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91화 (91/260)

# 91

#91. 오랜만이네요(3)

뜻밖의 상황.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런 가운데, 노인이 말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앞서 갔지만, 다들 한계를 넘진 못했지.”

한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눈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귓구멍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머리는 돌처럼 굳어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말이죠?”

묻고 있는 날, 지긋이 바라보던 노인. 눈빛이 달라졌다.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고, 실망한 것도 같다.

그 눈빛을 대하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노인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는데, 이상할 만치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속에서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오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번에도 틀렸나?”

큭!

“나, 난······.”

까닭 모를 분노가 솟구쳤다.

그때였다.

턱!

누군가 내 어깨를 짚으며 외치고 있었다.

“도준아!”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고 팀장님?

“어린놈이 무슨 술을 이렇게······. 앨리사,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티, 팀장님! 그게 아니라 노인이······.”

나는 다급히 외치며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노인을 가리키며 필사적으로······.

흠칫!

노인이 아니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

눈앞에 있는 건 바텐더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분명 노인이······여기······.”

“도, 도준아!”

귓가를 울리는 외침 속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

깨어나 보니 낯선 공간이었다.

아마 호텔쯤 되지 않을까.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눈부셨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난 분명히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왜 취한 거지?

아니, 그전에 그 망할 노인네는 하필 그 타이밍에 나타난 걸까?

설마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혹시 꿈이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데?

한숨을 내쉬며 곱씹었다.

노인이 남기고 간 말들을.

“······한계를 넘진 못했지.”

한참 뒤, 나는 중얼거렸다.

“난 달라!”

꾸욱.

손이 말리며 주먹이 쥐어졌다.

그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아플 정도로.

***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거듭해서 얘기하는 앨리사.

- 설마 18살이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얘기했다.

“아뇨. 제 실수죠.”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몇 번이나 설명해도 다들 믿어주지 않는 상황.

하긴 누가 봐도 그 상황은 술 취한 모습이었으니까.

더구나 칵테일 잔이 비어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아무튼, 상황이 그렇게 된 건 내 잘못이 맞으니까.

오히려 사과는 내 쪽이 해야 하는 거겠지.

“것보다는······.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누구나 가정사를 털어놓는다는 건 어려운 일. 특히 친하지 않은 사이라면 더더욱.

어쩌면 그래서 그런 건가?

아무튼, 이번 일로 한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니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이 내게 바라는 것.

아직도 왜 하필 나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느껴진다.

- 도준. 미국에 오면 꼭 연락해요.

“그럴게요.”

- 그리고······.

“······?”

- 언제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응? 이건 또 무슨?

- 아, 몰랐어요? 저도 싱어에요.

아! 그랬지.

피는 못 속인다고, 앨리사 마리 역시 가수란 걸 잊고 있었다.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함께 노래해요.”

- 기대하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죠와도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고 팀장님과 함께 출국장으로 향했다.

“진짜 연락 안 할 거냐?”

다시금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얘기했다.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다는 듯 고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저녁 7시다.

“괜찮냐?”

고 팀장님은 아직도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진짜 안 마셨다니까요.”

“알겠다.”

고 팀장님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귀신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그 노인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쓴웃음을 지으며 걷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그보다 더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공항 내 비치되어 있는 대형 TV에서······.

“어!”

준영이 형이 ‘섹시해서 미안해’를 부르고 있었다.

아, 진짜 미안해진다.

저걸 보는 사람들한테.

어쩌지, 내 눈?

눈만 아니라 뇌까지 썩는 거 같다.

저 형이 미쳤나?

마, 망사 옷이라니.

거기다 두 손으로 온몸을 훑으며 웨이브를······.

미치겠다.

형! 그건 섹시한게 아니라 더러운 거라니까!

그리고 저 표정은 또 뭐냐고.

눈은 왜 또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아니 씨그릿걸즈 멤버들도 그래.

왜 저 장단에 맞춰주는 건데.

마치 홀린 듯한 표정으로 다가서다가 준영이 형이 손을 내저을 때마다 나가떨어지는 퍼포먼스는 뭐냐고!

아이고야! 신 났네, 신 났어.

며칠이나 됐다고, 저렇게 달라지는 건지.

얼굴에는 ‘나 지금 미치도록 즐겁거든?’하고 쓰여 있는 거 같다.

처음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굴더니, 지금은 물 만난 고기처럼 굴고 있다.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무대가 다 좁을 판이다.

기가 막혀서 핸드폰을 꺼내 기사를 검색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게 있어서 터치해보곤 할 말을 잃어버렸다.

모 신문사와 한 인터뷰였다.

[음악에 한계는 없다는 걸 알려준 도준에게 감사한다.]

뭐야, 이거?

정체성을 깨닫기라도 한 건가?

이러다가 형이 아이돌 그룹이라도 결성하는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다.

기사 아래 달린 댓글들이 내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해준다.

- 헐! 사람 버렸네.

- 지금 댄스곡 무시하는 겁니까? 확실히 버렸네.

- 다들 뭐하는 거에요! 교주님께서 아름다운 도전을 하시는 거 안 보입니까? 흑, 교주님 진짜 왜 그러세요.

- 아무래도 노준영,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듯.

- 김도준이 원흉이다. 김도준을 찬양하라!

- 갓준은 마왕도 변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신급과 왕급의 격차!

- 노준영. 이러다가 댄스 가수 되는 거 아닐까요?

- 그럼 안됩니까? 본인도 말하잖아요? 음악에 우위 같은 건 없다고.

- 대단하긴 하네요. 저 나이에 댄스곡이란 것도 그렇고, 그걸 또 저만큼 즐기는 것도······. 역시 난 사람은 난 사람.

- 근데, 이번 일의 진정한 수혜자는 씨크릿걸즈 아님?

음, 그건 또 생각 못 했네.

아닌 게 아니라, 준영이 형만큼이나 씨크릿걸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히 떠버렸다.

하긴, 지난 연말 콘서트 이후로 그런 기미가 보이긴 했었지.

아무튼, 섹시······. 아니 더티 댄스를 추고 있는 준영이 형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다 창피해져서 누가 볼세라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

‘섹시해서 미안해’가 3주째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동안, 송 감독님의 영화 ‘죽지 않는 도시’가 마침내 관객수 천만을 돌파했다.

덕분에 OST로 쓰인 내 곡들도 차트에 무사히 안착.

워낙 이슈가 된 탓인지 준영이 형에게서 1위 자리를 뺏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2위부턴 내 곡들이 싹 쓸어버린 상태.

하긴, 요즘 들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말이 ‘노준영이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라는 얘기니까.

뭐, 상관없지.

어차피 내가 쓴 곡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형이니까.

시작이야 어떻게 되었든, 형이 즐거워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곤 차마 말 못하겠지만.

“마음을 굳힌 거냐?”

고 팀장님께 보고를 듣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아저씬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왜 그런 결정들을 내렸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내가 내린 결정들을 지지해주었을 뿐이다.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요.”

누구에게?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에게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눈을 빛내자, 아저씬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서류 준비하마.”

다시 한 번 알겠다고 말하곤 일어섰다.

그리고 대표실을 빠져나오기 전 돌아보았다.

“아저씨.”

“······.”

“제가 늘 감사한 거 아시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자식하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는 아저씨.

나 역시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한 뒤 밥을 먹고 나면 곧바로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연습실은 방음처리가 확실했기 때문에 작업을 진행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처음 다뤄보는 기계들인지라 조금 헤매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감을 잡고부터는 문제없이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곡을 쓰고, 녹음하고······.

며칠이 지났을지 모를 정도로 집에만 틀어박혀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길 얼마나 흘렀을까.

날짜감각마저 무뎌졌을 때,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잠시 말없이 악보들을 내려다보다가 데모곡이 저장된 USB와 함께 봉투에 넣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 길로 집을 나서 우체국으로 간 뒤, 특급 해외 배송으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이 두근거렸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점심 무렵이었다.

아버지와 형은 이미 출근한 뒤였고,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느닷없이 말씀하셨다.

“딱 이맘때였던 같네.”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머닐 바라보자, 어머니께선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가 이내 날 기특하단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학교 그만둔 걸 후회하진 않니?”

아! 그러고 보니······.

벌써 6월이다.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자퇴를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에이, 저 아시잖아요?”

“알지. 우리 아들, 대단한 거.”

“어머니도 참. 그 정도는 아니고요.”

어머닌 날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아니. 엄마한텐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아들이야.”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그런 내게 어머니께서 다시 물어오셨다.

“그래도 속은 좀 상하네.”

“······?”

“고등학교 시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한 게 아닌가 해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솔직히 아쉽지도 않고.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무얼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생 길잖아요.”

또다시 대견하다는 날 바라보시는 어머니.

살짝 멋쩍어져서 뒷머리를 긁다가 내친김에 말씀드렸다.

“저 대학 가려고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만큼 기대하고 계셨다는 얘기일 터다.

“어머, 아들. 진짜 잘 생각했다. 인생 멀리 봐야지. 노래도 좋지만, 또래들이랑 어울리면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야. 안 그래도 네 아버지랑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그래, 어디로 갈 거니? S대? Y대?”

“아뇨, 그게 아니라······.”

결정되면 그때 말씀드리려고 미뤄놓고 있던 건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얘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응?

모르는 번호다.

어딜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아! 예. 제가 김도준인데요.”

역시나 기다리던 전화다.

“예.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어로 대화를 하다가 전화를 끊는 나를 어머니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셨다.

그런 채로 눈빛으로 묻고 계셨다.

어디서 온 전화이기에 그렇게 받느냐고.

왠지 타이밍을 놓친 느낌이긴 한데······.

하는 수 없지.

말씀드렸다.

“대사관이요.”

“대사······관? 그게 무슨 얘기니? 대사관은 왜?”

의아해 하시는 어머닐 보고 있으니 괜히 죄송스러워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말씀드릴걸.

아니,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상관없나?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인터뷰 날짜 잡혔다네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하신 어머니.

내가 말했다.

“저······.”

“······?”

“줄리아드 음대 가려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