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 나만의 길(1)
무대 위로 김도준이 올라오자, 스타디움이 떠나갈듯한 함성이 터졌다.
기다리고 있던 만큼 열렬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도준은 가만히 선 채로 천천히 관중들을 훑어보았다.
그렇게 자신의 팬들과 눈을 맞추며 그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으려는 듯 쳐다보던 김도준.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리허설 때 정했던 대로 말했다.
아니, 나직하게 외쳤다.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션들에게.
“갑니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는 함성에도 세션들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연주를 시작했다.
첫 번째 곡 ‘조금만 더’.
그가 팬들에게 선물한 노래.
처음으로 작사한 노래.
중국어로 부른 노래.
1,000만이 넘는 중국인들을 울고 웃게 만든 노래.
그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졌다가 이내 서서히 가라앉았다.
기타 음과 함께 시작된 연주에 곧이어 드럼과 키보드가 가세하고 베이스가 끼어든다.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고, 전주가 끝나갈 무렵 김도준의 입에서 중국어로 된 가사가 흘러나왔다.
“无??走到?里,?都无法到?.(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
- 无??走到?里,?都无法到?.
??道路永?不?无止境.
在海?,我在那里等?.
望着无法穿越的大海,
我?在在唱歌.
我希望我的?音能?接?到?.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
가도 가도 끝없는 그 길.
바다 너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건너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 지금 노래하고 있어.
내 목소리가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상냥한 음성이었다.
김도준 특유의 나직하지만 무겁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노래가 되어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인 궈자티위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니,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간 노래는 스타디움을 벗어나 바깥에 운집해 있던 사람들의 귀에까지 흘러들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있었다.
노래를 통해서.
만나고 싶다고.
함께 하고 싶다고.
조금만 더 가까이 가고 싶다고.
밝은 리듬에 느리지만은 않은 템포. 그렇기에 경쾌한 멜로디였지만, 이상할 만큼 서글픈 음색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노래 속에 깃들어 있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스타디움 곳곳에서 작은 읊조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방으로 번져나가 이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궈자티위창을 가득 메운 9만여 명이 일제히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 我?在在唱歌.
我可以?系?.
所以 再多一点 再多一点 ?稍等.
나 지금 노래하고 있어.
너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건 스타디움 바깥도 마찬가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르는 수만 명의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제야 만났다는 기쁨이 여과 없이 떠오르며 온몸에서 그 감정이 표출되고 있었다.
“我?在在唱歌.(나 지금 노래하고 있어.)”
김도준이 눈을 감은 채 마이크를 두 손으로 쥐고 속삭이듯 노래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스타디움 안팎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사람들의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 再多一点 再多一点 我可以?系?······.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투박한 가사였고, 서툴기 짝이 없는 고백이었다.
그럼에도, 노래가 끝나는 순간 수많은 이들의 눈에선 차올랐던 눈물이 넘쳐 흘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모두는 무대 위의 김도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여길 왔는지, 또 어떤 생각으로 이 노래를 불렀는지 절절히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주가 끝나고 난 뒤였다.
“짜오샹 하오. 쎄시 김도준.”
김도준의 입에서 유창한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화답하듯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거대한 외침이 스타디움을 흔들며 그를 격하게 반기고 있었다.
김도준은 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함성이 가라앉자, 그제야 그는 다시 말했다.
“오늘이 칠석인가 봅니다.”
또다시 들려온 유창한 중국어도 놀라웠지만, 그가 말한 바가 무얼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관중들은 이내 멍해졌다가 곧바로 함성을 터뜨렸다.
칠월칠석,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날을 기리는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
흔히들 칠석절(七夕?) 혹은 칠석연인절(七夕情人?)이라고 부르는 날을 말한다.
한데, 지금 김도준이 자신들과 그가 이렇게 어렵게 만난 걸 그에 빗대어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곤 감격에 겨워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김도준이 마치 중국인처럼 편안하게 말하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좀 걸렸네요. 까마귀들이 어지간히도 말을 안 들어 처먹어서요.”
그가 내뱉은 농담 한마디에 스타디움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타디움 밖도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까마귀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 한국인이라서 중국 문화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난 뒤,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한 김도준의 얘기에 중국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고 있죠. 여기, 절 보기 위해서 오신 여러분. 9만 명의 팬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떠나지 않고 계시는 스타디움 밖의 팬들과 절 아껴주시는 1,200만 명의 중국 팬들. 적어도 제가 노래를 부르는 이 순간만큼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씨익.
김도준은 새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웃어 보이곤, 양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씩을 세워 보였다.
그 장면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잡아 전광판 화면에 띄웠을 때였다.
“1+1은 1이란 거죠.”
순간, 스타디움이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중국의 개그맨이 말하며 한때 유행했던 말로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더 큰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말. 그걸 김도준이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절 지방사람으로 생각진 않으시겠죠?”
다시금 들려온 김도준의 음성. 그 물음에 팬들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베이징 사람들이 외지인이라면 무조건 지방인으로 여기는 풍조를 빗대어 얘기한 까닭이었다.
여기저기서 그렇지 않다는 대답소리가 들려오는 걸 들으며 김도준이 미소 짓고 있을 때, 세션 중 한 명이 기타를 들고 와 그에게 건넸다.
그걸 어깨에 메고는 말했다.
“자, 이제 한 곡 더 땡겨볼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여기까지.
김도준이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거침없이 현을 긁었다.
지이이이이잉.
“갑니다! 춤을 춰!”
그의 손끝에 따라 현란한 기타연주가 시작되고, 곧이어 다른 세션들의 연주가 뒤따랐다.
발랄한 리듬의 경쾌한 멜로디가 전주를 막 끝내는 시점.
그의 입에서 노래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국어였던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지고, 관중들이 일제히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떼창!
한데, 한국어다.
어쩌면 당연한 일.
그들이 그동안 들어왔던 노래는 김도준이 한국말로 부른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9만 명이 부르는 노래.
아니, 스타디움 밖에 모여 있는 몇만인지도 모를 이들이 함께 부르는 떼창은 그 자체로 엄청났다.
그 속에서 김도준이 중국어로 부르고 있음에도 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콘서트는 점점 더 열기를 더해가며 급격히 달궈지고 있을 뿐이었다.
***
샤오린은 대기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모니터를 보면서 몇 번이나 울고 웃었는지 모른다.
처음 김도준이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곧 있으면 자신이 나가야 하는 시각에 될 때까지 그녀의 감정은 김도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춤을 추고 있었다.
두 볼에 홍조마저 띄운 채 황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샤오린. 그녀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정말 놀라 자빠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샤오린은 자기절제가 강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김도준 앞에 서자, 그대로 한여름 땡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건 리허설을 위해 김도준을 만나는 순간,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김도준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날로부터, 아니 우연하게 ‘LONGING TIMES’ 동영상을 보게 되었던 그때 이미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도 황후의 딸에 출연했던 9년 전부터 중국에서 손꼽히는 여배우로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또 그때 번 돈을 시드머니로 해 이젠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재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였기에 그 의미는 무척이나 컸다. 전형적인 자수성가의 표본.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이만큼이나 성공했다는 것은 많은 걸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에 차는 남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남자가 접근해왔음에도 그녀와 밥 한 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그녀의 외모만 보거나, 아니면 재력을 탐내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전에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남자 따윈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하지만, 김도준은 달랐다.
적어도 노래를 부를 때의 김도준은 그녀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때론 달콤하게 속삭이고, 또 때론 거칠게 밀어붙이며, 또 때로는 가슴을 울렁이게 해 결국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남자.
그래서였을 거다.
‘LONGING TIMES’ 동영상을 보게 된 후,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김도준에 대해 알아보느라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 그녀가 팬클럽을 만든 것은.
이후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중국으로 초청하기 위해 애썼다.
자신이 만나러 가도 되었지만, 그전에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왔다.
이날을 꿈꿔왔고, 그렇게 만나고 싶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곧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샤오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후우.”
날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그녀의 매니저가 들어와 얘기했다.
“시간 됐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샤오린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기분이 좋았다.
아니, 흥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노래에 담아 전하는 마음이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하나하나 전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내가 웃을 때, 저들도 웃고 있었고.
내가 눈물을 글썽일 때, 모두의 눈시울이 붉어졌으니까.
그래서 미안했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그때, 물러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중국 정부가 입국을 금지한 상황에서 일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후회가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누구도 무시 못 하는 사람이 되겠다.
나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내 노래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누가 막더라도 당당히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노라고.
빛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팬들을 바라보며 나는 거듭해서 결심을 다졌고,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이제 두 곡만을 남겨놓은 상태.
허밍으로 부르는 노래인 ‘LONGING TIMES’는 콘서트에 적합하지 않아 레퍼토리에서 뺐기 때문에 이제껏 부른 곡 수는 다섯 곡. 남은 것은 이번에 발표한 ‘망설임’과 피날레를 장식할 ‘세상의 중심에서’ 뿐이었다.
나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외쳤다.
“샤오린 양을 모시겠습니다!”
함성이 들려오고, 곧이어 샤오린이 걸어 나왔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곤 리허설 때처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섰을 때, 반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소연과 그랬던 것처럼 그녀와 난 번갈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물론 중국어로.
잠시 후 노래가 끝나고 난 뒤, 그녀가 짧은 멘트를 하고 나 역시 그에 맞춰 여기까지 내가 올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건만, 그녀는 촉촉한 눈빛이 되어 감동했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니 중국 팬들에게 감사한다.
결과적으론 중국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게 되어버렸지만, 따지고 보면 중국 팬클럽에서 날 부르지 않았다면 시작되지도 않았을 일이었으니까.
“이제, 마지막 곡입니다.”
노래를 마친 후 아쉬운 모습으로 돌아서 내려가려는 샤오린을 붙잡은 뒤 팬들에게 말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반주, 노래, 합창······.
모두가 하나가 되어 부르는 노래는 그 무엇보다도 짜릿했다.
마약?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 진 몰라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영혼이 통째로 울리고 있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아닌, 서툴게 따라부르는 팬들의 노랫소리에.
무엇보다도 스타디움 밖에서 들려오는 저 거대한 합창소리가 날 전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5분여가 지나 노래가 끝나고, 콘서트가 끝났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들께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90도가 넘게 허리를 숙여 보인 채, 그대로 있었다.
차마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이제 노래도 다 끝이 났는데······.
이대로 고개를 들고 돌아서서 무대를 내려가면 끝일 텐데······.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쉬이 허리를 세울 수 없었다.
저들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미련이란 걸까?
아니면, 내가 깨닫지 못한 다른 감정인 건가?
바로 그때였다.
“김도준!”
“김도준!”
“김도준!”
어디선가 시작된 연호.
스타디움을 뒤흔드는 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9만 관중.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그 무언가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때였다.
허밍 한 줄기가 들려왔다.
그 순간, 사람들이 외치던 내 이름은 사라지고, 허밍 소리가 점차로 커져만 가고 있다.
반주조차 없이 들려오는 허밍 소리. 그 소리는 이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보통은 앵콜을 외쳐야 할 타이밍에, 그 대신 들려온 허밍에 나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보았다.
아니 들었다.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9만여 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손을 잡고서 부르는 허밍 소리를.
아니, 허밍은 스타디움 바깥에서도 들려온다.
바로 옆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샤오린이 내게 다가와 손을 잡고는 허밍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디에도 벽은 없었다.
모두가······.
‘LONGING TIMES’를 부르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며 눈앞이 뿌예진다 싶은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