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 이렇게 부른다(4)
할 말이 없다.
여긴 미국이랑 다르다는 식으로 변명을 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괜히 더 구차해질 것만 같아 관뒀다.
괜히 사춘기라는 게 있는 게 아니니까.
결혼도 아니고 그저 사랑······. 그게 아니라도 이성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라면, 내 나이 또래에서 충분히 경험할만한 일이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자, 유진을 비롯해 레이크헬 멤버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되어 킥킥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망할!
불쾌하다기보단 쪽팔렸다.
꼭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그래서인지 두 볼이 다 뜨겁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콜린이 확인사살을 해왔다.
“쯧, 사랑은커녕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나 보네. 그럼 당연히 이별도 안 해봤을 거고, 질투심도 모르겠···.”
- 그건 아니지. 질투는 연애감정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잖아?
- 그렇지. 아무리 도준이라도 그 정도는 알 걸?
이쪽 사정 따윈 봐주지도 않고 푹푹 찔러 들어온다.
젠장! 생각해보니, 이제껏 누굴 질투하거나 시기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노래방에 갇히기 전에는 그때까지 세워놓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느라.
그 이후에는 노래에 미쳐 사느라.
뭐야? 이거?
나 그동안 뭘 하고 산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꼭 내가 모지리 같잖아?
나사 몇 개 빠진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한숨이 절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콜린이 가슴에 난 상처를 후벼 파기 시작했다.
“도준. 감정에는 플러스만 있는 게 아니잖아? 마이너스도 존재한다고. 우린 그런 감정들을 소리에 담는 사람들이고. 그렇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레이크헬 멤버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 걱정 마! 내가 끝내주는 여자애를 알고 있거든? 스물한 살인데, 몸매도 장난 아냐! 그러니까······.
- 풋! 설마 디알로의 눈을 믿는 건 아니겠지? 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미국으로 건너와. 그럼 내가 너한테 딱 맞는 파트너를 준비해줄게. 그날로 넌 사랑이 뭔지 알게 될 거야!
- 웃기고들 있네. 도준이 지금 여자가 없어서 그러겠냐? 지금 한국 아니 중국에만 가봐라. 도준의 말 한마디에 치마끈을···.
- 워워! 거기까지! 더 들어가면, 데미지가 너무 클 거 같은데?
얄미운 유진. 그 한마디가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걸······. 저 자식 알고 있는 거군.
살짝 얼굴을 돌린 채 웃음을 참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런 내 어깨에 콜린이 손을 얹으며 물었다.
“이젠 뭐가 문젠지 알겠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쿨하게 인정했다.
“그러네. 그냥 이 작업은 포기해야겠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설마하니 내가 그렇게 얘기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당장 사랑을 할 수도 없는 거고. 누구 말처럼 질투를 해본 적도 없어서 말이야. 그러니 어쩌겠어? 그렇다고 감정도 안 담긴 노래로 사람들을 기만할 수는 없는 거잖아.”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곤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튼, 고맙다. 이 자식들아! 지금 내 처지를 명명백백하게 깨닫게 해줘서!”
뒤에서 삐쳤네 뭐네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싹 다 무시해버렸다.
뭐, 삐친 건 아니지만, 기분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
사실상 내 전용 공간이나 다름없는 연습실을 벗어나고 나니 휴게실이라는 이름의 담배 피우는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곳밖에는 갈 곳이 없었다.
그곳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하아, 어쩐지 인생 참 쉽다 싶었다.
노래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잘 풀린다는 게 이상하더라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 복병이 숨어 있을 줄이야.
“확 그냥 삐뚤어져 버릴까 보다.”
농담이 아니었다.
어차피 건실하게 학교를 다녀야 하는 입장도 아니고, 아직 미성년자라는 사실만 빼면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여러모로 상황은 더 좋잖아?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사지육신 멀쩡하고, 무엇보다 한창 열정에 불타오를 나이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생긴 것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고.
게다가 제롬이 말했던 것처럼 날 좋아해 줄 여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참에 클럽도 다니고 술도 마시고 이 여자 저 여자······. 음, 생각해본 것만으로도 한심하네.
쯧, 김도준. 정신 차려라.
본질은 그게 아니잖아?
내가 아직 어린 탓에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인데, 왜 자꾸 본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냐고.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문이 스르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아직 더 남은 게 있었냐?”
유리창에 비친 덕분에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콜린이란 걸 알기에 물은 터였다.
콜린이 픽 하고 웃고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다.
그러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커피를 홀짝거렸다.
믹스 커피 중독자 같으니라고.
보통 이럴 땐 맥주를 마시면서 너도 한 모금 할래? 뭐 이런 대사를 던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커피, 너희 할아버지께서 만드시는 거라며?”
졸지에 우리 외할아버지를 바리스타로 만들어버린 콜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별거 아냐. 커피 맛있다고.”
뭘 잘못 먹었나? 아니 마셨나 싶었다.
아, 이렇게 얘기하면 외할아버지께서 싫어하시려나?
그때, 콜린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어 올리며 얘기했다.
“내 생각에는 아마 너희 할아버지께서도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든다는 거.”
진짜 어지간히 믹스 커피에 빠져 있구나 생각했다.
외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저 자식을 광고모델로 추천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콜린이 다시 얘기했다.
아니 물었다.
콜린은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 진심으로 맛있다는 듯 호로록 마시며.
“근데, 아냐?”
“······?”
“이 커피 같은 거지. 늘 마실 수 있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것도 누군가에겐 특별한 것처럼,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게 당연하지 않아지는 순간이 있는 거지.”
“······.”
“벽이지.”
순간 멍해졌다.
나 지금 벽에 막힌 거였어?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그저 아무리 고민해도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지 않아서 짜증이 좀 난 거였을 뿐.
근데, 그걸 콜린은 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콜린이 쐐기를 박고 있었다.
“그걸 쉽게 넘든 어렵게 넘든, 너 하기에 달린 거겠지.”
내가 지금 당면한 문제가 단순하지만, 전혀 단순한 게 아니란 걸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고민은 이어졌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송 감독님이 부탁한 작업이야 포기한다손 치더라도 문제는 그다음이다.
콜린의 말마따나 쉽게 넘어가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아!”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느껴진 답답함.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서 방을 빠져나왔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집안은 고요하다.
되도록 식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밖으로 나온 나는 이렇다 할 목표 없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아우, 바람이 뭐 이리 차?
며칠 전에 강원도에서 눈이 왔다더니,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좀 더 두껍게 입고 나올 것을.
뒤늦게 후회를 하면서 걷고 있을 때였다.
“거봐요. 재밌다고 했잖아요. 근데, 아직 그 정도로 놀라면 안 돼요. 그거 끝에 가면 진짜 장난 아니거든요.”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슬며시 다가가 보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 실루엣이 딱 우리 형님이시다.
아니 저 인간이 왜 저기에 있는 거람?
춥지도 않나?
야심한 밤에 집 놔두고 바깥에서 뭔 짓거리를 하나 싶어서 다가가다가,
흠칫!
멈춰 서고 말았다.
형님이 킥킥거리며 말하고 있었으니까.
“소연 씨도 참······.”
소, 소연 씨?
느닷없이 들려온 이름에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미리 얘기하면 재미있겠어요? 흐흐흐. 궁금해도 참아요. 그렇다고 미리 보지도 말고. 아, 진짜. 저 믿고 보라니까 그러네요. 응응. 저야 좋죠. 근데, 우리 이번 주말엔 어디 갈까요?”
얼씨구.
뭘 저렇게 사근사근 얘기하나 했더니만······.
동생은 벽인지 뭔지에 막혀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우리 형님께선 목하 열애 중이구나.
와 씨! 생각해보니까 좀 열 받네.
형 같은 사람도 연애를 하는데······.
아니, 아직 그 단계까진 아닌가?
아무튼, 소연 씨란다.
지금 통화 중인 소연 씨가 그 소연 씨라면······.
뭐야 이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받는다더니.
아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기가 막힌 얼굴이 되어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희한하게도 형을 보고 있으니, 지금의 내 상황이 별거 아니란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형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갑자기 모든 문제가 가볍게만 느껴졌다.
***
밤새 고민한 결과,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간단했다.
할 수 있는 거만 하자.
세상에는 억지를 부린다고 될 일이 있고, 안될 일이 있는 거잖아?
이래 봬도 노래방안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세월을 보낸 나였다.
그래 봐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나날을 반복했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송세월만 한 건 아니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어?
그 세월을 나이로 환산하면, 아마 지구 상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젠장!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이만 처먹었지 철딱서니가 없다고 하는 말이 딱 들어맞는 케이스잖아.
책상 앞에 앉아서 코인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동전 한쪽 면에 새겨져 있는 하프 그림을 보면서 떠올렸다.
천안문 광장에서 날 보며 입만 벙긋거리던 노인의 얼굴을.
분명 그때 노인은 그렇게 말했었지.
즐거우냐고.
씨익.
즐겁냐고?
영감탱이가 어디서 약을 팔아!
그 안에서 갇혀 산 세월이 얼마인데······.
거기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다!
그런데 즐겁지 않을 까닭이 어디 있겠어?
아니지. 이 정도로 즐겁다고 말하면 거길 빠져나오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게 아깝지.
그러니까······. 진짜 즐겨주지.
벽?
웃기지 말라고 해라.
그냥 경험이 부족한 거뿐이잖아?
콜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어디서 잘난 듯한 표정을 짓고서 그따위 소리를.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
급할 건 하나도 없는 나이.
그렇다면······.
차라라랑.
코인들을 한데 모아 손에 쥐고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다음날, 회사에 오자마자 대표실을 찾았다.
“송 감독님이 아쉬워하겠는걸?”
아저씨는 내가 건네는 USB를 챙기면서 말씀하고 계셨다.
“그래 봐야 두 곡이에요.”
“그래도 그쪽 입장에서는 아쉽지 않겠어? 전곡을 다 네가 만들어주길 바랐을 텐데.”
“세 곡도 적지는 않은 거 같은데요?”
“빠진 곡 중에 한 곡은 메인이잖아.”
“그렇다고 제 마음에도 들지 않는 곡을 넘겨주는 건 절대 싫어요.”
“뭐, 이해는 한다만.”
“송 감독님 섭섭하단 생각 안 드시게 아저씨께서 잘 얘기해주세요.”
“자식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아저씬 마루 누나가 타다 준 모과차를 마시면서 내 눈치를 보시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셨다.
“쉬라고 해놓고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대강 눈치를 챈 나였지만,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저씨께서 말씀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니나 다를까.
짐작대로였다.
“레이크헬이 몇 곡은 여기서 녹음을 했으면 한다고 하네?”
“그래서요?”
모른 척 묻자, 아저씬 날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내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신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먼저 말하는 것도 우스운지라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결국, 아저씬 쓰게 웃으며 얘기하셨다.
“피처링을 부탁하더라. 아, 물론 네가 싫으면······.”
“얼마 준대요?”
“적진 않던데?”
“그럼 해야죠.”
내 대답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아저씨. 그런 아저씨께 말했다.
슬슬 얘기해야겠단 생각에.
오늘 여길 찾은 진짜 이유를.
“올해가 가기 전에 콘서트 하죠.”
조금 뜻밖이었던지 아저씨께서 눈을 치뜨시더니 나직하게 날 부르신다.
“도준아.”
“예.”
“요즘 고민이 있는 거 같던데, 좀 더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뭣하면 피처링도 없던 얘기로 하마. 그러니까······.”
아저씨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냈다.
말씀을 멈추신 아저씬 눈빛으로 묻고 계셨다. 이게 뭐냐고.
대답 대신 되물었다.
“놀만큼 놀았잖아요?”
“······.”
“노래 한 곡 불러 봤어요.”
“노래?”
씨익.
“크리스마스엔 역시 캐롤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