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 이렇게 부른다(3)
전화가 걸려온 것은 조깅을 마치고 막 집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어, 베릴.”
짐작했던 대로 역시나 베릴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 도준! 이거 대체 뭐야?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게다가 빨랐고.
그만큼 그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테다.
“진정 좀 해.”
내가 이렇게 말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여전히 약에 취한 듯, 아니 그게 어떤지는 모르니까 술에 취했다고 하는 게 낫겠다. 아무튼, 거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베릴의 질문에 대답해주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들 그만큼 늘었으니 당연하겠지. 보는 눈이 달라진 만큼 높아진 눈높이에 비해서 곡 퀄리티가 떨어지니까 생기는 문제랄까. 사실 곡에 퀄리티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게 좀 이상한 거라곤 생각하지만, 아무튼 한가지는 분명해.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될 거야. 어제와 오늘은 다르잖아? 근데, 곡은 어제의 베릴한테 맞춰서 쓰인 거지. 간단하지?”
- 그러니까, 지금의 나로선 이 곡들을 연주하는 거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다는 건가?
“뭐, 그렇겠지. 아무래도 베릴이 가장 많이 달라졌으니까. 곡도 거기에 맞춰서 수정하지 않는 한, 마음에 들 리가 없겠지.”
- 그럼 지금 보낸 곡은?
“짐작대로야. 너한테 아니 레이크헬 멤버의 실력······. 어디까지나 지난번에 한국에 왔을 때의 실력에 맞춘 거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서 조금씩만 바꿨다고 보면 돼.”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끊긴 건가 싶어서 막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내려던 순간이었다.
- 네 눈엔 그게 다 보인다는 거야? 우리 실력이 전부?
이 타이밍에선 솔직해지기 어려웠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노래방 기계에 철저하게 조련되어 이론상으론 거의 모르는 게 없는 날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까.
“다는 아니고. 대충 이러지 않을까 하는 정도만.”
또다시 말이 없다.
그러다가 한숨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온 음성.
- 너 진짜······. 천재구나.
천재라······.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하는데, 이게 좀처럼 쉽지가 않다.
젠장!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다! 를 외쳤던 마음을 이제야 할 수 있을 거 같다.
또다시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어째 베릴의 음성이 아까완 달리 좀 다운된 느낌인데?
뭐, 거기까진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겠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일이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
나는 여전히 모니터 화면에 떠있는 악보들을 바라보았다.
저걸 수정해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음, 일단 좀 더 지켜볼까?
***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았던 느긋한 생활은 갑작스레 종말을 고해왔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고 식구들과 식사를 함께 한 후 점심이 되기 전에 회사로 나와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실에서 악기나 만지고 곡이나 가끔 쓰면서 지내는,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치겠네!
이거 뭐냐고!
눈앞에 놓여 있는 시나리오와 오선지를 노려보다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분명 시나리오는 달달 외울 정도로 읽어서 내용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다.
OST가 들어가야 할 타이밍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때 곡에 집어넣어야 할 감정 상태도 완벽히 파악했다.
한데, 왜 마음에 안 드는 거냐고!
도대체 왜!
이래서야 며칠 전 베릴한테 잘난 척 떠들어댄 게 우스운 꼴이잖아.
“하아! 뭐가 문제냐?”
나는 답답해서 한숨과 함께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곤 고개를 내저으며 시나리오를 들어 올렸다.
현재 막힌 부분. 그러니까 OST 곡이 들어가야 할 곳은 조연 중 하나인 성태가 또 다른 조연인 현주를 대신해 죽음을 맞는 장면. 서울에 창궐한 좀비떼에 맞서 싸우며 도망가던 중, 어릴 때부터 짝사랑해온 여자를 위해서 죽는 남자의 심정을 담으면 그만인데······.
돌겠네.
아니, 10년도 넘게 옆에서 바라만 보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하고 썸타는 걸 지켜만 보는 것도 납득이 안된다.
그런 마당에 가족도 아닌데,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좀비떼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려고 뛰쳐나간다고?
그게 진짜 가능한가?
영화야 연출로 어떻게 한다고 치고 문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노래에 담느냐는 거다.
머리를 박박 긁으며 다시 한 번 인상을 쓰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마루 누나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내 앞에 따뜻한 모과차를 한잔을 내려놓고는 뭐라고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닫고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 후론 아무도 연습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난 실컷 한숨을 내쉬며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런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베릴이었다.
그냥 받지 말아버릴까 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그래.”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했는데도 고스란히 전해진 모양이다.
- ······무슨 일 있어?
한 템포 늦게 물어오는 베릴.
“아냐. 좀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그보다 어쩐 일이야?”
며칠 전에 내게 보냈던 곡들 때문에 그러나 생각하고 물은 거였는데,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 저어······.
“······?”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좁아졌다. 뭔가 불길한 느낌···. 아니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 콜린이 지금 막 출발했어.
콜린? 출발?
내가 물을 건 한가지뿐이었다.
“설마 또 가출?”
이 경우엔 탈출이라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 되었든 브라이언 몰래 비공식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겠지만.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 브라이언이랑 함께 갔어.
“한국은 아니지?”
대답이 없다.
그게 곧 대답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온다.
다른 때 같으면 당연히 반겨줄 테지만, 지금은 좀 그런데······.
“곡 때문에?”
- 응 그것도 그렇고. 다른 이유도 있어.
“뭔지 알······. 아니다. 베릴, 알려줘서 고마워.”
그와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곡이야 후딱 해치워서 보내버리면 될 일이지만, 다른 이유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아저씨랑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 상태로 놔둬도 될까요?”
조마루의 질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현우야 늘 그렇듯 말을 아끼고 있었고, 강혁수는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때, 고현우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거 같은데?”
“그야 그렇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머리가 좋다거나 감각적이라고 해서 모든 걸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 이 경우엔 알게 되는 거라고 해야 하나?”
그때였다.
연습실 문이 열리고 도준이 나왔다.
그 순간, 이미 조마루는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몹시 바쁘다는 듯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귀만큼은 도준이 쪽으로 쫑긋거린 채였다.
그사이, 도준은 곧장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더니 불쑥 말했다.
“브라이언한테서 전화 없었어요?”
“브라이언?”
그 순간 강혁수의 품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핸드폰을 꺼내서 이름을 확인한 강혁수가 입꼬리를 비틀며 액정화면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브라이언은 여전히 쉴 새 없이 투덜거렸고, 콜린은 마루 누나가 타준 믹스 커피를 벌써 석 잔째 마시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편곡은 다 됐지?”
“무슨 소리야? 해달란 말 없었잖아?”
“어? 그래? 난 또 베릴이 보여주기에 다른 곡들도 다 만져주는 줄 알았지?”
“설마 공짜로 해달란 건 아니겠지?”
“흐흐흐.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거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지? 몰라? 그건 내 일이 아니란 거!”
할 말을 잃고 쳐다보고 있으니, 콜린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조크야, 조크.”
뭐가 그렇게 웃긴지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녀석이 다시 말한다.
이번엔 좀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그건 아니지. 비즈니스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지. 당연히 편곡료는 지급될 거야? 계약 조건이야 브라이언이 강이랑 할 거고. 너랑 난 곡에만 신경 쓰면 돼.”
“그렇다면야.”
못 해 줄 것도 없다.
저쪽에도 분명 프로듀서들도 있을 테고, 편곡자들도 있을 텐데 왜 하필 나한테 그걸 부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리 어려울 건 없으니까.
그래도 궁금한 건 또 못 참겠으니 묻기는 했다.
“꼭 내가 할 필요가 있어? 그쪽에도 충분히······.”
콜린이 손가락을 들어 살살 흔들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얘기했다.
이번엔 그야말로 양보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린 최고하고만 일해.”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얘기였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연습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콜린이 보는 자리에서 컴퓨터를 켜고 베릴이 보내준 곡들을 편곡하기 시작했다.
***
두 시간 뒤, 콜린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세 가지 단어를 번갈아가며 외쳐대고 있었다.
원더풀!
미라클!
그리고 크레이지!
한 시간 만에 마친 편곡 작업 뒤, 한 시간 동안 한 곡 한 곡 악기로 연주해보곤 저러고 있는 터였다.
그러더니, 그 곡들을 전부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그로부터 또다시 한 시간이 지난 뒤, 걸려온 전
콜린이 보란 듯이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그리고······.
- 와아! 미친 거 아냐? 곡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어?
- 준! 진짜 너 천재구나!
- 들려? 지금 연주하고 있는데······. 이게 이렇게 바뀌니까 느낌이 완전 달라지는 거 있지? 이거야말로 기적이지 뭐가 기적이겠어!
제롬과 디알로, 유진이 번갈아가며 쉴 새 없이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걸 듣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난다.
언제 봐도, 아니 언제 들어도 유쾌한 목소리다.
젠장!
옛말 하나 틀린 거 없다니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쟤들 곡은 되는데, 왜 내 곡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려는 순간이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콜린이 갑자기 핸드폰을 조작해서 영상통화로 전환한다.
음, 통화료 장난 아닐 텐데······.
뭐 내 알 바 아니지.
저 자식들이 그 정도 푼돈을 신경 쓸 놈들도 아니고.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렸을 때, 콜린이 말했다.
“봤지? 얘, 지금 녹은 아이스크림 꼴인 거?”
- 준! 무슨 일인데 그래?
- 지금 그 상태로 우리 곡을 손본 거야? 그럼 베스트가 아니란 거잖아! 아, 씨! 장난해? 다시 해!
- 유진! 농담이라도 말이 심하잖아.
- 아까도 느낀 건데, 어디 아픈 거야?
베릴까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니,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 그러니까, 뭐야? OST 작업 중인데, 그게 맘처럼 안된다는 거네?
- 큭큭큭. 하늘은 공평하다는 거지. 천재라고 만능은 아니거든.
- 뭐, 유진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데······. 내 생각엔 도준의 실력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디알로의 얘기에 콜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콜린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픽 하고 웃고는 유진에게 물었다.
“유진, 넌 왜 음악 시작했어?”
- 응? 키보드 치는 거 멋지잖아. 여자애들도 좋아해 주고.
“디알로는?”
- 잘하는 게 이거밖에 없었달까. 솔직히 드럼조차 잘 못 쳤으면 아직 여자 손도 못 잡아 봤을걸?
제롬도 당연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화면에 드러난 얼굴엔 잘난척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다.
- 흐흐흐. 내가 베이스만 쳤다 하면 여자들이 자지러지잖아?
베릴 마저 내 기대를 배반했다.
- ······여자친구가 그러는데, 내가 기타 칠 때 가장 멋지대.
모두가 한마디씩 한 후에, 콜린이 불시에 치고 들어왔다.
“지금은 좀 진지해지긴 했지만, 다들 저래. 아마 대부분 그럴걸? 밴드하는 자식들은 대부분 저렇게 시시껄렁한 이유로 시작한다고 보면 되는 거지. 근데, 도준.”
“······?”
“진짜 그게 시시껄렁하다고 생각해?”
뭐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이미 그 점에 관해선 제대로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나 역시도 음악사에 관해선 훤히 꿰고 있었기에 그 정도쯤은 안다.
천재라고 불렸고, 또 천재라고 불리는 아티스트들 대부분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선택했다는 것은.
물론 거기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이 조금 다를 뿐이지.
나야······.
노래방에 갇히지 않았으면 여전히 공부만 하고 있었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콜린이 불쑥 물어왔다.
정말 기습적인 일격이었다.
“너, 사랑 해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