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 나아간다는 것(2)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아마도 나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거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가.
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등이 다 축축해진다.
솔직히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돌아버리지 않은 게 용할 정도.
천재?
그래, 인정한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옆눈 안 돌리고 공부만 파고든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받쳐줬기에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남들보단 조금 더 잘 돌아가는 머리 덕택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진짜 조금 더 머리가 좋은 거뿐이고 실질적으로 내가 가진 힘은 아마도 다른 걸 거다.
독기라고도 부르고, 근성이라고도 부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세.
그거야말로 내가 지닌 진정한 재능이다.
그렇기에 버틴 걸지 모른다.
오로지 100점을 맞고 말겠다는 집념 하나로.
내게 있어서 음악이란······.
그렇게 억지로 쌓아올린 스펙이다.
그런 주제에 남들이 천재라고 떠받들어준다고 해서 들뜬다?
개소리다.
그럴 수가 없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던 지식들을 생각하면.
미친 듯이 목을 혹사시키며 단 1점을 올리기 위해 지랄발광을 하던 시간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아가 치민 걸 테지.
노인이 혀를 차는 소리에.
결론은?
이대로 안주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일단 인정받을 것.
뭐로?
내가 새로 시도하는 것들로.
그것은 아마도 가능성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지침은 되어 줄 터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눈앞에 있는 피아노를 쳐야 한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네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니콜 교수.
한순간 그녀와 눈빛을 교환한다.
그리고 느낀다.
내가 보낸 데모곡은 온통 변주로 가득한 연주였다.
클래식도 충분히 대중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그럼 지금은 어떻게 쳐야 할까?
그냥 그때처럼 치면 되나?
아니면 좀 더 화려하게?
혹은 훨씬 더 파격적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던 나는 가만히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말할 것도 없이 악보는 외우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노래방 안에서 익힌 곡들은 대중적인 음악들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데모곡을 만들면서 대략적인 흐름은 익히고 있다.
물론 그걸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은 건 아니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떠올린 것뿐이다.
어머니께서 시집올 때 가져왔다던 피아노를 만져본 건 그야말로 어릴 적 장난칠 때뿐이었으니까.
처음 다뤄보는 악기를 다루기 위해 이 정도의 수고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악보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니콜 교수는 도준이 눈을 감는 걸 보곤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모습만 보자면 진중하기 이를 데 없어서였다.
동영상에서 기타를 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꼭 무슨 단독 연주회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호기심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보고 싶은 것은 그토록 파격적인 변주를 연주한 도준이 과연 피아노를 악보에 충실하게 쳤을 때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인가였으니까.
그때 도준이 눈을 뜨고······.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음 하나가 들릴 듯 말 듯 울려 퍼졌다.
그다음 또 한음.
지붕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였다.
그만큼 소리는 작았고 부드러웠다.
피아니시모.
하지만, 부드럽게 시작된 선율은 갑자기 강력해졌다.
그러곤 템포가 빨라졌다.
‘서툴러. 서투른데······.’
이상할 정도로 귀가 기울여졌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도준의 연주를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니콜 교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천둥 같은 소리를 울리며 과격하게 들이치는 소리.
그것은 폭풍이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포르티시모로 몰아치는 반주.
마치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마음을 뒤흔든다 싶은 순간이었다.
또다시 부드럽게 이어지는 연주.
‘이건······.’
가지고 놀고 있다.
피아노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다.
그럴만한 테크닉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한 번도 다루어보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의 움직임은 전혀 세련되지 못했고, 오히려 투박하게만 느껴졌다.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보자면 틀림없이 초보자가 분명했고, 음이탈까진 보이지 않았지만 서툰 것도 틀림없다.
보통은 저럴 경우 떨려서라도 실수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이렇게 과감하지?’
니콜은 단 한 순간도 도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도준이 초청한 세계로 들어가 도준이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엔 어떠한 기교도 없었다.
대신 듣는 이를 압도하는 강력함과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서서히 물들여오는 색채감 넘치는 선율이 있을 따름이다.
‘아쉽네.’
어릴 때부터 쳤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일찍, 적어도 손가락이 굳기 전에 시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 갈 때였다.
피아노 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하지만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 가는 소리.
거칠던 음은 점차 안정되어가고, 힘이 모자란 부분에선 반대로 박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세심한 느낌이 살아나면서 시작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변해갔다.
마치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피아니스트가 복귀 무대를 갖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흡사 진화의 과정을 옆에서 바라보는 듯한 그런 감각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니콜 교수는 더할 수 없이 커진 눈이 되어 도준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렇게 넋을 잃고 도준의 연주를 듣는 사이, 어느새 연주는 끝이 났다.
사십여 분에 달하는 시간이 의식도 못 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이다.
연주가 끝이 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피아노는 처음이라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처음인 것치고는 너무 잘 친다.
테크닉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흔들 줄 아는 연주.
딱히 알고서 치는 거 같진 않은데, 피아니시모에서부터 린포르찬도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음을 가지고 논다.
게다가 치는 동안 눈에 띄게 실력이 는다?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에 딱 좋다.
몸이 떨려왔다.
‘이 아이······.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난생처음으로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아직은 서툰 손가락들이 완벽한 테크닉을 갖추고 능수능란하게 건반 사이를 오가게 된다면?
기초부터 단단히 다지고 그걸 바탕으로 화려하게 만개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놀라게 될 것이다.
‘잡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니콜 교수의 눈동자에 불꽃 같은 기운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옆에서 허먼 교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정말······. 처음이 맞나?”
***
두 사람은 도준을 앞에 앉혀 놓고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할 말은 많았다.
머릿속에선 생각이 흘러넘쳤고, 그것들은 이미 가슴속에서 서서히 덩치를 불려 어느새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입장이란 게 있었다.
안타깝게도 도준이 악보와 USB를 보낸 것은 허먼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먼저 나서는 건 무례한 일.
그저 허먼 교수가 말하길 기다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허먼 교수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예상하고도 남았다.
지금 망설이고 있는 허먼 교수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은 설익은? 그래서 좀 더 배우고 오라고 말해줄 것만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이곳은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인재들이 모여드는 학교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느 곳을 둘러봐도 도준의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직 기초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도준은 여기에 발을 들일 자격조차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테크닉적인 측면만 보자면.
하지만, 상관없다.
정 안되면 자신의 제자로 들이면 될 테니까.
줄리아드와는 무관하게.
철저하게 자신만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만큼 욕심이 났다.
거듭된 연습을 통해 훌륭한 연주자를 키워내는 건 가능해도, 사람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연주자는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튼,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건대 허먼 교수는 언제나처럼 같은 소리를 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규정상으로도 그게 맞았다.
지금 보여준 도준의 실력은 어떻게 보아도 줄리아드에 발을 들이기엔 자격 미달이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허먼 교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 친 거치고는······. 꽤 듣기 좋았네.”
“감사합니다.”
“큼, 이전에 보내준 것도 그렇고······. 자네에겐 가능성이 보여. 아마 몇 년만 지나면 상당한 수준의 연주를 하게 되겠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기준으로 제자들을 평가하고 몰아치는 걸로도 유명한 허먼 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얘기는 딱 니콜 교수의 예상대로였다.
“자네가 내게 동영상을 보낸 건, 줄리아드에 들어오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네.”
“흠, 이런 말을 하는 건 여전히 익숙지 않군.”
허먼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저 얘기했다.
“먼저 이런 얘길 하게 돼서 안타깝게 생각하네.”
니콜 교수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채로 마음을 굳혔다.
저런 인재를 이대로 돌려보낸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먼 교수가 말했다.
“지금의 자네로선 입학이 어렵겠군.”
역시나.
니콜 교수의 눈동자에 안타까운 빛이 스쳐 갔다.
하지만, 허먼 교수의 얘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렇게 하지.”
“······?”
도준이 의아한 눈빛이 되어 허먼 교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니콜 교수의 눈이 반짝이는 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서, 설마?’
고개를 번쩍 쳐든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허먼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허먼 교수.
자신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허먼 교수가 도준을 어떤 식으로든 줄리아드에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9월에 개강하는 가을 학기는 이미 입학이 모두 결정된 상황이네. 따라서 내년 초에 입학하는 수밖에 없겠지. 아, 물론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라이브 오디션을 봐야 하지. 그전에 프리 스크리닝부터 통과해야 하고. iBT도 최소 71점을 넘겨야 하겠지만. 뭐, 그거야 내년 2월까진 여유가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을 테고······.”
뭔가 입학 요강이랄까, 간단한 프리젠테이션을 하듯 얘기하던 허먼 교수가 일순 눈을 빛냈다.
“우선 레슨부터 받는 게 어떻겠나?”
“레슨이요?”
도준이 눈을 껌벅이며 되묻고 있을 때, 니콜 교수의 눈이 다시 한 번 반짝였다.
니콜 교수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동안, 허먼 교수가 진지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줄리아드에 들어오기 위해선 최소 2개의 추천서가 필요하기도 하니, 앞으로 반년 동안 여기서 레슨을 받는 게 어떨까 싶네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콜 교수가 끼어들었다.
“제가 하죠.”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허먼 교수가 아연실색해서 반문했다.
“지금 지도하는 학생들만으로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전혀!”
“지, 지난번에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힘들어서 미칠 것 같다고. 이번 학기만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몰디브로 가서 몇 년이고 쉬고 오겠다고······.”
황당하다는 눈빛이 된 허먼 교수가 말까지 더듬고 있었지만,
“그런 일 없어요.”
딱 잡아떼는 니콜 교수였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힘들어 보이시는데······. 다른 교수분들도 많은데, 굳이 니콜 교수님께서······.”
허먼 교수는 말을 하다말고 다물어야 했다.
니콜 교수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허먼 교수는 떠올렸다.
니콜 교수가 교내에서 ‘크레셴도의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더불어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나 그 욕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도.
그런 그에게 니콜 교수가 힘주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킴은 내 거···제가 맡겠어요.”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여기서 고개를 흔들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였다.
결국, 허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그때였다.
“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네요.”
“······?”
“······?”
두 사람이 일제히 도준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저 여기 피아노 배우려고 온 거 아닌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