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 누구라고?(2)
허먼 교수님은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신 상태라고 했다.
대신 그 몫만큼이나 니콜 교수님은 날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궁금한 게 많은지, 아니면 관심이 많은 건지. 아무튼, 계속해서 물어오셨다.
“정말 많이 봤네. 그래서 느낌은 어땠니?”
“흥미로웠어요. 왜 시간을 내서라도 꼭 보라고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달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처음엔 굳이 메일까지 보내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비롯해 오페라라든가, 뮤지컬 심지어는 전시회 등을 보라고 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니콜 교수의 의도를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조심스럽긴 한데, 다르지만 같다? 그동안 너무 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이다.
줄리아드에 입학이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날아온 한통의 메일.
니콜 교수가 보내온 메일에는 내 입학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의 마음이 적혀 있었으며, 말미에는 여유가 있을 때 되도록 많은 관람을 하라는 조언이 적혀 있었다.
혼자 다니기는 뭐해서 때론 어머니와 또 때론 희주와 함께 보러 다녔다.
그렇게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실컷 한 것 같다.
물론 어머니도, 희주도 기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같이 공연 등을 보고 그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 웃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 것 역시 즐거웠다.
그러면서 많은 걸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역시나······.
“사람은 다 생각이 다르구나···하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니콜 교수는 뭐가 그렇게 기쁜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이네.”
“······?”
“연주에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닐까 염려했거든.”
“그림도 보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좀 식상한 표현을 하자면, 나무와 숲?”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현재 음악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찬 나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가 원하는 것 다시 말해 연주 쪽만 관심 있게 듣고 올 수도 있었다? 뭐 이런 얘기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 교수가 그제야 얘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음악도 같다고 생각해. 인간의 삶, 즉 인생은 한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지. 감정만 해도 기쁨, 슬픔, 분노, 절망, 쾌락······.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또 변덕을 부리지. 알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또 증오하는 것도 오롯이 그 사람의 몫이라는 거? 우린 그런 감정들을 음악에 담아.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니지. 인생은 감정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노래방안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보냈지만, 반복적인 나날들이었다 보니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진 몰라도 경험이 부족한 것도 사실.
얘기를 듣다 보니 좀 더 많은 걸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럼 여행도 좀 다닐 필요가 있겠네요.”
“필요가 있겠네요가 아니라 꼭 그렇게 해야 해.”
니콜 교수는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건반만 쳐다보고 살아온 애들이 있어. 사실, 영재 혹은 천재라고 불리는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지. 하지만, 그 애들의 인생은 길지. 짧게 혼을 불태우고 명멸하는 존재들이 아닌 거야.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 벽을 느끼게 되면 그때까지 어렵게 쌓아올린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우가 생기는 거지.”
“실력도 중요하지만, 단단해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얘기이신 거 같네요. 맞아요?”
“호호. 도준이랑 대화하니까 즐겁네? 그래.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봐선 안 돼. 특히나 네가 꿈꾸고 있는 걸 이루기 위해선 정말이지 멀리······. 그것도 남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까지 볼 수 있어야만 해. 그렇게 해도 가능할지 어떨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힘이 되어줄 테니까.”
여러모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 갓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내게 또 하나의 지침이 되어줄 정도로 유용한 조언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니콜 교수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2시간가량 얘기를 나눈 뒤 기숙사로 향했다.
***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지금의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겨우 한해에 불과하지만, 가수로서 지나온 길은 잠시 잊기로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아저씨도, 고 팀장님도 그리고 마루 누나도 이해해준 부분이다.
심지어 아저씬 내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좀 더 큰 나무가 되어서 돌아오길 바란다고 하셨을 정도다.
그런 면에선 어머니께서도 마찬가지.
당신께서 못다 이룬 꿈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셨는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손을 잡아주시던 게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하다.
아까도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말았을 정도.
듣기로는 분명 가을 학기가 전부 마감됐다고 하던데, 난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짐작하기엔 허먼 교수와 니콜 교수가 어떤 식으로든 힘을 썼을 거란 생각인데······.
뭐, 문제는 없겠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
그런 걸 따지느라 쓸데없는 낭비를 하느니 보단 현재에 충실한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음, 여긴가?”
기숙사 통로 중간쯤에 위치한 방.
명패엔 Ethan이라는 이름뿐.
아래쪽은 비어져 있다.
아직 등록절차가 마무리된 게 아닌가?
방 번호를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여기라고 했는데······.
일단 노크부터 했다.
아무리 미국문화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에티켓은 알고 있었으니까.
똑똑.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나는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잡고 살며시 돌려보았다.
돌아간다.
살짝 밀자 스륵하고 소리 없이 열리는 문.
방안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다.
한쪽에는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고, 반대편 벽에는 이 층 침대가 놓여 있다.
그게 다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책상도 침대도 한쪽씩만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바이올린.
책상 위에 올려진 바이올린은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딱히 물건을 보는 안목이 높은 건 아니지만, 그런 식견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그냥 봐도 명품이란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가 절로 눈이 간다.
머릿속에선 자연스럽게 파지법 등이 떠오르는 중이었고.
물론 켜본 적은 없으니, 실제로 연주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은발이었다.
단정한 은빛 머리칼을 한 남자.
새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어딘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이다.
조금 권위적인 냄새가 묻어나긴 하지만, 누가 봐도 미남이다.
근데 뭐야?
왜 저렇게 날 노려보고 있는 거지?
뭔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것도 같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나를 지나쳐 책상 위의 바이올린을 잡아채곤 차갑게 말했다.
“뭐야, 너.”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나직하게 얘기했다.
매우 신경질적으로.
“나가. 여긴 내방이야.”
그러곤 날 잡아먹을 듯 쏘아보다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무례한 자식. 감히 누구 물건에 손을 대려고 하는 거야.”
나는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기가 막히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 거야?
바이올린 좀 바라봤기로서니 오버하긴······.
그나저나 곤란한데.
앞으로 죽으나 사나 한 공간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룸메이트와의 첫 만남이 이런 식이라는 건, 좀······.
일단은 오해부터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말문을 열었다.
“에단?”
스윽하고 돌아보는 에단의 눈동자에 불쾌함에 어려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귀라도 씻을 듯한 모습이다.
하아, 슬슬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인상이 써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얘기했다.
오해 때문에 빚어진 일이니, 풀기만 하면 다 해결될 거란 생각으로.
“난 김도준. 한국에서 왔어. 앞으로 잘 부탁해. 오늘부터 너와 같은 방을 쓸 거야. 그리고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네 물건엔 손대지 않았어. 그 굉장해 보이는 바이올린 역시. 좋아 보이기에 구경하고 싶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 물건이 아니까, 그냥 보기만 했을 뿐이야.”
하지만,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닫는 데는 1초도 필요치 않았다.
“뭐라는 거야! 이 망할 자식이!”
그런 거다.
이 자식은 단지 화가 나 있는 게 아니다.
날 벌레 보듯 하는 눈초리 하며 혹여 손이라도 닿을까 봐서 좀처럼 다가오지도 않는 듯한 모습.
그러면서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
거기에 상대방의 기분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쏟아내는 거칠 말투.
놈은 그냥······.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인 자식인 거다.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
에단은 어제 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유?
그딴 게 왜 필요한가?
그냥 불쾌한 거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촉망받던 천재니까.
더구나 집안은 미국 남부의 유서깊은 가문인 크로이츠가. 그것도 방계도 아니고 직계다. 음악계에서 알아주는 크로이츠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몇백 년이라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크로이츠가 만큼이나 지난 백여 년 동안 많은 거장들을 배출한 가문은 없었으니까.
비단 작곡가나 지휘자만이 아니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
현재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 중인 삼촌은 저명한 피아니스트였고, 지금은 몸이 안 좋아 쉬고 계시지만 아버지 역시 한때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셨었다. 그리고 누나. 바이올린으로는 이미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명연주가였다.
자신이 바이올린을 선택한 것도 누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롤 모델이자 멘토였다.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우스, 아마티, 과디니니 등과 더불어 명품으로 꼽히는 바이올린을 선물해준 것도 누나였다.
그런 걸 함부로 손대려 하다니.
아니, 놈의 말처럼 그냥 구경만 하려고 했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딴 평민 자식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하다.
그는 철저히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인으로서 사람 간의 계급을 나눌 정도로 모자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귀족의 피가 흐른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그의 집안은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 어딘가의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자작 집안이기도 했고.
에단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바짝 쳐든 채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놈이 동양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이 학교에 다니는 놈들치고 자신보다 나은 놈은 없으니까.
당연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룸메이트란 존재는 하인 그 이하다.
에단은 매번 룸메이트가 올 때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대했고, 결국 얼마 안 지나 방을 옮기기 일쑤였다.
외롭다?
웃기는 일이다.
냄새나는 놈들이랑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일인데, 무슨.
언젠가 세계적인 연주가가 되는 건 당연하고, 역사에까지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자신과 한방을 쓰게 해줬으면 영광으로 알 것이지, 뭐가 그렇게 불만들 많은지 그새를 못 참고 다들 방을 뛰쳐나가는 건지.
그로서는 그게 차라리 편했지만.
아무튼, 한국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왔다는 저 머저리도 곧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의심치 않으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낑! 끼이이잉! 낑······끼잉!
“응?”
자신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건 분명 바이올린 소리였다.
에단의 눈이 순식간에 커지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분노했다.
좀처럼 뛰지 않는 그가 전력을 다해 달려갈 만큼.
문을 부숴버릴 듯 열어젖힐 만큼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이 층 침대의 아래 칸에 앉아 바이올린을 조율하는지 줄감개를 만져가며 활을 켜고 있는 동양인.
그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은 자신의 것이 틀림없었다.
“망할 자식!!!”
분노가 폭발했다.
“너 이 자식! 내가 어제 분명 내 물건에 손대지 말······.”
하지만, 에단의 고함은 중간에 뚝 끊길 수밖에 없었다.
동양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간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는 바이올린이 올려져 있었다.
자신의 바이올린이었다.
그럼 저 자식이 지금 들고 있는 건 뭐지?
모양이며 빛깔이며, 그 특유의 곡선 등을 고려해볼 때 분명 자신의 것과 같은 과르네리가 틀림없는데······.
그때였다.
“아, 이거?”
동양인, 도준이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치켜들며 말했다.
“좋아 보이기에 하나 샀지.”
사, 샀다고?
저게 얼마짜리인데······.
“니콜 교수님한테 물어보니까, 다행히 뉴욕에 이걸 파는 데가 있더라고···.”
‘자, 잠깐······. 지금 누구라고 했지?’
에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물었다.
“니, 니, 니···콜 교수님? 지금 그 마녀한테······.”
하지만,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똑똑똑.
열려 있는 문임에도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도준이 환한 표정이 되어 자리를 박차고 있었으니까.
“아, 미안.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좀 바쁘네.”
자신의 옆을 지나쳐 뛰쳐나가는 도준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에단.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뭐, 뭐지?’
물건을 배달한 남자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아니, 그건 문제가 안 된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가 눈에 띈다.
못해도 몇십만 불은 줬을 게 분명하다.
에단이 벙찐 얼굴이 되어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배달을 마친 남자가 돌아갔다.
그리고 막 도준이 첼로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배달 왔는데요?”
“어? 또 왔네?”
도준이 해맑게 웃으며 첼로를 내려놓곤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곤 즐겁게 사인을 하며 물었다.
“근데 왜 하나밖에 안 왔어요?”
“아, 죄송합니다. 오늘은 콘트라베이스만 먼저 오고 플롯이랑 비올라는 며칠 더 걸릴 거 같습니다.”
뭔가 기묘한 장면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도준이 지금 방안으로 들이고 있는 악기들은 하나같이 명품들.
앞서 보았던 첼로처럼 적게는 몇천 불에서 많게는 몇십만 불은 족히 줘야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에단이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설마?
황당해져서 눈길을 돌렸을 때 이미 도준은 방문을 열고 있었다.
에단의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당신이 킴도쭌?”
“예. 전데요.”
“여기 주문하신 클라리넷입니다.”
“아, 이건 오래 걸린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먼저 주문하신 분이 계셨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취소됐어요.”
“하하하. 운이 좋았네요.”
송장에 사인을 마치고 클라리넷을 들고 들어오는 도준.
이제 방안에는 온갖 악기들이 가득하다.
바이올린에서부터 첼로, 콘트라베이스, 클라리넷까지.
며칠 뒤엔 플롯이랑 비올라도 온단다.
종류도 종류지만, 하나같이 비싼 악기들.
아니 명장의 손길이 닿아있는 명품들이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싶었다.
그 사이 좁은 방안에 조심스럽게 악기들을 정리해 간신히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통로를 만든 뒤, 도준이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진짜 별거 아니란 듯이.
“하나둘 사다 보니, 좀 많더라고. 하는 수없이 바이올린만 들고 왔지 뭐. 나머진 배달 좀 해달라고 했고.”
피자 배달시키듯 말하고 있는 도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