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 기다리지 마(2)
외할아버지께서 가시고 난 뒤, 아저씨와 외삼촌께선 더 하실 얘기가 있다기에 먼저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러곤 회사로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형이 보인다.
리모컨을 알처럼 품고서 소파에서 뒹굴고 있다.
물론 한 손에선 핸드폰을 무슨 신줏단지처럼 놓지 않은 채.
“왔어?”
“응.”
그런 채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사람은 참 안 바뀌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간단히 씻었다.
그러고 나서 거실로 돌아왔을 때, TV에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윽. 커피 광고다.
나와 소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풋풋하게······.
젠장! 또 얼마나 형이 놀릴까 싶어서 한숨을 내쉬다가 형을 보곤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흠, 저 반짝이는 눈빛은 뭐지?
입도 살짝 벌어져 있다.
시선은 광고 내내 화면에서, 정확히는 소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고.
그런 채로 미동도 없다.
뭐지 싶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형이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액정을 확인한 형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더니 내게 리모컨을 던지듯 건네주곤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아뇨.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문이 닫히긴 직전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
지난 17년간 저처럼 활기찬 형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결단코 없다.
대체 누구랑 통화를 하기에.
누가 들으면 오늘이 형 생일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아니면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얼떨결에 형이 던져준 리모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픽 하고 웃고는 TV를 껐다.
그러곤 방으로 돌아와 인터넷에 접속했다.
부모님께선 오늘 모임이 있으셔서 늦으신다고 하셨기에 팬 카페나 좀 둘러보다가 잘 요량이었다.
그렇게 브라우저를 띄운 참이었다.
포털 사이트가 뜨면서 기사들이 보인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실시간 검색어.
오늘 나간 광고 때문인지 내 이름이 다시금 1위에 올라와 있다.
그다음이 ‘망설임’이란 노래 제목.
소연의 이름도 4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는 얘기겠지.
내친김에 기사들과 블로거들의 글도 한차례 살펴보니, 광고 얘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개중에는 듀엣곡이라 더 좋다는 얘기들과 함께 이번에 소연을 보고 놀랐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확실히 그녀가 보여준 실력은 나조차도 놀랄 정도긴 했다.
자연스러운 연기도 연기지만, 노래 실력이 상당했던 것이다.
아이돌 그룹으로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가 더 빛나는 타입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후 팬 카페에 들어가 이런저런 반응들을 살펴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
민준은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아침 일찍, 아니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고 있지만, 예전과는 달리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특히 오늘처럼 현장 실습이란 명목으로 학교를 빠지고 회사로 가는 날이면 더욱더 마음이 부풀었다.
지하철은 언제나처럼 붐볐지만, 아직 러시아워가 아닌지라 그럭저럭 서 있을 공간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을 때였다.
“진짜 장난 아니다.”
“그러게. 김도준도 김도준이지만, 소연이 이렇게 노래를 잘했나?”
“후광효과인가?”
“글쎄. 다른 건 모르겠는데, 노래 진짜 잘하는 거 같아.”
“노래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듣기로는 성격도 좋다던데?”
“어쨌든 이번에 소연, 확실히 떴네.”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슬쩍 바라보니 두 명의 남자가 핸드폰으로 커피광고에 나오는 소연을 보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만 벌써 몇 번째인지.
오늘 아침에만 다섯 번째다.
그중에는 여자들끼리 감탄하며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씨익.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뿐만 아니라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민준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채 전화를 받았다.
그러곤 반갑게 말했다.
“아, 예. 소연 씨.”
그의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흘깃거렸지만, 이내 관심을 끄곤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거의 다 와 가요. 예, 예. 알겠어요. 아! 커피 사갈까요? 녹차라떼죠? 흐흐흐. 제가 또 그런 기억력은 있잖아요. 예? 에잇 기분이다. 다른 멤버들 것도 사갈게요. 알았어요. 그럼 이따가 봬요.”
주위에서 힐끔거렸지만, 민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얼마 뒤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을 따름이었다.
***
“죄송합니다.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요. 그럼요. 결정되면 가장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날 맞이한 건 고 팀장님의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가가 물었다.
“또 방송국에서 연락 왔어요?”
광고를 보고 또 섭외전화가 빗발치는 건가 해서 물었던 것인데,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중국.”
“예?”
혹시 콘서트 때문에 그러나?
“설마 그새 생각이 바뀐 건 아니겠죠?”
밤사이 중국 정부가 결정을 뒤집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고 팀장님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러곤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전화가 울리고, 곧바로 고 팀장님이 수화기를 들었다.
“예. HS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아, 맞습니다만. 그 문제라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걸로 아는데요.”
유창하다고 까진 말하기 어렵지만, 중국어로 말하고 있는 고 팀장님이셨다.
중국회사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중국 쪽과 통화한 거라고 했었지 않나?
그런데 왜 한국어로 얘기를 한 거지?
저쪽에서 한국인 직원이라도 고용하고 있는 건가?
그럼 이번엔?
번역사나 한국인 직원을 고용하지 않았나 본데.
그게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회사가 크거나.
아무튼, 아침부터 열일하시는 고 팀장님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 팀장님과 마루 누나 그리고 아저씨. 세 사람만으로 회사를 꾸려갈 생각인 걸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저씨께서 다 계획이 있겠지 싶었던 것이다.
딸랑.
그때 문이 열리며 아저씨와 마루 누나가 나란히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 일찍 왔네?”
마루 누나가 날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고, 나 역시 미소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그때 막 통화를 마친 고 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저씨께 얘기를 시작했다.
“어제 광고가 나간 뒤부터 계속해서 중국 쪽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중입니다.”
“중국?”
아저씨도 의아하다는 듯 고 팀장님을 쳐다보고 있다.
“예. 도준일 자기네 회사 광고에 출연시키고 싶다고들 하네요.”
“아니, 광고는 어떻게 보고?”
“글쎄요. 유투븐이 막혀 있다곤 해도, 꼭 보려고 한다면 못 볼 것도 없으니까요. 아니면 중국 애들이 퍼다 나른 걸지도······.”
그때 마루 누나가 끼어들었다.
“중국 팬클럽에서 광고 올라오자마자 유쿠투모우와 팬 카폐에 올렸어요.”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다.
아저씨도 마찬가지이신지 이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대신 다른 걸 물으신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아직 그럴 계획 없다고 했죠. 확정된 공식 일정은 없다고 홈페이지에도 띄워놓았잖아요. 근데···.”
“······?”
“재밌는 건, 중국 측에서 이상한 걸 요구하네요.”
“이상한 거?”
“예. 만일 광고를 찍게 되면 컨셉도 그렇고 이왕이면 노래도 듀엣으로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고 팀장님의 얘기에 아저씨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신다.
그러면서 중얼거리셨다.
“공지 띄우면 난리 나겠군.”
***
그 난리가 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마루 누나가 한국과 중국, 양국의 팬 카페 그리고 회사 홈페이지에 콘서트 소식을 알리기 무섭게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축하한다는 얘기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어째서 한국에서 먼저 콘서트를 하지 않느냐는 불만도 있었다.
이 의견엔 꽤 많은 이들이 동조하는지 한때 이왕이면 한국에서 먼저 콘서트를 열라는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내가 돈에 눈이 멀어 중국시장부터 노린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글이 올라왔지만, 팬들의 집중 공격에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새 엄청나게 늘어난 한국 팬클럽 회원들.
그만한 팬들이 마음먹고 덤벼드는데 버텨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팬덤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팬 카페에 글 하나를 올렸다.
원래 팬 미팅 예정이었던 게 어쩌다 보니 콘서트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중국에서 돌아오면 빠른 시일 안에 한국에서도 콘서트를 열겠다는 약속이었다.
아쉽기도 했을 텐데, 오히려 팬들이 기뻐해 주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감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콘서트 소식은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까지 들썩이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미 예정된 수순이랄 수 있으니, 아저씨가 말씀하신 ‘난리’라고 할 순 없는 일.
진짜 난리는······.
“아뇨. 아직 공연 일정도 안 나왔습니다. 오프닝이요? 결정된 바 없습니다. 예, 예. 결정되면 전화드리죠.”
“공연 레퍼토리는 확정 전입니다. 당연하죠. 듀엣곡을 부를지 말지도 결정된 바 없습니다.”
“글쎄요. 한국어로 부른 거라, 아무래도 그쪽 가수분께서 소화하실지 모르겠네요. 아! 그러시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일단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필모그래피는 받아보았습니다. 예, 예. 경력부분에선 충분하지만, 단지 실력만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건 좀 그렇죠. 아시지 않습니까? 공연에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화통에 불이 났던 것이다.
모두 중국 측에서 걸려온 전화들이었다.
그것도 절반 이상은 자기네 가수들을 오프닝에 세워달라는 부탁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번에 출시한 ‘망설임’을 부를 때 자기네 여가수와 함께 부르게 해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아저씨가 예견한 것처럼 콘서트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회사가 정확히는 고 팀장님께서 곤욕 아닌 곤욕을 치르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사이 소연은 확실히 떴다.
한국에선 말할 것도 없었고, 중국에서도 슬금슬금 인기를 모으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류스타의 대열에 진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급속도로 진행된 콘서트 계획이 최종국면에 들어간 것은 11월 중순.
얘기가 나온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중국행이 결정되었다.
***
인천공항에 도착해보니,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축 중국 공연! 이라는 플래카드도 보이고, 천여 명에 가까운 팬들이 운집한 채 다들 기쁜 얼굴로 환송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와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기저기서 꺅꺅거리며 난리법석이다.
생각 같아선 그들과 함께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주며 잠시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시간관계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는 수없이, 그들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의미로 허리를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그러곤 출국장을 빠져나와 비행기에 올랐다.
잠시 후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나는 묘한 기분이 되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라 새삼스레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져 온 탓이다.
선 하나만 넘으면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 무력하게 돌아와야 했던 그때. 느낄 수밖에 없던 그 감정들이 수면으로 떠오르듯 기억나 마음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래? 마음이 싱숭생숭해?”
옆자리에서 마루 누나가 물어오고 있었다.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래도 이번엔 좀 다르잖아? 그때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이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리곤 마루 누나가 농담을 던졌다.
“우리 집 소파보다 더 편한 거 같아. 호호호. 일등석이 좋긴 좋다, 그치?”
“편하긴 하네요.”
“캬하! 우리 도준이 많이 컸네. 중국 문화국에서 비행기도 다 보내주고.”
농담처럼 얘기하는 누나였지만, 사실 처음 그 얘길 듣곤 많이 놀랐었다.
안 그래도 외삼촌이 신경 써주신다고 일등석으로 예약해놓았었는데, 느닷없이 중국 측에서 전세기를 보내왔던 것이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오지 말라고 막을 땐 언제고.
이젠 전세기까지 보내주며 모셔가는 모양새다.
때문에 기분이 묘해져서 비행기에 올랐더랬다.
마루 누나도 마찬가지인지, 놀란 눈으로 비행기 안 곳곳을 살피며 구경했다.
스무 석밖에 없는 좌석은 편안하다 못해 거의 침대나 다름없었고, 식당으로 쓰이는 공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목욕할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보내준 승무원들이 시도때도없이 오가며 편의를 봐주었다.
지금도 마루 누나는 간단한 칵테일을 주문해 마시면서 감탄하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중국 주석까지 만나게 되는 거 아냐?”
“설마요.”
누나도 농담이었는지 웃음을 흘리곤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대접받는 거 같아서 기분이 나쁘진 않네.”
그렇게 마루 누나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보다가 다시금 창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난히 맑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
베이징 상공을 유유히 선회하다가 부드럽게 내려앉은 비행기는 덜컹하는 느낌과 함께 활주로 위로 미끄러졌다.
잠시 후 멈춰 서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준비됐어?”
날숨을 내쉬곤 누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뒤 아저씨와 고 팀장님, 그리고 경호원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러곤 입국심사를 마치고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멈칫.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루 누나도, 고 팀장님도, 경호원들도 심지어는 아저씨조차 할 말을 잃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베이징 공항을 뒤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