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 누구라고?(3)
방안에 들여놓은 악기들을 한쪽에 정리하고 있는 도준을 멍하니 쳐다보던 에단.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가 물었다.
“누구라고?”
에단의 질문을 도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에단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니콜 교수님 얘기하지 않았나?”
“응. 근데 그게 왜?”
“너 그 마ㄴ······. 교수님이랑 무슨 관계냐?”
“지도 교수님이신데?”
여기까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냐인데······.
역시나다.
“나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허먼 교수님이랑 니콜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덕분이야.”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에단.
니콜 교수뿐만이 아니라 허먼 교수까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크레셴도의 마녀’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엄격하기로 유명한 니콜 교수 아닌가.
허먼 교수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깐깐한 성격이었고.
저놈이 뭐기에 두 분이 추천까지 해주셨다는 건지.
그런데 니콜 교수한테 악기점을 물어볼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아니면 아직 그녀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런 걸까?
‘저 자식 뭐지?’
그때 에단의 시야에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악기들이 들어왔다.
순간 깨달았다.
마치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듯이.
‘혹시?’
줄리아드 스쿨은 원천적으로 기부입학이 허용되지 않는 학교.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다.
어중간한 권력과 부라면 통하지 않겠지만, 일정수준을 넘어가면 일종의 프리패스 역할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제까지 무시하고 있던 도준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에단이었다.
***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나갔다 온 에단은 방이 가까워지자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왜?
짜증이 나니까.
그럼 왜 짜증이 나는가?
간단하다.
지금 자신의 방을 점거하고 있는 불청객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놈이 만드는 소음 때문이다.
방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후우!”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끼이잉······낑···낑···끼기기기깅!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여니 도준이 핸드폰에 유투븐에 올라온 영상 하나를 틀어놓곤 열심히 바이올린을 따라 켜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잉······끼기깅···낑.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정말이지 끔찍한 연주다.
아니 저건 연주라고 할 수도 없다.
정말이지 어지간해야 들어주지.
돼지의 목에 진주 목걸이란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실감했다.
킴도쭌이라고 했던가?
에단은 방 한쪽에 잘 정리되어 있는 악기들을 보곤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얼마야?’
전부 다 합치면 저택 하나 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물론 에단이 짜증이 나는 건 단지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자신이 들어오는 걸 보곤 멋쩍게 웃고는 동영상을 잠깐 멈추는 도준. 그가 바이올린을 치우곤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꽂고 다시금 동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에단은 그 모습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저러고 있다가 자신이 나가면 또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할 테지.
장담할 수 있다.
아침부터 내내 반복된 일이니까.
샤워하러 나갔다 올 때도, 심지어는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그랬다.
아직 개강을 안 해서 비어 있는 방이 많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말이 나와도 몇 번은 나왔을 거다.
시끄러워서?
아니, 저 자식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가 쓰레기기 때문이다.
관심을 끄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게 더 신경 쓰인다.
그러다 보니 속은 점점 썩어들어간다.
어떻게 저런 명품 악기로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인데, 하는 짓은 더 밉상이다.
정말이지 생각 같아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놈의 입에서 그 마녀의 이름이 나온 이상은.
제 놈이 제풀에 지쳐서, 여길 나가겠다고 하지 않는 한 방법은 없다.
‘미치겠군.’
곧 가을 학기가 시작되긴 했지만, 며칠은 더 있어야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 말은 곧 며칠 동안은 꼼짝없이 저 자식이랑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 바꿔 말하면 저 엄청난 소음 공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자기도 창피하기는 한지 에단이 없을 때만 켜고 있었지만, 이쪽으로선 그게 더 거슬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에단의 시선이 다시금 방안 한쪽에 정리되어 있는 악기들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수준하고는······.’
한국?
중국 옆에 붙어 있는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온 녀석에게 한번 쯤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그러면 되는 거다.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낼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다.
음악의 길이란 결코 배경의 힘만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오로지 자신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자신은 유서깊은 크로이츠 가문의 귀족적인 혈통을 이어받은 긍지 높은 남자니까.
에단은 자신의 결정에 흡족해하며 웃었다.
잠시 후면 놈과 자신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고 가만히 선 채로 자세를 취했다.
‘저 자식이 켜던 게 바이올린 소나타였던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봄.
도준이 이 순간에도 보고 있는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곡은 흔히들 Fruhlingssonate 즉 Spring Sonata라고 부르는 곡이 분명하다.
‘자, 봐라! 이것이 너와 나의···. 큼.’
에단은 보란 듯이 연주했다.
금방 방안에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미 에단이 자세를 취할 때부터 이어폰을 빼곤 일어나 있던 도준.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한 에단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흠칫.
마치 눈으로 듣는 듯해서 에단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계속해서 연주했다.
그러길 한참.
‘미친! 뭔 놈의 눈빛이!’
모든 연주를 끝낸 건 아니지만, 저놈의 눈빛이 슬슬 무서워져서 에단은 자신도 모르게 활을 멈췄다.
“큼.”
자신이 눈빛에 밀렸다는 생각에 에단은 괜히 헛기침을 하곤 툭 내뱉었다.
“알겠냐? 바이올린은 이렇게 켜는 거다.”
자신의 바이올린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고선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서는 에단.
그러자 도준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바이올린을 집어든다.
그러곤 자세를 잡는데······.
‘엉성하긴.’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력은 가상하다마는, 바이올린이란 악기가 한번 봤다고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게 아니거든.
그때, 도준이 연주를 시작했다.
피식.
에단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조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
원래 바이올린은 환경에 매우 민감한 악기.
습도만으로도 음이 달라질 정도다.
따라서 연주 전에는 무조건 조율해야 한다.
그나마 활 털에 송진은 발랐는지 소리는 제대로 나오고 있다는 게 다행이랄까.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초보 중에서도 초보.
그런데도 신기한 건 그럭저럭 자세를 잡더니 방금까지 자신이 연주한 걸 따라 하고 있다는······.
‘응?’
에단은 순간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도준이 연주를 시작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음은커녕 박자조차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단지 소리만 부자연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갈수록 소리는 자신의 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도준의 활이 매끄럽게 네 줄의 현을 오가고 점점 연주가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자세도 아까완 달리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다.
게다가 활을 움직이는 게······.
“······!”
놀라웠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절로 인상이 써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악기나 마찬가지겠지만, 바이올리니스트도 저마다 특유의 습관이 있고 이는 당연히 소리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한데, 지금 도준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자신을 보는 듯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도준이 자신의 연주를 고스란히 훔쳐간 것이랄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단 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것을 모조리 카피한 도준.
눈앞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것만 해도 기가 찬데······.
‘이, 이럴 수가!’
갈수록 연주가 안정되는가 싶더니 이젠 자신과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안 날 정도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
이걸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도 믿기나 할까.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니까.
하도 황당하다 보니, 헛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 만에 도준이 연주를 끝냈다.
그때 참았던 숨을 몰아쉰 것은 도준이 아닌 에단이었다.
그리고 몰아치듯 물었다.
마치 추궁하듯이.
아니,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듯이.
“너, 정말 처음 맞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틀.
얼굴 근육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에단은 뭔가 가슴이 끓어오르는 걸 애써 누르며 내뱉었다.
“정말이야?”
끄덕.
잘못했으면, 자신의 고귀한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간신히 참기는 했지만, 대신 허무해졌다.
‘젠장!’
자신이 연주하는 걸 한번 들은 것만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도준이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더럽게 못 켰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하는 연주를 딱 한 번 보고는······.
이게 말이 되나?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새끼가!’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또 허무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 에단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준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또 켜봐.”
움찔.
에단은 자신의 인생에서 난생처음으로 폭력을 휘두를뻔했다.
***
에단에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녀석은 날 째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를 놔두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와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해가 져 어두워진 거리를 걷다 보니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머리색과 피부색 그리고 눈 색깔만 빼곤 다 같은 사람인데,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달라서인지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물론 이제 막 켜진 가로등이며 신호등을 비롯해 차도를 달리는 차들의 모습도 색상도 다르긴 마찬가지.
심지어는 도심의 어둠까지 다르게 느껴진다.
이국적이라는 건 이런 뜻이다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냄새도 다른 듯하다.
아, 이건 매연인가?
아무튼, 한국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를 느끼며 잠시 걸었다.
물론 목적지는 있다.
“흠,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아, 저기 있다!”
아까 낮에 점심을 먹기 위해 거리를 헤매다가 딱히 갈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햄버거로 대충 때우고 돌아오던 길에 발견한 식당.
찰리스 레스토랑이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의 식당이었다.
굳이 여길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슬쩍 지나치던 찰나,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피아노.
홀 안쪽에 놓여 있는 상아색으로 빛나는 그랜드 피아노가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해보니 역시나 이 가게가 맞다.
그랜드 피아노가 은은한 조명 아래 빛나고 있었다.
딸랑.
“어?”
문을 열자 들리는 종소리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유리문 위에 매달린 자그마한 종이 귀엽게 보였다.
회사를 들랑날랑할 때 나던 거랑 비슷하다.
“뭔가 그립네.”
참네, 한 달은커녕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립다.
이래서 다들 그러나 보다.
한국땅만 벗어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간단한 파스타를 시키고서 앉아 있을 때였다.
“넌 해고야!”
우와, 이거 영화에서 많이 보던 대사인데······.
신기해서 바라보곤 눈을 깜빡거렸다.
상황은 전혀 영화에서 보던 거랑 다른데?
배가 잔뜩 나온 중년 남자가 어딘지 모르게 껄렁해 보이는 청년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찰리가 결국 빡쳤군.”
“언젠가는 잘릴 거라고 했잖아.”
“하긴, 지미가 게으르긴 하지.”
“게으른 게 아니라 무책임한 거지.”
“그렇긴 해도 실력은 나쁘지 않았어.”
옆 테이블에서 맥주 한잔과 함께 식사하고 있던 남자들의 대화를 듣고 유추해보건대······.
피아니스트인가?
피아노 앞에서 저러는 걸 보면 맞는 거 같은데.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찰리가 맺힌 게 많은가보다.
기관총이라도 되듯 욕설과 저주를 적절히 섞어가며 연방 쏘아대는 찰리.
때리지만 않았지, 저 정도면 거의 폭력에 가깝다.
그에 비해 술이라도 마셨는지 살짝 비틀거리고 있는 지미인지 뭔지 하는 남자는 몇 번이고 사정 얘기를 하다가 결국 화를 내곤 찰리가 던져준 돈을 받고는 가게를 나가버렸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남자들의 대화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이제 저 피아노는 누가 치는 거지?”
“그러게. 찰리가 꽤 머리 아프겠는데?”
“곧 구하겠지, 뭐.”
흠, 피아노라······.
뭔가 확 땡긴다.
아르바이트······. 아, 여기선 그런 표현 안 쓴다고 했지. 아무튼, 일자리가 필요하진 않지만,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되도록 많은 경험을 해볼 것을 권하던 니콜 교수의 얘기도 떠올랐다.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는 찰리에게 다가갔다.
뿔테 안경을 한차례 추켜올리며 물었다.
“혹시 피아니스트가 필요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