양인 청년이 보여주는 엄청난 기량에 찬사를 보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 역시 마찬가지.

이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나 마찬가지.

그동안 실력은 꽤 있지만 허구한 날 취해서 나타나거나 툭하면 늦곤 하던 지미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놈을 내쫓자마자 이런 복덩이가 굴러들어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렇다곤 해도······.

‘라흐마니노프라니.’

왠지 느낌이 그랬다.

‘줄리아드 학생인가?’

흠,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데······.

거긴 빡세기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게가 그곳과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학생들도 종종 찾곤 해서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연습이 아침 9시에 시작해서 밤 9시에 끝난다고 할까.

그중에 레슨 시간이 얼마나 차지하는지는 몰라도 줄리아드 스쿨 학생치고 여유로운 얼굴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들 푹 삶아진 양배추처럼 늘어진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기 바쁘지.

그에 비해 지금 눈앞에서 엄청난 실력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대고 있는 청년은 어째 쌩쌩해 보인다.

게다가 젊은, 아니 어려 보이기까지 하고.

아무래도 예비학교에 다니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제 갓 스쿨에 들어간 게 아닐까 예상하고 있을 때였다.

연주가 끝났다.

“워오- 워어!”

“원더풀!”

갈채가 쏟아지며 가게 안에 환호성이 가득하다.

찰리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청년에게 다가가 재빨리 얘기했다.

“혹시 재즈 가능한가?”

“재즈라면 어떤?”

“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이었다.

***

오히려 클래식보단 이쪽이 편하긴 하다.

아무래도 아는 곡들도 많고, 익숙하기도 하니까.

부드럽게 흐르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가게 안에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이크는 없지만 상관없었다.

“My funny Valentine.”

- My funny Valentine.

Sweet comic Valentine.

You make me smile with my heart.

재미있는 나만의 발렌타인.

달콤하고 코믹한 발렌타인.

당신은 내 마음까지도 웃게 만들어주네요.

내 입에서 느릿하면서도 나직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피아노 연주에 맞춰 쳇 베이커의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존재하는 재즈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명한 노래. ‘My funny Valentine’이었다.

제목만 보면 신 나고 경쾌할 것 같지만, 직접 불러보면 아니 들어보면 어지간히도 느리고 우울하다. 게다가 가사 내용도 슬프다. 그런데도 아름답다.

노래 속의 화자는 외모도 볼품없고, 말솜씨도 좋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애원한다.

- Don't change a hair for me.

Not if you care for me.

Stay little Valentine.

나를 위해서 머리를 바꾸지 말아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발렌타인데이로 있어줘요.

정말이지 어지간히도 사랑하나 보다.

그런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는 노래.

재즈라는 장르를 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명곡임은 분명하다.

“Stay!(조금더!)”

간절함이 녹아나는 목소리가 피아노 소리와 어우러져 가게 안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Each day is valentine’s day(매일매일이 발렌타인데이랍니다).”

가벼운 피아노 음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흩어지자, 가게 안에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환호가 터졌다.

물론 박수소리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사람들과 함께 호흡해서 그런가 가슴이 살짝 벅찬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만끽하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다시금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크리스티나는 개강을 겨우 하루 남겨놓고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다.

미쳤다고 일찍 온단 말인가.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 또다시 ‘크레셴도의 마녀’에게 달달 들볶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식사하기엔 좀 늦었고, 술이나 한잔할까?”

조안나가 흑진주처럼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대답했다.

“가볍게 맥주 한잔 정도라면.”

여전히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에 크리스티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터질 것처럼 탱탱하고 건강해 보이는 짙은 갈색 피부가 매력적인 그녀. 조안나와 함께 밤거리를 걸어 늘 가던 가게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자 들려오는 종소리가 언제나처럼 그녀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찰리, 오랜만이에요.”

“오오! 크리스티나! 잘 지냈나?”

“안보이세요?”

그녀는 발랄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뚝을 보여주었다.

까맣게 탄 피부가 지난여름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하와이라도 갔다 온 거야?”

“비슷해요.”

정확히는 가족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지만, 굳이 그걸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크리스티나였다.

“응? 근데 지미가 아니네요?”

“며칠 됐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찰리였지만, 피아노 쪽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쩐지 굉장히 반짝이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보물이라도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게 안에 있는 이들 모두 비슷한 느낌이다.

평소와 다르게 소곤거리며 피아노를 바라보고 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크게 소리치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게 정상인데······.

게다가 어쩐지 손님이 좀 는 것도 같고.

“조안나, 저 사람 누군지 알아?”

크리스티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동양인 청년을 가리키자, 조안나가 고개를 내젓는다.

“나도 처음 보는데?”

“그래? 진짜 며칠 안 됐나 보네?”

“뭐 그런가 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단 한음이었다.

맑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크리스티나의 눈이 커졌다.

***

“잠 못 잤나 보네?”

“그러게. 이상하게 잠이 안 오더라고.”

크리스티나의 얘기에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이해한다는 표정.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

“근데 진짜 걔 뭐냐?”

“모르지.”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가 이내 다시 말했다.

“진짜 잘 치긴 잘 치더라.”

“재즈를 어떻게 그렇게 치냐? 나 참, 혹시라도 알게 되더라도 줄리아드 다닌다는 얘긴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

“누가 아니래? 근데 혹시 걔 우리 학교 다니는 거 아닐까?”

“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 싶은데?”

맞는 말이다.

이번에 가을 학기에 들어올 신입생들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공이 피아노가 아닐 수도 있잖아.”

“말도 안 돼. 피아노전공이 아닌데 그런 연주가 가능하다고? 어쩌면 다른 학교 학생인지도 모르지.”

“아니면 싱어 지망생이거나. 혹시 이미 데뷔한 거 아냐?”

“에이, 그러기엔 너무 어리지 않아? 딱 봐도 스무 살도 안돼 보이던데.”

“그건 모르지. 원래 동양인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이잖아.”

“하긴. 그럴 수도 있긴 하겠······.”

문을 열고 강의실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것을 봤나 싶기도 하고.

“뭐해? 안 들어가고?”

조안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문 안쪽으로 머리를 디밀었다가 입을 벌렸다.

황당하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

불편하다.

그것도 몹시.

불안하기도 하고.

진짜 못 알아보는 거 맞겠지?

아, 씨. 자신감 팍팍 떨어지네.

한국에선 통했는데······.

여기 와서도 어지간하면 못 알아보긴 하던데······.

그건 어디까지나 거리처럼 탁 트인 공간인 거고, 여기처럼 막힌 공간에선 시선이 집중될 수도······.

참네. 나도 진짜 큰일이다.

도끼병도 아니고.

자의식 과잉, 이거 어쩔 거냐?

그리고 까짓 들키면 또 어때서?

내가 김도준이라는데 지들이 뭐 보태준 거 있어?

그래도 다행인 건 동양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세계 곳곳에서 유학 오는 경우가 많다던데, 이번 학기에는 나 말곤 동양인이 없는 모양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나로서는 행운.

대부분의 학생들도 그다지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둘 중 하나다.

애당초 날 모르거나, 아니면 진짜 관심이 없거나.

어느 쪽이든 이쪽으로선 환영할만한 일이다.

어지간하면 이대로 쭉 모른 채 지냈으면 좋으련만.

그래야 불편하지 않고 자유로운 캠퍼스 라이프를 영위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님 마는 거고.”

뭐, 죄지은 것도 아닌데 겁먹을 거까진 없으니까.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응?

쟤들은 뭐야?

꽤 예쁘장하게 생긴 백인 여성 한 명과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세련되게 생긴 흑인 여성 한 명이 날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게 보인다.

설마 날 알아보는 건가?

이미 북미권에서 발표한 내 노래들도 빌보드차트에서 싹 다 내려갔다고 하던데, 내 팬은 아니겠지.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들로부터 시선을 피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니콜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간단히 학생들과 인사를 하곤 말했다.

“새로 들어온 몇 명만 빼곤 지난 학기에 함께 공부했으니까, 따로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겠죠?”

음, 그러니까 오히려 인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조금 의아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린다.

“아우, 저 마녀! 개강하자마자, 강행군이네!”

“쉿!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저번 학기 때 필립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기억 안 나?”

도대체 마녀는 뭐고, 필립은 또 누구래?

대체 지난 학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는 거지?

궁금해져서 니콜 교수 쪽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그녀가 다시 얘기했다.

“오늘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죠. 조건은 10분 이내. 목적은 음······. 간단해요. 자신의 감정을 얼마만큼 연주에 녹여낼 수 있는가. 다들 알겠죠?”

학생들의 대답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한 명씩 앞으로 나가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수준들이 높다.

대부분 미뉴에트나 소나타를 치는데 적당히 10분 내에 끝나는 곡을 고르거나, 혹은 그전에 마무리하고 있었다.

40분쯤 지나서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난 조용히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러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곧이어 흘러나온 소리는······.

클래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팝도 아니다.

이들은 한 명도 들어본 적이 없을 노래.

단조로운 멜로디지만,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편곡을 마치고 화려하면서 한층 더 애처롭게 변한 노래.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신준현 선생님이 작사작곡하고 김초희 선생님 부른 노래.

‘님은 머나먼 곳에’의 선율이 강의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