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 쉴 때가 더 바쁜 법이다(3)
“안녕하세요. 김도준입니다.”
가볍게 내 소개를 하자, 준영이 형이 눈짓으로 카메라 쪽을 가리킨다.
아, 이거 보이는 라디오라고 했지.
나는 시선을 돌려 카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준영이 형이 깔깔 웃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도준 군과는 제법 친하거든요. 원래 끼리끼리 놀잖아요? 뭐, 도준 군이 저보다 쪼금 못생기긴 했지만요. 와, 이거 봐. 채팅 창 불났네, 불났어. 나도 저맘때는 한 인기 했거든. 농담이 아니라 그땐 이 얼굴이 대세였다니까!”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준영이 형. 진짜 방송을 쥐락펴락하는 게 베테랑답다.
“크크크. 웃자고 한 얘기였고요. 아마 지금쯤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혹은 보고 계시는 분들께선 의아하실 겁니다. 워낙 이 친구가 방송가에는 두문불출하니까. 근데,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으니······. 훗, 우리 피디님 제 덕분에 계 탄 거죠. 원래 도준 군이 저랑 방송하기로 했던 건데, 이렇게 또 약속을 잘 지키는 후배라니까요.”
“형, 그래도 이건 좀 아니죠. 방송 한 번! 이라고 제가 분명히 말했던 거 같은데.”
“하루 10분.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달. 다 합쳐봐야 40분이잖아? 그렇게 따지면 방송 1회 분량도 안 되는구먼. 뭐가 문제야?”
이미 이 얘긴 방송 들어오기 전에 끝낸 거였지만,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기도 했고 장난기도 동해서 대들었다.
“진짜, 이러실 거에요? 그럼 저도 다음 콘서트 때는 한 곡씩 네 번. 투어할 때 함께 다니자고 할까요?”
“오올. 선배한테 말하는 거 봐. 크크큭. 오케이. 제대로 셈만 쳐주면 난 어디든 가. 그게 딱 내가 원하는 거야. 콘서트 풀로 안 뛰고 한 곡씩만. 덕분에 여행도 하고. 좋네, 뭐.”
역시 말싸움에선 밀리지 않는 형이다.
뭐, 여기까진 농담이었고.
분위기는 제대로 띄웠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준영이 형이었다.
“그럼 우리 도준 군을 왜 불렀냐? 간단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후배님을 위한 필승전략이랄까요? 예, 예.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공부! 혼자 하면 더럽게 힘들죠. 지루하고 짜증 나고 지치죠. 근데 그걸 이렇게 함께하면?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는 거.”
“저 혼자 해도 잘할 수 있는데요.”
“봐봐. 저러니 내가 안심이 돼, 안돼?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일단 매회 테스트 문제가 나갈 건데요. 그때 도준 군이 일주일간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그럼, 오늘은 가볍게 한번 가볼까요? 도준 군의 실력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문제 주세요!”
스텝들 중 하나가 판넬을 들고 들어왔다.
8절지 만한 크기의 판넬이었는데, 거기엔 수학문제가 적혀 있었다.
그걸 들어서 카메라에 비춘 뒤, 내게 내미는 준영이 형.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말했다.
“풀어보시죠, 도준 씨. 어디 전교 1등 했다던 실력 한번 보자고요.”
픽 하고 웃어 보였다.
그러곤 수학문제가 적힌 판넬을 훑어봤다.
고3 문제치곤 조금 어렵긴 하네.
미분이었는데 그래도 뭐 못 풀 정도는 아니고.
풀이용으로 쓰라고 가져다 놓은 A4용지 한 장을 가져와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막 문제 풀이에 들어가는데, 준영이 형이 얘기한다.
“아, 진짜 도준 군이 여기 처음 나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문제 푸는 건 쉬지 않으면서 대꾸했다.
“몇 달 안 된 거 같은데요?”
“그래도 해가 바뀌었잖아. 그럼 오래된 거지.”
또다시 낄낄거리던 준영이 형이 급 진지해지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때, 뭐 이런 애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나 하고 충격먹었다니까. 신인이라고 하더니 노래를 진짜 와······. 근데 알고 보니까, 그게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거지. 연주하지 못하는 악기도 없어, 작곡 실력도 장난 아냐. 그러고 보니 표절 시비 사건 생각난다. 크크크크.”
“아, 집중이 안 되잖아요. 일부러 그러는 거죠?”
“저 김도준 군. 이거 방송인데? 그렇게 성격 다 드러내면 팬들 다 떨어져 나간다? 응? SIDE B씨?”
도발하듯 물어오는 준영이 형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자요.”
“응? 왜 못 풀겠어?”
“아뇨. 다 풀었는데요.”
“헐!”
준영이 형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부스 밖을 쳐다보며 피디에게 물었다.
“이거 난이도 A라면서요?”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피디.
“자신만만하게 내미는데, 한번 보자고요.”
준영이 형이 건네준 종이를 받아 밖으로 가져나간 스텝. 잠시 후 오케이 사인을 보내온다.
“맞다고요? 와, 장난 아닌데? 정답이라네요.”
“좀 더 어려운 문제는 없어요?”
“오오. 재수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거 몰라? 너 그러다가 검정고시 똑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럴 일 없어요.”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잖아? 알아보니까 한 과목이라도 60점 이하면 떨어지는 거라던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한 거 아닌가? 게다가 반년도 더 쉬었고. 그럼 쉽지 않을 텐데? 좋다! 붙든 떨어지든 평균 70점 이상만 받으면 형이 거하게 밥 한 번 쏜다.”
“어? 저 만점 받을 건데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준영이 형. 농담인 줄 아나 보다.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자, 자들 들으셨죠? 우리 도준 군이 방송을 안다니까요. 그럼요. 그렇게 나와야죠. 봐! 당장 청취율 뛰는 거?”
“저 방송하곤 안 친한데······.”
“아냐, 아냐. 넌 딱 방송 체질이야. 어허! 어디서 말을 돌리려고. 좋습니다. 이 분위기 살려서 딜 한번 하도록 하죠. 만점 못 받으면 어떻게 할래?”
“음······.”
“쫄리면 죽고.”
“방송에서 그런 말 써도 돼요?”
“안되면 잘리는 거지, 뭐. 그런 걱정은 마시고요. 설마 이제 와서 흐지부지 넘어가겠다는 건 아니겠죠? 도준 군?”
제대로 도발을 해오고 있는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는 있네.
이런 방송이라면 계속해도 나쁘진 않겠다.
그래도 한 달 이상은 무리겠지만.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도준 군입니다. 말해놓고 보니 아차 싶은 거겠죠. 이래서 사람은 말조심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쯤 되면 봐주고 싶기도 하지만, 본 디제이는 가차 없죠. 만점 못 받으면 뮤직 스테이션 고정 출연하는 걸로. 오케이?”
부스 밖에선 피디가 연방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고, 스텝들도 좋아죽는다.
준영이 형도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꾹 참고 있었고.
거기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질 생각도 없었고.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근데, 제가 만점 받으면 형은 뭐해주실 건데요?”
“야야, 말만 해. 차 사줄까? 그래, 차 좋네.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사줄게. 만점만 받아오면 내가 람보르기니라도 사준다.”
“저, 면허 없는데요?”
“그럼 모셔놨다가 면허 따고 타면······. 자식 봐라. 꼭 자기가 이긴 것처럼 구네. 우리 방송 고정 청취자가 10만 명이 넘거든? 이분들 다 증인이야. 빼박인 거지. 오케이, 이제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인정?”
씨익.
내가 웃자 흠칫하는 준영이 형.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그렇게 내기는 성립됐다.
계약서?
그런 게 왜 필요해?
팬들과 청취자들이 다 듣고 다 봤는데.
“흐흐흐. 이 기회에 세상의 쓴맛을 보게 해주지.”
악마처럼 웃으며 준영이 형이 말했다.
“근데, 이거 어쩐다? 생각보다 빨리 풀어버려서······. 일단 어떻게 풀었는지 좀 들어볼까요?”
그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제 풀이과정을 보여주었다.
잠시 후, 준영이 형이 다소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까, 그 제안 말인데 무르면······.”
“안돼요.”
단호한 한마디에 부스 밖은 물론이고 채팅 창도 난리다.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을 때, 준영이 형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얘기했다.
“자, 그럼 시간도 남는데 도준 군의 노래나 한 곡 들어보도록 하죠.”
“그런 얘긴 없었······.”
“너 여기서 데뷔했지? 그럼 여긴 네 고향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겨우 노래 한 곡 못 들려준다고? 와, 진짜······.”
“해요. 한다고요.”
나는 부스 밖을 향해 외쳤다.
“여기 기타 좀 주세요.”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근데, 꼭 해장국 시키는 거 같다?”
또다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고 있었다.
***
딱 10분 출연했는데, 청취율이 역대급으로 나왔단다.
내가 깜짝 게스트로 출연한 것도 있겠지만, 누가 뭐래도 준영이 형의 그 엄청난 입담이 한몫한 거겠지.
역시 베테랑이 다르긴 다르다.
덕분에 또다시 내 이름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갔다.
기사들도 쏟아져 나왔고.
[김도준, 검정고시 만점 선언.]
[선후배 간의 오가는 정 속에 감춰진 신경전.]
[김도준 뮤직 스테이션 고정 출연 확정?]
팬들을 비롯해 네티즌들도 신나서 떠들어댔다.
다들 당연히 내가 질 거라고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ㅋㅋㅋ 김도준 어떻게 하냐? 완전 감긴 거 같은데.
- 혹시 알아요? 만점 받을지.
- 그럼 노준영, 람보르기니······. 헐!
- 만점, 쉽지 않습니다. 검정고시라고 문제 수준이 낮기만 한 건 절대 아니거든요.
- 운전면허시험도 만점 받기 어려운데.
- 이번엔 김도준이 무리수를 둔 게 아닌가 싶네.
- ㅠㅠ 도준 오빠, 왜 그러셨어요. 저희야 매주 오빠 얼굴 봐서 좋긴 하지만.
-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1년 동안 오빠 얼굴 실컷 보자!
- 그럼 우린 도준 오빠, 내기에서 지는 것만 바래야겠네요.
- 근데, 저런 식의 내기······. 문제 안 되나?
- 뭘요. 사행성도 아니고. 적절히 수위 조절하겠죠.
- 순진들 하시네. 저거 다 쇼에요. 이미 말 다 맞춰 놓은 거죠.
내가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하는 게 기정사실처럼 되어버린 상황.
심지어는 희주마저 그렇게 생각하는듯하다.
“괜찮겠어?”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 다 선글라스를 쓴 채 음료수를 마시는 중이었다.
뭐, 서울 외곽에 있는 카페인지라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터다.
나야 상관없는데, 희주 사진이 지난번처럼 SNS에 떠도는 건 그다지 마음에 안 들어서.
“걱정은 무슨. 만점 받으면 되지.”
“······하여간 속을 모르겠다니까.”
“속? 얘 봐라.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밝히······. 큼!”
무슨 말인가 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희주.
귀엽기도 하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방학인데 어디 안 가?”
“안 그래도 독일에 한번 다녀올까 해.”
“독일? 거기 누가 있어?”
“응. 사촌 오빠. 별건 아니고 예전부터 삼촌이 오라고 하셨거든. 어릴 때부터 나 굉장히 예뻐해 주셨던 삼촌인데······.”
집 안에 딸이라곤 하나밖에 없다 보니, 희주를 온 가족들이 다 예뻐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넌 아무 데도······. 아, 수험생이지.”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함께 가고 싶었던 건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해주었다.
“다음에 같이 갈 기회가 있겠지.”
내가 한 말이 뭐가 그리 좋았던 걸까?
시무룩해졌던 희주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께서 물어오셨다.
“아들, 요즘 희주 자주 만나네?”
“그러게요.”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형이 툭 끼어들었다.
“저 자식은 꼭 저러더라. 지금 네 얘기 하는 거거든!”
예. 예. 형님께선 즐톡이나 하시죠.
“밥은 먹었니?”
“예. 먹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희주랑?”
응? 어머니 표정이 뭔가 미묘한데······?
입가에 희미한 미소도 머금고 계신다.
어째 조금 창피해져서 얼른 몸을 돌렸다.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요.”
“아무리 피곤해도 샤워는 하고 자.”
어머니 말씀에 알겠다고 대답하곤 재빨리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책상에 앉아 픽 하고 웃었다.
웃기게도 집에서는 다들 별말이 없다.
온 세상이 다 내가 만점을 받을 건가 말까로 시끌시끌한데, 아니 당연히 내기에서 질 거라고들 생각하는데 우리 집 식구들만 천하태평이다.
형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니 그렇다 치고,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철석같이 믿고 계신 거겠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내가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에 비해 준영이 형은 당연히 내가 만점을 못 받을 거라고 믿는 눈치고.
다시 생각하니까 웃음이 난다.
좋아.
내기에서 이기면 뭘 해달라고 할까?
람보르기니?
그런 건 필요 없다.
만일 필요하면 내 돈으로 사면 그만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긴 했지만, 이것도 기회라면 기횐데······.
그렇다고 이런 일로 준영이 형을 이용해 먹을 생각 따윈 눈곱만치도 없다.
형도 아마 반쯤은 장난일 테고.
역시 이벤트는 이벤트로 끝나야겠지.
단, 흐지부지는 안되지.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아! 그렇게 하면 재밌겠다!
나는 오선지를 꺼내 연필을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준영이 형이 한국에선 그래도 발라드의 황제라고 불리지 아마?
넥스타를 비롯해 자신만의 밴드도 몇 번이나 꾸렸었고, 하드락에서 메탈락까지 했었던 걸로 안다.
그러면, 댄스는 어떨까?
“크크큭.”
격렬하게, 열정적으로······.
안무까지 제대로 맞춰서.
어디 한번 보자고.
발라드 황제께서 미친 듯이 춤추며 댄스곡을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신바람이 나서 나도 모르게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