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 누구라고?(1)
두 번째 오는 길이지만 역시나 익숙하지 않다.
“여어, 오랜만이야.”
그래도 다행인 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익숙하다는 점이다.
콜린이 손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디알로가 건들거리며 장난스럽게 걸어와 어깨를 부딪쳐온다.
“잘 지냈지?”
유진이 뒤쪽에서 물어왔지만, 대답할 틈은 없다.
제롬이 밝게 웃으며 친근한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거참, 희한하네.
한국에서 보던 거랑 어쩜 그렇게들 다를까.
뭔가 여유가 넘친다고나 할까.
역시 홈그라운드라는 건지.
남자인 내가 봐도 다들 멋지다.
특히 말없이 미소를 짓고 있는 베릴의 경우엔 여자들이 봤으면 꺅꺅거리며 자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
뭐, 실제로도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하기야 공항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안 그럴 수가 없지.
슬슬 사람들이 레이크헬 멤버들을 알아보곤 몰려들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드르륵.
밴의 차 문이 열리며 고함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야이, 망할 놈들아! 여기서 사람들한테 깔려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브라이언.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엔 레이크헬은 너무 유명하다.
아직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를 향해 한차례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 역시 픽하고 웃고는 손짓했다.
어서 타라는 뜻.
어느새 밴드의 막내인 제롬이 카트에서 캐리어 하나를 내려서 끌고 가고 있었는데, 디알로가 불쑥 끼어든다.
그러곤 나머지 짐들을 번쩍 들어 밴의 트렁크에 실어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제롬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듯 낚아채 짐들 위에 얹었다.
“가지.”
진짜 이상한 일이다.
제롬이며 디알로며, 눈앞에 서 있는 남자들이 풍경에 녹아들 듯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난······.
외딴 섬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타자마자 출발하는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미국이란 말이지.
한국을 떠날 때와는 다르게 어째선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가는 길에 들린 식당에서 가볍게 스테이크를 썰어주고 있을 때였다.
“당최 알 수가 없네. 아니, 뜬금없이 웬 줄리아드인 거야?”
유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공부 좀 할까 해서.”
거짓말은 아니다.
노래방에서 이미 클래식의 기본적인 지식이야 배웠으니 조금 다른 의미가 되긴 하겠지만.
깨치고 익힌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니니까.
“공부?”
유진은 이내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어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왜? 그럼 안돼?”
유진처럼 혀를 차고 있진 않지만, 다른 멤버들도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들이다.
“안될 건 없지. 단지 지금의 너한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의문이 들뿐.”
“그렇긴 해. 솔직히 네가 지금 누군가한테 뭘 배울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디알로 역시 맞장구를 치자, 제롬이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앨범 작업을 하는 게 낫지 않아?”
“내 말이.”
유진이 고개를 내젓는 걸 보면서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틀린 말들은 아니다.
가수라는 직업은 노래를 부르는 직업이고, 당연히 노래할 장소와 시간만 있다면 무조건 불러야 한다.
더더욱이 싱어송라이터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곡을 만드는 것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난 말 그대로 직무유기다.
적어도 저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대충 둘러댈까 하다가 진지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다섯 남자들, 아니 브라이언까지 포함해 여섯 남자들의 눈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반짝이다 못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으니까.
저렇게까지 관심을 가져주는데, 이쪽에서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 건 실례 아닐까.
“제대로 해볼 마음이 들었달까?”
역시 이걸론 부족하겠지.
덧붙였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말과 음악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음, 소통이라는 의미에선 같지만, 이해하는 곳이 다르다고 할까?”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머리와 가슴을 차례로 짚어 보였다.
속으로는 귀까지 가리키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무리지 싶었다.
고막을 울리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음악이라니······.
내가 저들 입장이라도 미쳤다고 생각할 게 뻔했으니까.
봐라.
지금 내가 말한 것만으로도 여섯 명의 남자들은 복잡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참네. 꼭 처음 들어본 것처럼 굴기는.
“뭐야? 설마 니들 음악을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면서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무리 좋은 멜로디도 가사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빼고 나면 결국 반쪽 짜리라는 걸 알고들 있을 텐데.
물론 좋은 음악은 그런 걸 초월해 감동을 전해주긴 하지만.
지금 내가 얘기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걸 알기에 다들 저런 표정들을 짓고 있는 거겠지.
“미쳤군.”
멤버들 중에 가장 시니컬한 성격인 유진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 뒤를 이어 브라이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너무 이상적인 거 아냐?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라니······.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결국 사람이란 동물은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한 뒤에야 가슴이 울리는 거라고. 그걸 따로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지 싶은데?”
콜린이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우리가 가사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의미의 전달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말했잖아? 공부하겠다고.”
“미쳤네, 진짜. 그게 공부한다고 될 일이냐? 하아, 진짜 너란 놈은······. 우리가 아랍에 가서 공연을 해봐라. 몇 명이나 모여들 거 같냐?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느끼는 것도 다른 거라니까?”
참 신기한 놈들이다.
세계적인 그룹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음악적으로는 천재적인 놈들이 그런 건지.
앞뒤 다 자르고 얘기했는데도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감을 잡고 있다.
또 그걸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단정 지어버리고.
아니 그건 그렇고 왜 화까지 내는 거야?
지들이 물어놓고서.
대답을 해줘도 지랄들이다.
“알아. 어려운 일이라는 거.”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겠지.”
부정하진 않았다.
실제로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아니까.
지역에 관계없이, 시대를 초월해서, 누가 들어도 좋은 음악. 아니 내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건 인간의 영역에서 해낼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굳이 얘기하면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걸 내가 해보겠다고 하니 황당해하는 거고.
“도준. 이번에 발표한 노래들이 빌보드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서 그러나 본데, 그건 네 음악이 나빠서가 아니야. 이 땅은 동양인들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질 않아. 그렇다고 해서 배타적이란 얘기는 아니고, 단지 익숙하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미국인들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마워.”
콜린의 말을 더 듣고 싶었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상황에서 귀를 기울이는 척하는 것 자체가 기만이지 싶어서 말했다.
“근데, 콜린.”
“······.”
“딱 한 걸음만 내디디면,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야. 그냥 그뿐이야.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고 싶진 않아.”
콜린은 말할 것도 없고, 다들 말이 없어졌다.
그저 날 쳐다만 보았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웃는다.
그 웃음 어디에도 비웃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자신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조롱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응원해주는 눈빛들이었다.
***
일부러 하루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호텔에 방을 잡고 레이크헬 멤버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콜린을 비롯해 몇 명은 가볍게 맥주를 마셨고, 그 와중에도 브라이언은 끊임없이 곡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하면서 어루고 달래고······. 나 참, 누굴 애로 아나.
“비즈니스라면 아저씨랑 얘기하시죠?”
아저씨를 언급하는 순간 바로 깨갱거릴 거면서.
“어? 아직 그 회사랑 계속 일하는 거야?”
한쪽에 찌그러져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브라이언 대신 콜린이 뜻밖이란 표정으로 물어오기에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콜린은 집 떠나면 가족하고 인연을 끊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저씨가 나 하나를 케어하겠다고 세운 회사가 HS 엔터테인먼트라는 것도.
내가 있든 없든 ‘김도준’이란 브랜드를 키우고, 팬들을 관리해 언제 복귀하든 활동하는 데 문제가 없게끔 하려는 세 사람, 아저씨와 고 팀장님 그리고 마루 누나를 이해한다는 건 철저히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진 미국인인 그로서는 무리일 테니.
“음원은 계속 낼 건가 보네?”
“글쎄. 그건 좀 더 지켜봐야 할 거 같아.”
다들 아쉬운 얼굴들이었다.
그때 제롬이 어디선가 통기타 하나를 들고 왔고, 어느샌가 다들 돌아가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가 싶더니 종이 한 장에 낙서하듯 음표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이 슬그머니 다가와 눈을 빛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아, 진짜 음악에 미친놈들이네.
어이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새벽까지 곡을 쓰고 밀렸던 대화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다음 날 아침.
뉴욕 시내 한복판에 있는 빌딩 앞에서 차가 멈췄다.
차창 너머로 통유리에 흰 글씨로 적혀진 The Julliard School이란 글자가 보인다.
Irene Diamond Building.
주위를 둘러싼 빌딩들에 비해서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꽤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차에서 내린 뒤 내 뒤를 따라나오려는 녀석들에게 얘기했다.
“나, 저 문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턴 학생 신분이라는 거 알지?”
뭔 소리를 하나 싶어 쳐다보는 녀석들의 궁금증을 깔끔하게 해소시켜주었다.
“그러니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올 생각 따윈 하지도 마. 알고들 있겠지만, 솔직히 니들이 여기 오는 거 자체가 민폐야.”
아무리 줄리아드가 클래식 위주의 음악학교라고 해도, 세계적인 밴드인 레이크헬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당연히 이놈들이 여길 들어오는 순간, 학교는 뒤집어진다.
더구나 날 만나기 위해서 왔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 순간부터 이놈 저놈한테 시달릴 게 뻔하다.
그건 절대로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니까.
“아니, 그냥 오지 마라.”
“야! 너무 냉정한 거 아냐?”
“우리 곡은?”
“그럼 이제 편곡 안 해줄 거야?”
“보고 싶을 때도 있······.”
“거기까지!”
어디서 닭살 돋게!
“뭐가 문제야? 밖에서 만나면 되지!”
그제야 다들 납득한 표정들이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레이크헬. 그들을 싣고 막 밴이 출발하기 전이었다.
“야, 도준.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디알로가 그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눈을 깜빡거리며 물어왔다.
“그 안경은 뭐냐?”
그의 모습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곰 같아서 웃음이 났지만, 나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해 주었다.
아니 되물었다.
“슈퍼맨 못 봤어?”
안경테를 톡톡 두들기며 웃어주었다.
“템빨이라고 아나 몰라?”
살짝 입을 벌리고 있는 디알로를 비롯해 레이크헬 멤버들에게 말했다.
“이거 은근 효과 좋더라고.”
***
봐라, 다들 못 알아보잖아?
건물 입구에서 레이크헬과 헤어진 후, 안쪽으로 들어오는 동안 날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가 미국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간혹 스쳐 가는 중국인들이나 심지어는 한국인들조차 날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머리스타일도 많이 바꿨고, 이전에 입던 옷차림과도 사뭇 달라서 그런 탓도 있다.
무엇보다도 설마 내가 줄리아드 음대에 다닐 거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경 하나만으로도 간단히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거지.
이미 한국에서도 몇 차롄가 이러고 나다닌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잘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아마 어지간하면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솔직히 말하면 여기까지 와서 누군가 날 알아볼까 봐 걱정하는 것 자체가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도 들고.
“예. 지금 도착했어요. 알겠어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고서 잠시 서 있자, 저만치서 정장차림의 니콜 교수가 금발을 찰랑거리며 나타났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환영해요. 줄리아드에 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