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 나아간다는 것(1)
올해로 7년째 줄리아드 음대에 재직 중인 허먼 교수는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그중에는 천재들도 있었고, 간혹 노력만으로 그 천재들의 기량을 넘어서는 이들도 있었다.
경험은 그뿐만이 아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던 것과 달리 이제 막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학생들과 함께하는 공연은 언제나 참신하기만 했다.
재밌게도 공연 때마다 특출난 인재들이 돋보이며 두각을 나타내곤 해서 그를 즐겁게 해주곤 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이 겪은 경험들은 그가 줄리아드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때문에 우편물에 적힌 주소와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자신 앞으로 온 게 맞다.
그는 악보들과 USB를 들고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지금은 6월.
오디션 기간도 아닐뿐더러, 이미 9월 학기부터 수강하게 될 신입생들도 입학이 확정된 상황.
5월이라고 해도 늦은 판에 이 시기에 이런 우편물을 받아보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달까.
대체 누군지······.
설마 이제 와서 입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대신 그 무모함에 고개가 절로 내저어질 뿐이었다.
허먼 교수는 우편물에 적힌 이름을 유심히 살폈다.
영문이지만,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이 분명하다.
그간 한국 연주자들을 몇 번이나 만나본 그였고, 그중 KIM이라는 성을 지닌 이가 있었던 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킴도쭌?”
처음 보는 이름이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니콜 교수와 만나기로 했었다는 걸 기억해낸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니콜 교수였다.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마흔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의 여교수. 길고 풍성한 금발 머리를 지닌 니콜 교수가 들어서며 물어왔다.
“아, 혹시 제가 방해가 됐나요?”
“예?”
허먼 교수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하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악보와 USB를 한차례 내려다보곤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는 악보와 USB를 한쪽으로 치우려고 했다.
가을 학기에 대해 그녀와 얘기를 나누는 쪽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콜 교수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악보와 USB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인가요?”
눈도 좋다.
치운다고 치웠는데, 그새 악보를 보곤 무슨 곡인지 한눈에 알아본 듯하다.
하긴 피아니스트치고 이 정도 눈썰미도 없을 리 없다.
“글쎄요. 조금 다른 듯한데······.”
흥미를 나타내는 니콜 교수를 보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허먼 교수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더불어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난감한 기분도.
그의 얘기를 모두 들은 니콜 교수가 눈을 빛내며 재밌다는 듯 말한 것도 그때였다.
“한번 들어나 보죠.”
“흠, 그럴까요?”
잠시 후 두 사람은 노트북을 켜고 USB를 꽃아 동영상을 틀었다.
화면 속에 한 동양인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큰 키에 제법 잘생긴 남자였는데, 조금 어려 보인다.
“기타?”
뜻밖에도 기타를 품에 안는 청년.
악보를 보곤 당연히 피아노를 치겠거니 했는데, 기타라니······.
의아함이 솟구쳤다.
그때, 화면 속에서 청년이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한데······.
두 사람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니콜 교수의 눈은 더 이상 커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도 그럴게······.
‘이게 가능해?’
보아하니 클래식 기타도 아니고, 일렉트로닉이다.
그런데 라흐마니노프를 치고 있다.
그것도 변주.
하지만, 놀람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끼어든 소리.
그건 분명 건반 소리였다.
그러나 피아노는 아니다.
헷갈릴 리가 없다.
누가 들어도 확실한 전자음이었으니까.
미리 녹음해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의 기타 연주와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
어머니의 음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주, 줄리아드 음대?”
이해한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할 테고, 생각지도 못한 얘기일 테니.
하지만, 것보다는 어머니께서 한때 진학하길 꿈꾸던 곳이란 게 더 큰 이유일 거다.
아버질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학을 갔을 거고 그랬다면 아마도 그곳은 줄리아드 음대나 예일대 쪽이 되었을 테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어머니께서 물어오셨다.
“보컬 아트를 생각하는 거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
“아직 정한 건 아니에요. 알아보는 중이랄까. 확정되면 그때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래, 아들.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
“예.”
어머니께 대답을 하곤 방으로 들어온 뒤 책상에 앉았다.
그러곤 코인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와서 음대를 가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지닌 기량은 이미 일반인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프로들조차 쫓아올 수 없을 정도란 건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음악을 다뤄온 시간이 다른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눈을 떠 기량을 닦는다고 해도 스무 살 무렵이면 어느 정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무대에 서야 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 파고들었다.
그것도 오직 한가지 목표.
노래방을 나가겠다는 생각만으로, 거의 주입식에 가까운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 기간이면 아무리 둔재라도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할 수가 없다.
하물며 난?
법대를 가겠다는 목표가 있어서 멀리했을 뿐, 원래부터도 노래를 좋아했었다. 아니,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음악 자체를 좋아했던 거 같다.
마른 대지에 비가 내린 거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오랜 기간 훈련을 통해 몸은 노래에 최적화되었고, 감각도 다듬어졌으며 지식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쌓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중심에 대중음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
물론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난 대중 가수다.
그러니 불만은 없다.
하지만, 노인을 만나면서 한가지 목표가 생겨버렸다.
뛰어넘는다.
호불호를 가리지 않는 음악.
누가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는 음악.
종국적으로는 언어 따윈 아무런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음악.
심지어는 장르는 물론이고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졌다.
아니,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데모곡을 보냈다.
지금쯤이면 허먼 교수가 보고 있을 터.
만일 내가 보낸 USB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거나 혹은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포기할 생각이었다.
겨우 그 정도로라면 이쪽에서 사양이니까.
이를테면 그쪽에서만 날 평가하는 게 아닌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가을학기부터 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니 굳이 말하면 꼭 줄리아드 음대일 필요도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좀 더 다양한 체험.
노래방에서 익힌 지식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클래식 쪽으로 눈을 돌린 것도 그 때문일 뿐.
조바심은 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날 가두어 두었던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선······.
방금 미 대사관에서 걸려온 전화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
메일이 날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을 때였다.
내용은 매우 정중했으며 또한 호의적이었다.
요약하자면,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직접 한번 보고 싶다.
픽 하고 웃고 말았다.
딱 내가 원하던 결과였으니까.
오디션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고, 9월에 개강하는 학기에 입학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가능성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면, 입학이야 내년에 해도 되는 거니까.
아무튼, 저쪽에서 연락을 먼저 준 덕분에 많은 일이 수월해졌다.
인터뷰가 잡혀 있었지만, 허먼 교수가 보내준 초대장 덕분에 금세 비자가 나왔고 고맙게도 비행기 표마저 보내주기까지 했다.
학교 차원에서 보낸 건 아닐 테니, 아마도 허먼 교수가 사비를 들인 걸 테다.
그것만 보아도 지금 그가 자신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는지 느껴졌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 약속했던 입국장으로 나가니, 한 백인 남성이 피켓을 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넉넉한 체구와 함께 서글서글한 인상. 깔끔하게 쳐올린 브라운 톤의 머리칼 때문인지 단정한 양복 차림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허먼 교수님?”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가져온 짐은 별로 없었기에 작은 캐리어 하나만 끌고 나와 물어보니, 남자가 눈을 반짝였다.
“킴도쭌?”
“맞아요. 제가 김도준이에요.”
“반갑네.”
악수를 청해오는 허먼 교수와 인사를 나눈 뒤, 움직일 때 그가 물었다.
“식사는 했나?”
“기내에서 먹었어요.”
“한창때인데, 그거론 부족할 텐데?”
깐깐하지 않은 성격인 모양이다.
말투에서부터 세심함이 느껴진다.
“괜찮아요. 아, 혹시 저 때문에 아직까지 식사를 안 하신 거에요?”
벌써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어가는 중이었다.
만일 나와 함께 밥을 먹으려고 기다렸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한 거라면 그거야말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거 같진 않았다.
허먼 교수가 미소를 베어 문 채 말했던 것이다.
“내 몸을 보게. 주유할 시간을 십 분만 넘겨도 아마도 내 왜건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말걸?”
농담을 하며 날 공항 밖으로 이끌 뿐이었다.
그리고 주차장에 도착해 보니, 그의 차는 진짜 왜건이었다.
참네, 어디까지가 농담인 건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허먼 교수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 응? 누구?
“어머, 실물이 훨씬 낫네. 손가락도 길고.”
젊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미모가 돋보이는 금발 여성이 앉아 있었다.
***
뉴욕시 맨해튼의 링컨 공연센터에 위치해 있는 줄리아드 음대, 정확히는 줄리아드 스쿨에 도착한 뒤 나는 그야말로 촌놈처럼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나를 두 사람은 말없이 바라본 채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기다려주었다.
“아, 죄송해요. 이런 데는 처음 와봐서.”
농담이 아니다.
줄리아드 음대는커녕 대학 문턱조차 넘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할 따름이었으니까.
“구경은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허먼 교수가 조금 멋쩍게 날 바라보고 있을 때, 금발 여성······. 자신을 니콜이라고 소개한 여교수가 특유의 맑은 톤으로 말했다.
“괜찮으면 연주 좀 들어볼 수 있을까?”
나는 씨익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그들을 따라간 곳은 연습실···일 거라고 짐작된다.
고급스러운 자재로 처리된 방음벽.
그 안에 놓여 있는 건 피아노와 몇 개의 의자가 다였지만, 피아노는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아니 단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빛이 나는 듯 느껴지는 그랜드 피아노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기타는 보이지 않았다.
연주를 듣겠다고 하더니······.
분명 내가 보낸 건 기타 연주였는데.
내가 의아한 눈빛을 해 보이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몇 번이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러다 결국 허먼 교수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을 때, 니콜 교수가 나섰다.
“내가 돌려 말하는 걸 잘 못 해. 솔직히 말할게요.”
“······.”
“킴이 보내준 영상은 잘 봤어. 파격적이었지. 무척 흥미로웠고 또 놀라웠지. 그래, 그걸 보고도 아니 듣고도 기대감이 들지 않는다면 음악을 때려치워야겠지. 근데, 만일 킴이 지닌 기량이 그게 다라면······.”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난 실망하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날 가만히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홀 한가운데 놓여 있는 피아노를 가리켰다.
“영상 속에선 건반 소리가 들려오던데······. 그거 킴이 친 거 맞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당연히 피아노는 칠 줄 알겠지?”
고민됐다.
왜?
칠 줄 모르니까.
아니, 이론상으론 알고 있지만, 그건 그저 이론일 뿐. 만일 누군가 신디사이저를 다룰 줄 아는데 어쩌고 한다면 진짜 무식한 소리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같은 현악기니까 기타를 칠 줄 알면 무조건 베이스를 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일 테니.
뭐, 속일 이유는 없지.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뇨. 피아노는 만져본 적도 없는데요?”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어머니를 둔 사람으로서 할 얘기는 아니란 생각과 함께, 덧붙였다.
“하지만, 칠 수는 있을 거 같네요.”
잠시 실망한 눈을 해 보였던 니콜 교수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