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 쉴 때가 더 바쁜 법이다(4)
올겨울은 유독 추웠다.
몇 차례인가 폭설이 내렸고, 그 때문에 도로가 막히거나 산간지방이 잠시간이지만 고립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추위는 막바지까지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3월이 다 되어서도 한파는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다.
그래도 끝내 겨울은 가고 봄은 찾아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간간이 악기도 다루면서 작곡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공부도 좋지만, 음악에 대한 감을 잃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물론 제일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은 공부였다.
시험답안을 알고 있지 않은 한 만점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뭐, 그러고 저러고 간에 시험에 떨어질 거라곤 눈곱만치도 생각지 않았지만.
“집 좋지?”
어머니 말씀대로였다.
인테리어를 마친 집은 정말 훌륭했다.
하긴,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는데.
그래서 그런가 내가 팔짱을 끼고 집안을 둘러보는 내내 어머니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형도 마찬가지.
자기 방을 무슨 카페처럼 꾸며놓고선 흐뭇해 하는 중이었다.
아버지께서도 별말씀은 안 하셨지만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고 계셨다.
나?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방도 방이지만, 지하 공간에 만들어진 연습실과 녹음실이 진짜 마음에 들었다.
이제 집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작업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집안, 정확히는 지하공간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눈을 빛내는 날 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선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
준영이 형과의 약속대로 뮤직 스테이션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출연하는 중이었다.
그때마다 늘 형과 투닥거렸고, 팬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내 모습에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동안 딱히 신비주의로 나간 건 아니었지만, 워낙 나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어서 그런지 그들 눈에는 내가 소탈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도 방송이 재밌어서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달리 세 달가량 출연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형의 졸업식이 있었고, 그날 외할아버지께서 오시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 후 우리 형님께선 계획대로 PS 엔터테인먼트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로드매니저로 시작한다고 하던데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형이라면 잘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전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예.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도준 군이 우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지 못하······.”
“그만 좀 하죠? 무슨 신파극도 아니고. 저 죽으러 갑니까?”
“야, 이 형님이 한창 분위기 잡는데 그렇게 초를 쳐야 시원하겠냐? 그리고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 아냐? 여러분도 보이시죠? 이거 다 어쩔 거야? 여기 엿 공장 차렸어? 전국의 엿이란 엿은 싹 다 긁어서 보냈나? 핫팩도 그래. 이 정도 양이면 평생 써도 다 못쓰겠네. 와, 진짜 팬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교주님께서 그런 얘기하시면 신도들이 섭섭해할 텐데요?”
“아! 그런가? 아무튼 간에······. 시험이 이번 주 토요일이죠? 도준 군 자신 있습니까? 설마 똑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오오. 자신감 쩔어. 너 그러다가 답 밀려 쓰고 울지 마라. 아, 그렇다고 해서 봐주진 않겠지만. 이래 봬도 내가 또 칼 같은 데가 있거든. 보이냐? 채팅 창에 글 달리는 거? 흐흐흐. 걱정 마세요. 여러분. 도준 군은 우릴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잘 보란 거예요, 못 보란 거예요?”
“거야······. 잘 보란 거지. 99점? 딱 그만큼만 맞고 와. 그리고 뮤직 스테이션에 붙박이 게스트가 되는 거지. 응응. 그게 네 운명이야. 이제 받아들이렴.”
장난스럽게 말하는 형을 보면서 웃고 말았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컷! 컷! 이 자식이 누가 네 마음대로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어!”
그렇게 말하는 준영이 형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덕담을 해주는 형이었다.
“진짜 만점 받길 기원합니다. 갓준! 이 형은 널 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가서 네 실력을 보여주는 거야! 근데, 다시 올 거지?”
***
4월 7일.
검정고시가 치러졌다.
아침 아홉 시부터 시작해 네 시가 다되어서 끝이 난 시험.
워낙 이슈가 되어서 그런가 방송사에서 촬영을 나오기도 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고, 모든 시험을 치르고 나오며 핸드폰을 켜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메시지와 까똑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모든 걸 싹 다 무시하고 일단은 부모님께 먼저 전화 드렸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실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외할아버지께도 전화 드렸다.
“수고했다.”
짧게 한마디 하셨을 뿐,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아저씨와 회사 식구들 그리고 준영이 형을 비롯해 석준 등 지인들에게 연락했다.
다들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말끝엔 약속이라도 한 듯 몇 점이나 받은 거 같으냐고 묻고들 있었다.
점수?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답안지를 잘못 작성하지만 않았다면 내 예상대로일 거다.
굳이 답까지 맞혀볼 필요도 없었다.
못 푼 문제는 없었으니까.
- 뭘 그렇게 숨기는 건데? 창피해서 그래? 어? 그런 거야?
준영이 형이 수화기 너머에서 도발을 해오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듯 말하고 있는 걸 들으며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몰랐어요? 이미 발표 났어요.”
- 어? 어···. 그, 그래?
“요샌 전자시험이라 바로 채점 된데요!”
- 헉! 그래서 몇 점인데?”
“아시면서 뭘 물어요?”
잠시 말이 없는 준영이 형.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람보르기니는 잘 탈게요, 형.”
이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 준영이 형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걸려왔지만, 싹 무시하자 결국 까똑이 날아들었다.
- 야이! 씨! 어디서 개 뻥을! 심장마비 오는 줄 알았잖아!
- 결과 발표일은 5월이라며!
- 아, 까딱하면 파산하는 줄 알았네.
- 아무튼, 수고했다.
대화창 아래, 엄지를 쳐들고 있는 곰 한 마리가 촐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맞다. 그냥 준영이형 한 번 놀려 본 거다.
***
팬 카페에 들러 그동안 응원해준 팬들에게도 감사하다고 짧은 멘트를 남긴 후, 느긋한 생활을 즐겼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난 뒤 회사로 나갔다.
“수고했다.”
음, 누가 보면 내가 어디 전쟁에라도 나갔다 온 줄 알겠다.
솔직히 검정고시는 날 위해 본 건데, 이게 수고했단 말을 들을 일인지.
살짝 의아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다들 날 생각해준다는 거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뭘요. 남들 다 치는 시험. 좀 더 일찍 치른 거뿐인데요.”
대한민국에 매년 대입을 위해 시험장에 들어가는 수험생들이 몇 명이던가.
뭐, 그들과는 사정이 다르긴 해도,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오히려 남들 다 하는 거 조금 앞당겨서 한 것뿐인데, 어쩌다 보니 되게 유난을 떤 거 같아서 민망하달까.
“이제 어쩔래?”
아저씨께서 담담한 얼굴로 묻고 계셨다.
“글쎄요.”
“대학은 갈 거냐?”
“아직 결정한 건 없어요.”
내 대답이 뜻밖이었던 걸까?
아저씨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당연히 S대에 시험을 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래. 급할 거 없지. 천천히 생각해라. 그동안 공부하랴, 라디오 출연하랴,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을 텐데 컨디션부터 되찾는 게 좋겠지. 차라리 이 기회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던가.”
“그것도 괜찮네요.”
“오케이. 그럼 그렇게 알고 한동안은 스케줄 잡아놓지 않을 테니까, 몇 달은 쉬는 걸로 하자고. 됐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아, 말해준다고 하고서 깜빡했네.”
“······?”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말은 안 했는데, 미국에서 낸 음반 말이다.”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에 또 무슨 일인가 살짝 걱정하고 있는데, 아저씨께서 씩 하고 웃으신다.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은가 보더라.”
“그래요?”
의외였기에 되묻자, 아저씨께서 얘기하셨다.
“그렇다고 너무 들뜨진 말고. 그냥 조금씩이나마 팔리고 있다는 거니까.”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전 그냥 묻혀버릴 줄 알았거든요.”
“설마. 거기도 사람 사는 덴데. 좋은 노래는 누가 들어도 좋은 거 아니겠냐?”
입꼬리를 살짝 비튼 채 눈을 빛내시는 게 어째 의심스럽긴 한데,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얘기해주실까 싶어서였다.
***
아버지와 형이 휴가를 받기가 좀 어렵긴 했지만, 아저씨의 권유대로 가족들과 함께 땅끝마을을 시작으로 해안을 돌면서 열흘간 여행도 다녀오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희주를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월 8일.
진짜 황당하다.
전날 지하 연습실에서 작업을 하느라 새벽에 자는 바람에 조금 늦게 일어났더니 이미 내 점수가 온 세상에 다 알려져 있더라는······.
[김도준, 검정고시 만점.]
[음악 천재는 공부도 잘한다?]
[김도준에게 벌써부터 손짓하는 대학들.]
[검정고시 만점자 김도준의 행보가 궁금하다.]
인터넷에 뜬 기사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참네. 이래서야 점수를 확인해볼 필요도 없겠네.
네티즌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지 게시판마다 난리다.
- 김도준, 그는 진정 갓인가?
- 갓준이 괜히 갓준이 아닌 거죠.
- 그래도 그렇지. 공부까지 잘하는 건 반칙이지.
- 역시 주니 오빠! 아, 진짜 너무 완벽한 거 아님?
- 그나저나 노준영 어쩔?
- 폭망.
- 지금쯤 멘탈 나가지 않았을까?
- 요즘 람보르기니 얼마나 하나요?
- 소형차 타는 서민은 모름.
- 지하철 타는 뚜벅이는 모름.
- 방바닥에 뢴트겐만 찍는 집돌이는 모름.
- 그냥 억수로 비싸다는 것만 알면 됨.
- ㅋㅋㅋ 노준영 잠수 타야겠네.
- 어디로요? 이미 전 국민에게 공표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 해외도피?
상황이 재밌긴 하지.
다들 즐겁다는 듯 웃고 떠들며 사태를 주시하는 듯하다.
나 역시, 피식거리며 게시글들을 하나하나 읽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곤 씨익 웃고 말았다.
“아, 형.”
- 추, 축하한다.
준영이 형이었다.
“고마워요.”
- 그, 그렇지? 나밖에 없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근데, 형.”
- 으, 응?
“람보르기니 모델들 살펴봤는데요. 전 우라칸 퍼포만테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사례라도 들린 듯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킥킥거리며 말했다.
장난은 이쯤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난이에요.”
- 야, 무슨 그런! 내가 인마, 동생 차 한 대도 못 사줄 정도로 가난한 줄 알아? 사! 사! 사! 람보르기니든 맥라렌이든 소나타든.
마지막에 이상한 게 붙은 거 같은데.
“저 진짜 차에는 관심 없어요.”
잠시 말이 없던 형이 되물었다.
- 저, 정말?
“그렇다니까요.”
가슴이라도 쓸어내리는지 들려오는 한숨 소리.
- 자식이. 형이 한 대 사준다니까······.
“괜찮아요. 그건 됐고요. 대신 저 형한테 바라는 게 하나 있는데요.”
- 응? 뭔데?
“별거 아니에요. 제가 형을 위해서 작곡해놓은 게 하나 있거든요.”
- 오! 그래? 어떤 곡인데?
누가 가수 아니랄까 봐서.
눈을 반짝이는 게 보이는 듯하다.
“제가 형 노래 좋아하는 거 아시죠?”
- 흐흐흐. 알지. 네가 좀 네가지는 없어도, 이 형에 대한 존경심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건 알지.
“근데, 형 노래 안 하신 지 좀 됐잖아요. 그래서요.”
- 그래, 그래. 그래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불러야지. 네가 원한다면 발가벗고 춤추면서 댄스곡을 부르라고 해도 부른다! 그러니까······.
“약속하신 거죠?”
- 도준아. 네가 형을 너무 물렁하게 보는 거 같은데. 잘 들어라. 이 형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알잖니? 네가 진짜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런 거지. 봐라. 오늘도 이렇게 전화한 거. 람보르기니 주문하기 전에 네가 어떤 모델 좋아하는지 물어보려고 딱 전화했다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요. 그럼, 언제 만날까요?”
- 내일? 아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따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
“예. 그럼, 그때 만나서 자세한 건 말씀드릴게요.”
- 오케이! 형이 진짜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더없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 준영이 형.
몇 시간 뒤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곤 아까 보다만 게시글들을 읽었다.
끝도 없이 올라는 기사들과 게시글들을 읽는 재미도 꽤 쏠쏠하달까.
그렇게 한참 동안 서핑을 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노래방에 갇혀 있을 때, 와이파이가 터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백 수천 번도 더 생각했던 게.
진짜, 사람은 문명의 이기를 떠나선 살 수 없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내친김에 그때 보고 싶었던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 여기구나. 비틀즈가 처음 공연했던 곳이.”
그렇게 한동안 파도를 타듯 음악 관련 자료들을 보고 있던 나는 한순간 눈이 커지고 말았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
그리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진을 확대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데뷔전, 그러니까 트럭운전사 시절 찍은 사진이었는데, 트럭에 기대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의 뒤쪽, 트럭 안에······너무도 익숙한 하프 무늬!
“코, 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