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 이렇게 부른다(1)
뭐지?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지?
아니, 왜 여기에 희주 할아버지, 그러니까 정 회장이 와 있는 거냐고?
우리 외할아버지랑 그렇게 친했나?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예의가 없진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눈을 빛내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응? 하도 어릴 때라 잊은 줄 알았더니 기억하나 보군?”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은 좀 있거든요.”
씨익 웃어 보이자, 정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내 눈을 들여다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신데?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 희주에게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아, 아니. 뭘······. 당연히 와야지.”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히면서도 희주는 재빨리 우리 부모님께 인사했다.
“어머니, 오랜만에 봬요.”
“어머, 희주양. 그동안 못 본 사이에 정말 예뻐졌네? 진짜 길거리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어요.”
“아이참. 어머님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두 여자의 수다에 곧이어 희주의 어머니가 끼어들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동안, 아버진 정 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와 함께 홀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수십 수백 개의 눈들이 우리에게 아니 정확히는 나에게 쏠리고 있었다.
후우! 그럴 만도 하지.
누가 뭐래도 희주네 집안은 재벌 중에서도 초재벌이니까.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뭐, 나하곤 상관없잖아?
아니 아주 상관없는 건 또 아닌가?
광고주니까.
그치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굳이 갑을 관계를 따지면 적어도 내 쪽이 을은 아니다.
원하는 게 있는 쪽이 을이라는 아저씨의 지론에 따르자면.
그건 그렇고.
어째 홀 안에 있는 사람들 구성이 묘하다.
이상하게 가족 단위가 많았던 것이다.
외삼촌 식구들을 비롯해 우리 가족이야 외할아버지 피붙이들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왜 다들 식구들을 죄다 이끌고 온 거냐고?
특히 K 그룹을 비롯해 L 그룹까지. 재벌가의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홀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나와 희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게 의아하기만 하다.
이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싶다가 일순 깨달았다.
흠······.
아까부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여자들. 어디선가 본듯했는데, 언젠가 어머니께서 사인하라고 내밀었던 사진들이 머리에 떠오르며 순식간에 퍼즐이 맞춰졌다.
하아! 대충 알만하다.
그러니까 뭐야?
지금 이 상황이 전부 내 탓이란 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였다.
“최 회장, 축하합니다.”
“허허허.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정 회장님.”
희주 할아버지, 즉 S그룹의 정 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우리 외할아버지의 입이 찢어질 듯하다.
뿐만 아니라 어깨는 한껏 치켜 올라가 으쓱해 하시는 게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셨다.
에이,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외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면 되는 거지.
게다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들도 간간이 만나는 즐거움에 의아했던 마음을 금세 떨쳐버릴 수 있었다.
“자식이! 요즘 떴다고 너무 연락 안 하는 거 아니냐?”
명진이 형도 볼 수 있었고,
“저희도 왔어요.”
혀를 쏙 내밀며 귀염성 있게 인사하는 씨크릿걸즈도 그렇고.
특히······.
“요올! 갓준! 요즘 잘나가대?”
석준의 장난스러운 말투도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기분이 좋다.
“그래 봐야 중졸이지.”
“크크큭. 학력이 밥 먹여주냐? 이미 벌만큼 벌었을 텐데, 뭘 또 우는 소리를!”
석준과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손님들은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정·재계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예계 쪽에서도 어떻게들 알고 찾아왔는지 백 평도 넘는 홀이 금세 다 차버리고 미처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뒤쪽에 병풍처럼 서서 지켜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급히 테이블과 의자를 공수해와 그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느라 행사요원들과 외할아버지 회사 직원들이 땀깨나 흘려야 했다.
다행히 아저씨를 비롯한 회사식구들은 일찌감치 와서 적당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북새통을 이루던 입구 쪽이 정리되고, 사회자가 앞으로 나오며 팔순잔치가 시작되었다.
***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그룹이라고 불릴 정도의 재력을 가지게 되면 잔치도 다른 집들하고는 많이 다른 거 같다.
영화에서 흔히 보듯 장성해서 나름 성공한 자식이 늙은 노모를 업어주고 노래를 부른다든지 하는 일 따윈 기대하기 어렵다고나 할까.
어쩐지, 회사 창립일에서나 볼법한 진행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 회장님께선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오로지 대한민국의 식품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일념으로 한평생을 바쳐오신 분입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중앙 벽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선 사진들이 스쳐 가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께서 녹차 밭을 일구고, 공장을 짓고, 커피 원두를 수입하기 위해 브라질의 땡볕 아래 서 계신 사진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회사의 성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래프와 함께, 그간 회사가 정부로부터 받은 상들과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히트상품들이 화면에 비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번에 신제품. 내가 소연과 함께 찍은 광고의 스틸 사진이 떡하니 떠오르자 다들 눈을 빛내며 탄성을 흘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곧바로 이어진 도표 때문이었다.
“얼마 전 출시한 커피를 앞세워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친 결과 중국 진출에 성공했으며, 여기엔 아시다시피 손자인 김도준 군의 도움이 컸던 걸로 알려져 있죠.”
그러고 나서야 외할아버지의 현재 모습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최 회장님께선 먹거리가 안전해야 삶이 진정으로 풍요로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D그룹을 이끌어오시며, 많은 기업인들에게 존경받고 계십니다.”
서재에 앉아 집필을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사진은 내가 봐도 꽤 멋지게 보였다.
“······이는 가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슬하에 둔 세분 자녀의 교육에도 성심성의를 다하셨고, 때론 엄격하게 또 때론 자상하게 자식들을 가르침으로서 다들 한 사람의 훌륭한 사회의 역군으로 키워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 이 부분은 조금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뭐 그냥 넘어줄 수 있는 문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 앞에 놓인 음료수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였다.
“정말 즐거운 가족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외갓집 식구들을 비롯해 우리 식구들까지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사진이 뜬다 싶은 순간, 갑자기 내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중에서도 김도준 군은 최 회장님의 외손자로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께 큰 기쁨을 선사해주곤 했다는데요.”
사진이 바뀌며 곧바로 내 사진이 떠올랐다.
네 살 정도 됐으려나?
“진짜 다정해 보이네요. 저렇게 귀여운 김도준 군이라니, 팬들이 보면 침을 흘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홀 안이 웃음으로 뒤덮였다.
그러니까, 왜 여기서 그런 얘기들이 나오는 거냐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슬쩍 돌아보니, 다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사진들이 바뀌고 있었다.
화면에 뜬 사진들은 할아버지와 손을 꼭 붙잡고 유원지를 거닐고 있는 등 내 어릴 적 시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중 특히 외할아버지께서 날 업고서 둥가야 둥가야 하는 장면에선 사람들의 표정이 확연히 갈리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야 자랑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고, 문제는 외삼촌들인데······.
큰 외삼촌네 식구들은 누구라도 할 것도 없이 다들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작은 외삼촌은 그런 큰 외삼촌을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째, 이거 좀 이상하지 않냐?”
형이 속닥거렸다.
“왜 아까부터 계속해서 네 얘기만 나오는 거지? 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이신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아까부터 사진이나 멘트나, 한결같이 내 얘기가 빠지질 않는다.
외삼촌들과 어머니, 그리고 외사촌들의 모습도 가끔 나오긴 했지만, 사진은 집중적으로 날 조명하고 있었고 사회자가 손님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들도 외할아버지와 나를 포커싱하고 있었다.
덕분에 난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지만, 희한한 건 식장에 있는 누구 하나 형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사회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외할아버지를 몹시 부럽다는 듯 쳐다볼 뿐,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여기가 외할아버지의 팔순 잔치인지, 아니면 내 돌잔치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나도 미치겠으니까, 말 좀 시키지 말아줘. 제발.”
형이 한마디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통에 한 말이었지만, 우리 형님의 캐릭터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큭큭큭. 저 때 생각난다! 너 외할아버지랑 낚시 갔을 때 송사리인가 뭔가 한 마리 잡고 신 나 하다가, 내가 팔뚝만 한 매기를 잡으니까 막 신경질 내면서 나중엔 울었었잖아. 아하하하! 눈물 콧물 질질 흘리던 게 벌써 이렇게 커서는······.”
신나서 외쳐대는 형의 목소리.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사회자마저 말을 하다말고 형을 바라보며 웃을 정도였다.
덕분에 홀 안에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화면에서 떨어져나와 내게 모여들었다.
다들 눈에서 레이저라도 쏘듯 날 보고 있었다.
창피함이 극에 달한 나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어서 빨리 이 시간들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이랄까.
스크린을 비추던 화면이 꺼지고, 사회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그럼 오늘 여든 번째 생신을 맞으신, 최 회장님을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단상으로 나간 외할아버지께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소감을 말하곤 내려오셨다.
역시 내가 할아버질 닮은 게 맞긴 한가 보다.
질질 끌면서 말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는 걸 보면.
아무튼, 이제 슬슬 행사가 끝나가는 건가 싶었다.
“최 회장님의 손자인 김도준 군이 노래를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여드는 가운데, 내가 단상으로 올라가자 사회자가 다시 말했다.
“요즘 진짜 대단합니다. 저 역시 얼마 전 중국 공연 실황을 보곤 감탄했었습니다. 김도준 군이 축하송을 부르겠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열화와 같은 환호.
흠, 이거 어째 콘서트장보다 더 긴장되는데?
공간이 좁아서 그런가?
아니면,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대단해서 그런가?
마이크를 쥐곤 단상 한쪽에 앉아 계신 두 분께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맙습니다.”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오래 사셔야 해요. 효도까진 못해도 자주 찾아뵐게요.”
외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흔들리는 눈빛이 되어 날 바라보시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옅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런 두 분께 큰절을 올리곤 일어나 다시 한 번 마이크를 쥐고 세션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말을 맞춰놓은 상태.
부를 노래는 ‘세상의 중심에서’였다.
그래도 내 노래들 중에선 그나마 어른들도 좋아할 만한 노래는 이게 다였기에 고른 노래였다.
한데······.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자리엔 S그룹의 정 회장이 와 있는 상황이란 걸.
그 얘긴 곧······.
아, 이거 N9 광고 테마곡이었지.
한마디로 외할아버지 팔순 잔치에 와서 타사 광고 노래를 부르는 셈이 돼버릴 터다.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막 반주를 시작하려던 세션들이 연주를 그치곤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얼른 달려가 속삭였다.
그러곤 눈을 빛내며 단상 아래를 바라보았다.
형을 향해 눈짓을 해 보였다.
하지만, 형은 못 알아듣는 눈치다.
아, 진짜! 어떨 땐 눈치가 귀신 같은데 또 어떨 때 보면 둔탱이도 저런 둔탱이가 없다니까.
어쩔 수 없이 나는 단상을 내려가 씨크릿걸즈 멤버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직접 다가갔다.
뜻밖의 상황이었는지, 그녀들이 잠시 놀라는 사이 내가 말했다.
소연에게.
“미안한데, 같이 좀 부르죠?”
“아! 저, 저요?”
소연은 당황해 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뭔가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형 쪽을 힐끔거린다.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은 안심했다.
느닷없는 요구였기에 거절당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아무튼, 무사히 그녀를 데리고 단상으로 올라와 사회자에게 속삭였다.
역시 프로는 프로인가 보다.
사회자는 이내 매끄럽게 소개했다.
“씨크릿걸즈의 멤버시죠? 소연 씨와 김도준 준이 부릅니다. 망설임입니다!”
박수와 함께 함성이 터진 후, 곧바로 전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귀여워라.”
“호호호. 저런 아이라면 며느리로 나쁘지 않겠네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참해 보이네.”
소연이 부끄러운 얼굴로 풋풋한 첫사랑의 얘기를 노래로 전하기 시작하자,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근데 이게 또 외할아버지 귀에 고스란히 흘러들어 간 모양이다.
흐뭇하다 못해서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나와 소연을 바라보고 계셨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라 하고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이라도 든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조금의 감흥도 없이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겉모습에서부터 팍팍 티가 난다.
어딘지 모르게 시큰둥한 모습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기도 하고.
노래가 끝나고, 갈채가 쏟아졌지만 이대로 내려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이내 세션들과 얘기를 나눈 후, 사회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사회자는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역시 할아버지 사랑은 손자인가 봅니다. 김도준 군이 한 곡 더 부르겠다고 하네요.”
사회자의 멘트와 동시에 반주가 흘러나오자, 그제까지 아무런 감흥도 보이지 않던 이들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특히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그룹의 회장들 눈빛이 달라졌다.
그걸 보면서 나는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꽃피는······.”
술 한잔 걸친 듯 뽕삘 가득한 목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