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 카르페 디엠(1)
첫눈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빡빡 우겨대고 있었다.
첫눈이라고.
인구 천만이 넘는 도시.
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도 그다지 밀리지 않는 도시인 서울. 이곳에는 수많은 연인들이 있었고, 그 연인들은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 첫눈이 오는 날 만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도 매년.
그리고 올해의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고 우겨대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 강원도 산간 어딘가에서 눈이 내렸음에도.
그건 라디오에서도 마찬가지.
아마 각 방송사의 디제이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어디까지나 밖을 볼 수 있다는 전제하의 얘기지만, 아무튼 빌딩 숲 위로 펄펄 내리는 흰 눈을 보면서 다들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첫눈이 내린다고.
그리고 기가 막힌 우연인지는 몰라도, 어제 음원 사이트에 곡 하나가 올라왔더랬다.
‘눈이 내리면’이라는 노래가.
작곡 김도준, 작사 김도준, 연주 김도준, 노래 김도준.
이번 노래도 도준이 작사해서 그런가 곡이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노래는 대박을 쳤다.
노래 자체도 좋았지만, 시기도 기가 막혔으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김도준이 불렀으니 더 이상 말하면 입만 아플 터였다.
그렇게 출시되자마자 음원 사이트 랭킹 1위에 올라버린 노래는 다음날, 그러니까 오늘, 눈이 내리는 서울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
고등학교에 올라온 지도 벌써 1년이 지나버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 사이 엄청 많은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아닌 도준에게.
늘 그랬듯,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도준이 자신의 생일날 신들린듯한 기타 연주를 하더니 갑자기 학교를 그만둬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두 달인가?
그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도준의 노래가 폭탄처럼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아마 그가 광안리 썸머 페스티벌에서 노래하는 영상이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은 N9 광고를 찍었고, 신기술로 무장한 휴대폰에 대한 호기심과 도준의 엄청난 노래 실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말 그대로 한국을 집어삼켰다.
그때쯤, 중국이 도준으로 인해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으로 날아간 그는 이제 아시아의 별이 되어 있었다.
수첩에 적어보면 몇 줄 되지도 않는 그의 행보였지만, 이걸 실시간으로 옆에서 지켜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그녀로선 아찔할 지경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녀는 손을 뻗어 눈송이를 만져본다.
첫눈인데······.
언제까지나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없다.
그것도 엄청 멀리 가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희주가 한숨을 내쉬자, 서연이 안타깝다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러곤 속으로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자신은 절대로 짝사랑 따윈 하지 않겠다고.
“그나저나 오늘 좀 늦네?”
원래대로라면 그녀들을 데리러 오는 차들이 와도 벌써 왔어야 하는데, 그새 눈이 제법 쌓여서인지 도로가 많이 막히는 모양이다.
“곧 오겠지.”
두 사람은 교문 앞에 나란히 서서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하교하는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고 있었고.
여학생들은 여학생들대로 동경하는 눈빛을, 남학생들은 남학생들대로 연모의 눈빛을.
그런 그들에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희주야, 나 어쩌면 유학 갈지도 몰라.”
느닷없는 서연의 얘기에 희주가 흠칫 놀란다.
도준이 자퇴하고 난 후 그나마 이 학교에 마음 붙이고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서연이 덕분이었는데······.
“그, 그래? 어디로 갈 건데?”
“영국 쪽이 될 거 같아. 언니가 거기 있거든.”
“아, 맞다. 서진 언니 거기 있지.”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의 인생에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곤 해도 섭섭한 건 섭섭한 거였다.
이렇게 하나둘 멀어져간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애당초 여기로 오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준을 따라 여길 오려고 그렇게나 고집을 피웠었는데, 그게 다 말짱 헛짓거리였던 거 같아서 마음이 쓰라렸다.
“이번 노래도 좋네.”
서연의 말에 희주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도준의 노랫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었다.
어제 발표된 노래였다.
‘눈이 내리면’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두고 지금 인터넷은 뜨겁게 달궈진 상태다.
어떻게 보면 시답지 않은 이유였는데, 다름 아니라 이 노래가 캐롤이냐 아니냐를 두고 네티즌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 희주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지만.
그저 도준의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라도 들을 수 있다면 충분하니까.
더구나 이상하게도 이번 노래는 들을 때마다 묘하게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도준과 처음 만났던 다섯 살 무렵부터 초등학교 때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나 할까.
그때였다.
리무진 한 대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스르륵 미끄러지며 그녀들의 바로 앞에 와서 멈춰 섰다.
“아, 나 먼저 갈게.”
희주를 데리러 온 차였다.
“응. 내일 봐.”
서연에게 인사한 희주가 차에 올랐다.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할아버지?”
***
딱히 노린 건 아닌데, 될 놈은 되나 보다.
아니 노렸다면 노린 건가?
확률상의 문제이긴 한데······.
요즘 예보가 잘 맞네.
눈이 온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펑펑 쏟아질 줄은 몰랐다.
“레퍼토리 이렇게 구성했는데, 괜찮지?”
마루 누나가 건네는 종이를 받아 한차례 훑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콜린이었다.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레이크헬의 앨범에 들어가는 곡 중 두 곡에 피처링으로 들어갈 부분을 녹음했고, 내친김에 송 감독님 영화에 들어갈 곡들도 전부 녹음을 마쳤다.
그리고 콘서트 준비가 한창이었다.
며칠 내로 홈페이지에 공지도 띄우고 대대적인 홍보도 시작할 예정이었다.
“연말까진 도준이 네 노래가 계속 음원 차트 1위 하겠다.”
마루 누나가 팬 카페를 둘러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까지 바란 건 아닌데, 그렇게 됐네요.”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거 캐롤 맞지?”
캐롤이라니까, 그러네.
“왜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되묻자, 누나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니 곡조는 분명 캐롤 풍인데, 희한하게 발라드스럽달까. 분명 경쾌한 느낌인데 왜 그럴까?”
“그럼 그냥 발라드 캐롤이라고 하죠, 뭐.”
뭐가 웃긴지, 내 말을 들은 마루 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만치 앉아서 작업 중이던 고 팀장님도 입매를 살짝 휘어 보이고.
“근데, 참 이상한 게, 이번 노래는 듣고 있으면 어릴 때 생각이 나고 그러네?”
그럴 수밖에.
그걸 담은 거니까.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어쩜 그렇게 딱딱 알아맞히는 걸까?
따지고 보면 가사는 별거 없는데······.
눈이 오는 걸 바라보면서 산타클로스를 믿었던 순진무구한 시절을 생각한다는, 그러면서 올해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크리스마스엔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했다.
노래 말미에 이르러 잊고 있었던 사람에게 연락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서 그런가?
그래서들 캐롤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긴 한데, 이 곡을 쓸 때 이상하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그 때문에 발라드처럼 느껴지는 건가?
그데, 진짜 왜 그랬던 거지?
왜 갑자기 희주 얼굴이 떠올랐던 걸까?
아마 콜린 때문이지 싶은데.
망할 자식.
나이 많은 게 자랑인가.
사람 마음에 비수를 팍팍 꽂아놓고는 낄낄거리던 콜린, 아니 레이크헬 멤버들을 생각하자 지금도 부아가 치민다.
뭐, 덕분에 내가 당면한 문제를 알게 되긴 했지만.
그건 그렇고······.
나는 핸드폰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면서 한차례 희주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눈이 와서 그런가.
아니면, 이놈의 노래를 만들 때 걜 떠올려서 그런가, 이상하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그렇다고 뜬금없이 전화하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지.
난 픽 하고 웃고는 말했다.
“저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좀 들어가 볼게요.”
“응응. 내일 봐.”
마루 누나가 손을 흔들어주고, 고 팀장님은 눈을 맞춰 인사를 대신해주신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곤 회사를 나왔다.
***
경조사가 많기도 하지.
외할아버지 팔순 잔치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작은 외삼촌 생신이시란다.
덕분에 이렇게라도 가족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거지만.
아무튼, 아버지가 모시는 차에 타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형이 보조석에서 쉴 새 없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톡을 주고받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물어오셨다.
“이제 괜찮은 거지?”
아,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 거람.
아무래도 어머닌 내가 천안문 광장 공연 도중 쓰러졌었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다.
“아시잖아요? 요즘 아침저녁으로 운동하고 있는 거. 이제 체력이 달려서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에요.”
“그럼 다행이고.”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 아니라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이시네.
씁쓸하게 웃다가 문득 떠올라서 여쭤봤다.
“우리 이사 갈까요?”
“응? 이사?”
“예. 전부터 어머니, 정원 딸린 집에서 살고 싶어 하셨잖아요.”
“얘는 서울에서 그런 집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
“이번에 돈 많이 벌었잖아요.”
“그건 나중에 너 장가갈 때······.”
나도 모르게 헛숨이 나오고 말았다.
어머니도 참.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게다가 결혼하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다고.
그때 앞쪽에 앉아 있던 형이 물어왔다.
“얼마나 벌었는데? 한 10억 정도 벌었냐?”
이번엔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나지만, 형도 형이다.
경제관념 제로네, 진짜.
“지난달에 들어온 거까지 하면 대충 300억 조금 넘을걸?”
갑자기 기침을 해대는 형이었다.
그런 형은 그냥 놔두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재테크라고 생각하고 괜찮은 집으로 하나 구해보죠? 아니면 이참에 건물이라도 사두거나. 혹시 알아요? 나중에 땅값 확 뛸지?”
혹하신 눈치다.
어머니께서 눈을 반짝이신다.
“그럴까?”
반쯤은 넘어온 거 같아서 다시 말했다.
“그냥 그러지 말고, 둘 다 사요, 둘 다. 올해 가기 전에 들어올 돈을 생각하면 그래도 될 걸요? 이참에 집도 한 채 사고, 건물도 한 채 사면 되죠.”
어머니 표정이 백화점에서 마음에 꼭 드는 신상품을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 되는 걸 확인하며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룸미러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나는 덧붙였다.
“아버지 차도 한 대 사죠. 벤틀리 어때요?”
“크음. 아비가 돼서 사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아들 돈을······.”
“마음에 안 드시나보다. 그럼 마이바흐 어때요?”
“······!”
말씀은 안 하시는데, 눈빛이 흔들리시는 게 좋으신가 보다.
“나, 나는?”
형이 끼어들기에 가볍게 한마디 해주었다.
“하긴 형도 졸업하면 차 한 대 필요하겠다.”
“흐흐흐. 난 그냥 경차라도 괜찮아.”
응?
웬일이래?
벤츠 정도가 아니면 싫다고 하지 않을까 했더니······.
속으로 의아해 하고 있을 때였다.
“작은 차는 작은 차대로 좋거든. 너무 좋은 차는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어째 눈빛이 불순해 보이는데?
뭐, 그럼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가족들이 다들 좋아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럼 된 거지.
누군가 그랬잖아?
돈 벌어 뭐하냐고.
소고기 사 먹어야지.
***
레스토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족들과 함께 실내로 들어가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뭐지?
S그룹 정 회장?
왜 저분이 여길 계시는 거지?
외할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 회장을 보며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정 회장 옆에 앉아 있던 희주가 얼굴을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