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 오랜만이네요(1)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곤 핸드폰 화면에 닿을 듯 눈을 가져갔다.
“음···.”
확신할 수가 없다.
너무 흐릿해서 이게 진짜 코인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설사 코인이라고 쳐도, 새겨진 하프 그림이 윤곽만 보이는 정도라 내가 생각하는 그 코인이 맞는지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느낌이 그랬다.
천 년 노래방.
거기에 쓰인 코인은 아니지만, 같은 종류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이거 제대로 좀 볼 방법이 없나?
잠시 고민하다가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곤 핸드폰으로 보던 사이트로 접속했다.
모니터 화면으로 보니 그나마 좀 낫다.
여전히 흐릿하긴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은빛.
코인···맞다.
다만, 하프가 새겨진 게 맞는지, 그 문양이 내가 알고 있는 그 하프 모양이 맞는지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책상 서랍을 열자, 코인 네 개가 보인다.
오랜만에 보니 새삼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동시에 천안문 광장 공연에서 보았던 노인의 얼굴도.
코인 하나를 꺼내 들고서 화면과 대조해가며 고민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젠장!
그런다고 흐릿한 화면이 선명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형이 들어왔다.
“도준아, 너 어제······.”
화들짝 놀란 나는 화면에 띄워놓았던 브라우저를 다급히 끄며 외쳤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들어오고 그래?”
“어?”
“노크! 노크 몰라? 남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해야지!”
“우리가 언제······. 흐음?”
형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채로 모니터 화면과 날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자식.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뭐, 뭐가!”
“크큭. 우리 도준이 다 컸네.”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형.”
“······?”
“사진 확대하는 방법 알아?”
“응? 확대? 그야, 그냥 두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면······.”
“아니, 그런 거 말고. 작은 사진을 크게······. 그러니까, 흐릿한 걸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방법 모르냐고.”
형이 잠시 날 빤히 바라보다가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흐. 모자이크냐?”
“모자이크?”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방금 형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곤 왈칵 소리쳤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화를 내? 그러니까 더 수상한 데?”
피식거리며 옆으로 오더니 날 밀어내며 자리에 앉는 형이었다.
“어떤 사진인데?”
“응? 음······.”
잘하는 짓일까?
고민하다가 아까 접속했던 사이트를 띄워 보여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네? 그래서 이거 어딜 확대해서 보고 싶은 건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형한테 코인의 존재를 알려줘도 되나 싶어서.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봐도 모를 거다.
설사 내가 천 년 노래방 얘기를 해준다고 한들 믿을 거 같지도 않고.
“여기.”
우두둑.
형이 손가락 마디를 꺾어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 형님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그렇게 형은 어딘가에서 포토 줌 어쩌고 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다운받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한 번만 쓰면 되니까, 굳이 살 필요는 없고. 이렇게 시험판으로 설치하곤······. 자, 이제 설치됐으니까, 어디 한번 볼까? 우리 동생이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지?”
몇 번인가 마우스를 클릭하고, 또 창 옆에 떠있는 설정 값을 만지자 확대한 사진이 선명해졌다.
“······!”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삼켜졌다.
“이 정도면 됐냐? 혹시라도 말해두는 건데······. 영화에서처럼 하는 건 무리야. 뭐, 과학수사대? 그런데 가면 또 모를까.”
그럴 필요 없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식별이 가능했으니까.
코인 맞다.
노래방에서 보았던 하프 문양이 화면 위에 떡하니 떠 있었다.
***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서 인터넷을 뒤졌다.
다른 코인, 혹은 하프 문양이 찍힌 사진이 없나 해서.
음악 한정이라지만, 내가 아는 가수 이름을 비롯해 노래 제목까지 온갖 검색어를 동원해 샅샅이 뒤져나갔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결국, 저녁때가 되어서야 포기했다.
아니,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대신 방향을 바꿨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트럭 운전사였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갑자기 노래를 시작해 음반을 내고 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그의 딸에 대한 얘기들도.
앨리사 마리 프레슬리.
엘비스 프레슬리와 프리실라 프레슬리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
아무래도 이렇게 앉아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여자의 사진을 보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
“야! 이거 진짜 해야 하냐?”
준영이 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날 쳐다보고 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사람이 살다 보면 약속을 못 지킬 때도 있······.”
“해! 해! 한다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고함치는 형을 지나가던 카페 직원이 흘깃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이 형은 똥 씹은 얼굴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형.”
“······.”
“화났어요?”
“누가 화났다는 거야!”
화났네.
아니, 삐친 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나랑은 눈도 안 마주치려는 형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때였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액정을 바라보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요? 들어오시면 돼요. 안쪽으로 보면······. 아, 보이네요!”
손을 흔들자, 입구 쪽에서 여자들이 쪼르르 달려온다.
하나같이 예쁜 여자들.
그것도 늘씬하고 기럭지가 우수한 여자들이 들어서자 카페 안에 얼마 없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여자들이 나란히 선 채 준영이 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씨크릿걸즈입니다!”
그 순간, 준영이 형의 표정이 달라졌다.
***
회사로 들어가기 전 까똑이 날아들었다.
- 근데, 진짜 괜찮냐?
쓴웃음이 나왔다.
벌써 몇 번째인지.
그렇게 티가 나나?
아까 준영이 형이랑 만났을 때부터 듣던 얘기······.
-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봐. 세상일 모르는 거다. 진짜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가는 수가 있어요.
- 예. 형. 그럴게요.
물론 그럴 마음은 없다.
대신 아저씨랑 할 얘기는 있었지만.
“응? 노준영 씨 만난다며?”
“지금 보고 오는 길이에요.”
마루 누나가 화사하게 웃고 있는 걸 보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아저씨는요?”
“대표님? 안에 계시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뭐 좀 상의 드릴 게 있어서요.”
“그래?”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시선을 돌리던 누나가 느닷없이 물어왔다.
“무슨 걱정 있니?”
“예?”
“아니.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어제 잠을 좀 설쳤더니 그런가 봐요.”
거짓말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 잠이 오면 더 이상한 일이지.
씁쓸하게 웃어 보이곤 대표실로 들어갔다.
등 뒤로 마루 누나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
송 감독님의 영화가 개봉했다.
‘죽지 않는 도시’
시사회는 일찌감치 끝냈고 영화관계자들도 호평 일색이었기에 한껏 기대를 모으는 중이었다.
특히 OST 작업에 내가 참여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송준익 감독 신작 ‘죽지 않는 도시’ 개봉. 비평가들과 대중 모두 칭찬 일색. 심상치 않은 출발.]
[영화 ‘죽지 않는 도시’ 흥행 조짐.]
[‘죽지 않는 도시’, OST 작업에 김도준이 참여한 걸로 알려져.]
[개봉 첫주 200만 돌파. 흥행 돌풍 예고.]
좀비가 나오는 영화라서 사람들이 좋아할까 미심쩍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단순히 잔인하고 자극적이지만은 않고, 송 감독님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적절히 녹아 있다는 평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스크린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흥행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덕분에 OST도 화제가 되었다.
또다시 내 이름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짙은 유리알, 얼굴의 반은 가린 선글라스, 깃이 목을 넘어 턱까지 올라오는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날 알아보지 못한다.
그 덕에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공항 곳곳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오는 것을.
화면 아래쪽 정중앙에 떠 있는 노래제목을 보곤 키득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섹시해서 미안해.’
노래 노준영/작곡 김도준/작사 조마루.
준영이 형 얼어붙은 것 좀 봐라.
데뷔하는 것도 아니면서 완전 굳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역시 프로는 프로인가?
전자음 가득한 반주가 빠른 템포로 흘러나오자, 준영이 형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른 살도 넘어 이제 곧 마흔 살이 되는 형이 추기엔 다소 무리인 춤이다.
연습 많이 했나 보네.
꽤 추잖아?
컨셉이 문제지만.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기 시작하자 방청석 곳곳에서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도 하다.
몸을 더듬어가며 격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느낌의 댄스를 추는 데뷔 16년 차 가수. 발라드 황제로 불리는 준영이 형이 몸을 사리지 않고 투혼을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노래를 시작하면서 뒤에서 뛰쳐나온 씨크릿걸즈가 합세하자, 방청석이 뒤집어졌다.
뿐만 아니라 내 주위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대형 TV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이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이들도 전부 걸음을 멈추고 TV를 보면서 다들 한 마디씩하고 있었다.
“풉! 저거 뭐야?”
“노준영, 미쳤나 봐!”
“그래도 꽤 잘 추는 거 같은데?”
“씨크릿걸즈랑 묘하게 잘 어울리네.”
“크크큭. 진짜 반전이다.”
“근데, 이 곡 김도준이 만들어줬다고 하던데?”
“아! 그거! 왜 있잖아! 만점 내기. 원래는 람보르기니 사주기로 했는데, 저걸로 퉁 쳤다고 하더라.”
“돈 대신 몸으로 때우는 거네!”
“오올! 노준영, 이렇게 보니까 은근 섹시한데?”
“꺅! 지금 봤어? 웨이브···완전 징그러워!”
“어머 얜! 귀엽기만 하구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으며 핸드폰을 켜고 기사들을 검색했다.
아직 방송이 나가는 중이라 그런가 기사들은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당당하게 올라간 이름.
노준영이라는 세 글자를 보면서 결국 웃음을 흘리고 말았을 때였다.
“수속 끝났다. 들어가자.”
언제 다가왔는지, 고 팀장님이 기내 수화물을 끌며 날 바라보고 계신다.
“같이 안 가셔도 되는데······.”
“대표님 말씀 못 들었어?”
처음 미국엘 간다고 하자, 아저씬 당연히 브라이언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그냥 여행이나 좀 다녀오려 한다고 둘러대자,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셨던 아저씨.
대신, 혼자서는 안된다고 못 박으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경호원을 둘만 붙여주었다는 점.
거기에 고 팀장님이 함께 간다는 게 조건이었다.
나로서는 부담스럽기만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라는 게 있으니까.
게다가 아저씨께서 콕 집어 고 팀장님에게 동행하도록 한 건······.
“팀장님이 유학파였다니, 좀 의외네요. 근데, 왜 그동안 말씀 안 하셨어요?”
고 팀장님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말씀하셨을 뿐이다.
“중간에 때려치운 게 뭐 자랑이라고.”
그러곤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시는 고 팀장님.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졌다.
“얼른 들어가자. 괜히 비행기 놓치면 낭패다.”
“예.”
뒤따르며 물었다.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만날 수 있을까요?”
“누구? 앨리사?”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고 팀장님이 입꼬리를 희미하게 움직이셨다.
지금 웃고 계시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일을 때, 고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째선지 자신만만한 표정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