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 나아간다는 것(3)
“그게 무슨 말인가?”
허먼 교수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물어왔다.
니콜 교수 역시 의아하다는 표정이었고.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줄리아드에 오고 싶은 건 피아노 때문이 아니란 얘긴데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허먼 교수가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전공이 피아노가 아니었던 건가?”
그제야 허먼 교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반해 니콜 교수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왜 온 거죠?”
어딘지 모르게 실망한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저 모르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허먼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한낱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 불과할 테니까.
쯧, 그래도 씁쓸하긴 하다.
그렇게 중국에서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인정해야겠지.
요새 미국에서도 내 노래가 꽤 팔리고 있다곤 했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는 거지.
뭐, 상관없다.
인기 좀 얻자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곤 나에 대해서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응? 그러고 보니······.”
니콜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허먼 교수에 물었다.
“킴의 이름이 도준이라고 했나요?”
“예. 분명 킴도쭌이라고······.”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니콜 교수가 미간을 좁히며 뭔가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손뼉을 쳤다.
“아! 킴도준!”
그녀는 날 가리키며 외쳤다.
“LONGING TIMES!”
그때까지 영문을 몰라 나와 니콜 교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던 허먼 교수가 순간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럼, 저 친구가······!”
그들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
“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클래식 쪽이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니콜 교수는 피아노 전공이지.”
“그것도 알고 있고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런 채로 허먼 교수가 날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으로는 ‘그런데 왜?’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대답해줘야겠지.
여기 온 건 그 때문이기도 하니까.
“그야 클래식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죠.”
“아니, 그러니까 왜!”
거참,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사람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배우러 올 수도 있는 거지.
“허먼 교수님.”
니콜 교수가 가만히 부르자, 그제야 허먼 교수는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어째서 허먼 교수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도 그는 지금 내가 단지 일시적인 흥미 차원에서 접근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건, 뭐 이런 거겠지.
동양권에서 한창 잘나가는 가수가 갑자기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한다. 그러자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에선 난리가 난다. 한마디로 이슈가 되는 거다. 그걸 또 철저하게 마케팅으로 이용. 원래부터 인기가 있던 상황에서 이건 이것대로 또 한차례 팬들을 광분케 만들 거다. 어쩌면 미국에서도 요새 들어 조금씩이나마 빌보드 차트 순위를 높이고 있는 내 노래들에 대해 관심이 높아질 수도 있고.
어? 이거 말되는데?
내가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하면 왠지 지금 생각한 대로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왜지?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단순한 호기심은 아닐 테고, 왜지?”
그때 허먼 교수를 대신해 니콜 교수가 물어왔다.
이쯤에서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를 느꼈다.
난 머릿속으로 이미 정리해놓은 것들을 얘기할까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음악이 뭘까요?”
우리나라에선 턱도 없는 질문이다.
버릇없다고 욕먹기 딱 좋다.
한데, 확실히 미국이라 그런가.
오히려 두 사람의 눈이 빛나는 게 보였다.
더불어 뭔가 흥미로워하는 눈빛도 살짝 엿보인다.
당연하겠지만,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금 내가 한 질문에 대답을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단순히 황당해서만은 아닐 테다.
뿐만 아니라 내가 설마 ‘음악’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몰라서 물은 건 아니란 것쯤도 알 거고.
물론 그들을 곤란케 할 생각 따윈 손톱만큼도 없었다.
도발하거나 싸우자고 던진 질문도 아니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그걸 아는지, 두 사람은 날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지, 잠시 말을 아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허먼 교수의 입이 열렸다.
다행히 악기라든가, 악보, 리듬 따위의 상투적인 얘기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세계적인 음대의 교수들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쉽고 직관적인 얘기들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내가 듣고 싶은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게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이론적인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내게 있어서 음악이란······감정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네만.”
“바그너의 경우에는 특정 목적으로 오히려 청중의 감정을 증폭시키지 않았나요?”
게르만 신화를 예술로 승화해 당시 패전국의 국민으로서 절망의 늪 속에 허우적거리던 독일인들에게 인종주의적 애국심을 고양시켰던 작곡가. 이는 나치 정권으로 이어져 파시즘이 정치를 예술화하는 전략을 구사토록 하는, 즉 프로파간다의 전형을 창조해낸다.
“그 역시도 결국엔 감정의 표현이라는 점에선 차이가 없지. 물론 올바르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허먼 교수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니콜 교수가 끼어든 것도 그때였다.
“소리가 곧 음악일 수는 없지만, 음악은 소리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음악이란 소리를 매체로 하는 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씨익.
웃었다.
내가 낸 결론과 완전히는 아니지만, 비슷하다.
다시 물었다.
“그 소리라는 거 말인데요.”
“······.”
“굳이 나눌 필요가 있나요?”
“······?”
“클래식이라던가, 락이라던가······. 구분 짓는 게 꼭 필요할까요?”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다시 물었다.
“소리가 없는 상태는요? 음과 음 사이에는 단지 비워진 걸까요? 아니면 채워진 걸까요?”
계속된 질문에 니콜 교수가 눈을 빛낸다.
아까보다 날 보던 것보다 좀 더 반짝인다.
어째선지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지?”
허먼 교수가 흥미롭다는 듯 물어오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걸 알려고 여길 온 건데요?”
***
도준이 떠난 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허먼 교수였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은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니콜 교수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줄리아드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킴이 싱어이기 때문에?”
“그런 점도 없잖아 있지만, 이곳에서 그가 얻어갈 게 있을지가 의문스럽기 때문이에요.”
“그에게는 순수하게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
허먼 교수가 파고들자, 니콜 교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해하셨네요. 줄리아드에 클래식만 있진 않죠. 모두의 생각이 같아야 하는 게 아니 듯이요.”
“그래도 파장이 적진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킴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
“그를 생각해주기 전에 우리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허먼 교수가 침음을 흘리고 있을 때, 니콜 교수가 덧붙였다.
“개인적으론 무척 탐이 나지만, 제가 킴에게 무얼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솔직히 두렵네요.”
“어차피 무얼 얻어갈지는 킴의 몫이 아닐까요?”
“글쎄요. 교수님께선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본 킴은···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같더군요. 아마, 아니 틀림없이 그는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명성이고 인기고 다 던져버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일 거에요. 설사 베를린 필하모닉에라도 입단하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 그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니콜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곤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얘기했다.
“그런데도 미련을 떨치질 못하겠으니······. 하아, 그가 말했던 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네요. 솔직히 얘기하면 보고 싶어요.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는지, 또 어떤 음악을 만들어낼지. 교수님은 어떠신가요?”
허먼 교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으니까.
***
나아간다는 것.
그건 아마도 멈춰 서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닐 거다.
그럼에도, 나는 선택했다.
내 안에 정해져 있는 규칙을 부숴버리는 것을.
대법관을 목표로 할 때야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래방에서 익힌 것들은 모두 이제까지 나왔던 음악들.
모두 과거의 것들이니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걸 찾기 위해서라면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턴 전력으로 부딪혀 간다.
나만의 방식으로.
만일 줄리아드 음대가 안 된다면 그땐 다른 대학을 가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길을 선택하면 될 터.
비행기 안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고,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그렇게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공항을 나서고 있는데, TV 앞에 와글와글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다.
호기심이 일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날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처음엔 그게 내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와 모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TV 화면에 떠있는 얼굴을 보곤 납득해버렸다.
다들 집중하느라 날 신경 쓰지 않고 있달까.
거기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니 사람들이 나와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시간은 아닌듯하고, 이미 오늘 오전에 했던 방송을 다시금 내보는 듯 보였다.
아무튼, 좀 당혹스럽긴 하다.
씨크릿걸즈?
그녀들, 아니 정확히는 소연이 울면서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동안 절 응원해주신 많은 팬들께 감사드리며······. 흐윽, 얘들아 미안해.
- 아냐, 언니 흐그으으윽 해, 행복해야 해!
당최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누군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왜 그런데? 갑자기 은퇴라니? 그럼 씨크릿걸즈는 어떻게 되는 거야?”
“완전체가 아니게 되는 거지 뭐? 거참, 진짜 이해가 안 되네.”
“그러게? 요즘 한창 잘나가지 않았나?”
“소속사와 갈등이 있나? 혹시 쫓겨난 거 아냐?”
은퇴?
뜻밖의 단어들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면 아래쪽에 떠올라 있는 자막을 읽었다.
[씨크릿걸즈 멤버 소연 돌연 은퇴 선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불길하다.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가 돌아섰다.
그러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루 누나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누나, 저에요.”
- 아, 안 그래도 막 전화하려던 참인데. 잘 도착했어?
“예. 지금 인천공항이에요. 근데, 소연이 은퇴한다면서요?”
- 하아, 그것 때문에 난리네.
“왜요? 무슨 문제 있대요? 그럼 씨크릿걸즈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잠시 수화기 너머가 침묵에 잠긴다.
그러더니 한숨 소리와 함께 마루 누나가 말했다.
- 얼른 집에 가봐.
응? 이건 또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얘기에 다시 물으려다가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알겠다고 전화를 끊은 후 얼른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거실에 감돌고 있는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앞에선 형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소파에선 어머니가 소연을 꼬옥 끌어안은 채 등을 토닥이는 중이셨다.
더 황당한 건, 어머니가 연방 소연을 향해 ‘괜찮다, 아가.’라고 안쓰럽고 애틋하게 다독이고 계신다는 거였다.
그러다 가끔씩 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시는 어머니.
아니, 이게 뭔 일야?
서, 설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던 소연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수그렸고, 형은 멋쩍은 표정과 함께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아버지께서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날 반겼다.
“왔냐?”
“예? 아, 예······.”
그때 어머니께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그대로 형에게 다가가 등짝을 냅다 후려치셨다.
찰진 소리가 연거푸 들린 후, 어머닌 형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소연의 어깨를 감싸며 일으켰다.
그런 뒤, 둘이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문이 닫히기 전, ‘저, 정말 감사합니다. 흑! 어머니’라며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아, 진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무래도 형이 사고를 친 모양인데.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철딱서니 없는 우리 형님께서 이번엔 제대로 사고를 치셨단다.
기가 막히게도······.
조카가 생긴단다.
형수가 생기기도 전에.
하아,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한숨을 내쉬다가 물었다.
“얼마나 됐는데?”
“6주래.”
말하면서도 참지 못하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른다.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질투가 날 정도다.
“그렇게 좋아?”
“······응.”
민망하단 표정을 보이는 형님. 그래도 사고 친 건 아는지 부끄럽단 얼굴이다.
머리를 한차례 긁적이며 형이 말했다.
“솔직히 맞아 죽을 줄 알았다.”
“아직 안 죽은 게 용하지.”
“나야 그래도 괜찮은데······. 소연이가 굉장히 두려워했거든. 혹시라도······. 그런데, 어머니가 소연이를 보시자마자 끌어안고, 둘이서 우는데······. 나, 진짜 잘하려고. 부모님한테도, 소연이한테도. 그리고 우리 또식이한테도.”
또식이?
태명인가?
그건 그렇고.
눈에 장면이 전부 그려졌다.
난 가만히 형을 보다가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게 좋은가?
아주 그냥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다.
무슨 전쟁에라도 나가는 사람 같다.
“소연이랑 애는 내가 책임질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없이 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하고.”
“됐어, 인마. 네 일이나 잘해.”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칼같이 잘라버리는 형이었다.
그런 형을 보면서도 어째 안심이 안 돼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허먼 교수한테서 온 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