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 카르페 디엠(2)
아, 놀라라.
근데, 나 지금 왜 놀라고 있는 거지?
살짝 어이가 없어져서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였다.
희주가 날 보며 흠칫하다가 수줍게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색해 돌아가시겠네, 진짜.
그나저나 쟤가 원래 저런 얼굴이었나?
아니 얼굴도 얼굴이지만 분위기가······.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긴 어려운데,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 사뭇 다르다.
그렇다고 뭐가 많이 바뀐 건 아닌 거 같은데······.
묘하게 느낌이 달라졌달까.
그러면서도 날 대하는 건 또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기야 희주를 오랜만에 본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
지난번 외할아버지 팔순 잔치 때도 보았고, 그게 아니라도 그녀를 본지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한데도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더니. 이것도 그런 건가?
하긴 진짜 오랫동안 붙어 다니긴 했지.
진짜 꼬꼬마 시절부터 나만 보면 졸졸 쫓아다니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늘 내 옆엔 희주가 있었더랬다.
나도 모르게 옛날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이 외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있다.
나 역시 얼른 상념에서 벗어나 인사했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눈이 많이 왔다는 걸 감안해 하신 말씀이실 터다.
“자주 보는 거 같군. 그동안 잘 지냈나?”
정 회장은 아버질 비롯해 가족들을 한차례 보고는 내게 시선을 던지며 물어오셨다.
푸근한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묻어난다.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다고나 할까.
역시 세계적인 기업을 이끄는 수장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그렇다고 기죽을 이유는 없지만.
“예.”
대답하면서도 의아함을 지울 수 없다.
아니, 그러니까 왜?
S그룹의 총수가 여길 왔냐고!
외할아버지 팔순 잔치 때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오늘은 아니잖아?
작은 외삼촌 생일.
참석한 사람은 가족들하고 그룹의 직원들 몇 사람, 그리고 작은 외삼촌의 지인들 몇이 다다.
한데, 그 한가운데 떡하니 정 회장이 있다 보니 분위기가······.
뜬금없기는 말할 것도 없고, 손녀딸까지 데려와서인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다들 의아한 눈빛이다.
작은 외삼촌은 그래도 자기 생일에 어마어마한 거물이 참석했다고 생각하는지 연방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반면 큰 외삼촌은 얼굴이 썩어 있다.
게다가 저 자식······동갑내기 사촌인 최석진은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희주를 한 번씩 힐끔거린다. 그러면서 질시의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나와 희주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저러는 걸 테지, 아마.
아무튼, 황당하긴 한데 이게 또 나만 그런 게 아닌 듯하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모두가 은근슬쩍 정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외할아버지를 제외하곤 다들 당황스러운 기색.
하기야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은 아니지.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였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눈길을 느끼곤 멈칫하고 말았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
“아, 안녕.”
살짝 떨리는 음성.
긴장했는지 희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다가 외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런 점에선 나도 마찬가지랄까.
미처 인식도 못 하는 사이 손이 올라갔다.
미쳤네.
지금 뭐하는 짓인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 진짜 어색하네.
그 어색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정 회장과 외할아버지가 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뭐냐고.
이 분위기······.
괜히 긴장되잖아.
목구멍까지 넘어왔던 말들을 삼키곤 그저 한차례 웃어 보이곤 돌아섰다.
가족들을 따라 자리에 앉는데, 형이 불쑥 물어온다.
“희주네 할아버진 왜 오신 거래?”
그걸 알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어디 다리 위에서 자리를 깔아도 벌써 깔았지.
“햐아, 근데 희주 많이 컸네.”
힐끔거리지 좀 말지?
안 그래도 희주랑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데.
그때, 어머니께서도 한마디 거드신다.
“그러게. 희주도 다 컸네. 요만해가지고, 우리 도준이 쫓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호호호.”
아버지께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양념치듯 말씀하신다.
“딸이라······. 좋겠네.”
“저런 며느릴 보면 되죠.”
그러면서 두 분이서 은근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
아, 씨! 진짜 못 앉아 있겠네.
진짜 오늘 분위기 왜 이러냐?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너 어디가?”
눈치 없는 형이 물어오기에 냅다 대답했다.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어? 아······. 그렇지.”
형이 주춤거리며 일어서는 걸 보면서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희주는 할아버지가 무작정 가자고 하시기에 따라왔다가 놀라는 중이었다.
남들이야 할아버질 보고 철혈이네 뭐네 하면서 두려워하는 모양이지만, 자신한테는 더없이 잘해주시는 분이 또 할아버지셨으니까.
둘이서만 좋은데 가서 식사를 한다거나 뮤지컬을 보는 등 자신과 함께 하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었고, 오늘처럼 첫눈이 온다거나 하는 날이면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억지로라도 그녀를 챙기시곤 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도 당연히 그러실 줄 알았지.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하기에 어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단출하게 둘이서 식사나 할 줄 알았는데······.
한데 막상 할아버질 따라와 보니까, H 호텔 레스토랑이다.
그것도 입구에 걸어놓은 팻말을 보니까, 가게를 아예 통째로 전세를 낸 모양.
그리고 최 회장······. 그러니까 도준의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갓집 식구들과 그 외에 몇 안 되는 사람들만 있는 걸 보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로 할아버질 따라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들어서는 순간 레스토랑 안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도준이 외삼촌 생일인 듯했다.
희주는 어째서 도준의 외삼촌 생일날 할아버지가 여길 왔는지, 그것도 자신을 데려왔는지 의아해 하다가 이내 뭔가를 깨닫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미 두 분 사이엔 약속이 돼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희주까지 함께 올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도준의 외할아버지는 뜻밖이란 눈빛이 되었다가 이내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줄곧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희주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눈빛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그런 상태로 그녀는 할아버지와 도준의 외할아버지가 한자리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할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면서도 가끔 한 번씩 자신을 바라보는 도준의 외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눈빛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서너 홀만 돌아도 힘이 부치긴 하더구려.”
“그러게요. 거참, 그것도 운동이라고······. 그저 걷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벅차니. 확실히 예전 같진 않지요.”
그렇게 두 분이서 한창 사업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골프 얘기로 옮겨가 말씀을 나누고 계시던 도중이었다.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는 최 회장 때문에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몰라 하던 희주가 그 눈빛을 피해 시선을 막 돌렸을 때였다.
‘아!’
도준이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홀 안으로 들어서는 도준을 보게 되니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까닭 모를 기대감이 들면서 자꾸만 손에 땀이 차길 시작한다.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번에도 보긴 봤었다.
최 회장의 팔순 잔치 때.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그때도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도준은 끝끝내 자신을 봐주질 않았었다.
오늘도 그런다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을 때, 도준이네 식구들이 다가왔다.
희주는 얼른 일어나 도준의 부모님께 다소곳이 인사를 드리곤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하, 진짜······. 바보 같아.’
기껏 한다는 말이 안녕···이라니.
어른들께 인사를 하곤 자신에게 한차례 손을 흔들어 보이곤 돌아서 멀어져가는 도준.
그런 도준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좋으시겠습니다. 도준 군 같은 손자를 두셔서.”
“한참 모자란 녀석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뿐이지요.”
“빈말이 아닙니다. 도준 군 덕분에 이번 시즌 전자 쪽 매출이 최고치를 경신할 것 같다고 하더이다.”
“아, 그렇습니까? 녀석이 도움이 됐다고 하니, 다행이군요.”
두 분의 얘기가 어느새 도준에게로 옮겨간다 싶더니만······.
“글쎄요. 이 나이를 먹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듭디다. 자식이라고 다 가업을 이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안 그래도 저 역시 요즘 그런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자식한테 뭔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 아닐까 하고. 때로는 그저 지켜봐 주면서 말없이 응원해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희주는 사업에는 일절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저 평범하게 행복하길 바라는 할애비의 마음이랄까요. 허허허.”
말끝에 은근슬쩍 도준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모습.
그 눈빛이 꼭 ‘저 정도면 차고 넘치는 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모습에 최 회장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면서 희주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다 들킨 것만 같아서.
그때였다.
도준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 먼저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좀 더 있다가 가질 않고서?”
“그······. 야, 약속이 좀 있어서요.”
어째 말을 더듬는 게 몹시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그런 손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최 회장이 알겠다고 말하자, 도준은 어른들께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자신에겐 시선 한번 안 준 채로.
그게 못내 서운했던 걸까.
희주는 결국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그런 자신을 할아버지가 불편한 시선으로 보다가 도준을 바라보는데······.
못마땅하단 표정이 역력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준은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도준의 등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눈길을 돌린 희주.
까똑!
희주의 핸드폰이 울린 것도 그때였다.
도준 덕분에 미묘하게 불편해진 분위기에서 울린 탓인지, 희주는 놀란 얼굴이 되어 얼른 톡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 환하게 피어났다.
마치 꽃이라도 피듯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며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죄송한데, 저 먼저 가봐도 될까요?”
“응?”
느닷없는 얘기에 놀랐는지, 할아버지가 뭐라 대꾸하질 못할 때 희주가 다시 말했다.
“야, 약속이 생겨서요.”
잠시 희주를 가만히 바라보는 할아버지.
“아까까지만 해도 그런 얘기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대뜸 묻는다.
“큼, 약속이라······ 혹시 도준 군이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주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자리를 뜨는 희주였다.
그 모습을 보던 두 사람, 정 회장과 최 회장이 서로를 쳐다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미쳤다,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카똑창을 보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 영화 볼래?
- 밑에서 기다릴게.
- 싫으면 그냥 가고.
이게 무슨······.
하! 정신 차려보니 이 지경이다.
들어갈 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더니만,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안 오면 어쩌려고······.
아, 진짜 쪽팔려서 앞으로 어떻게 보냐?
톡 옆에 떠 있는 1들이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답톡은 오지 않고 있다.
젠장!
더도 덜도 말고 10분. 아니 15분만 기다려보고 안 오면 그냥 가야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까똑!
- 지금 내려가.
굳었던 얼굴이 사르르 풀리며, 가슴에 얹어져 있던 돌덩이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털썩.
화단의 벽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다 콜린 때문이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