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 바람이 불 땐……. (5)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는 최주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표정도 더없이 밝았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분노로 일그러져 있는 표정도 지금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채로 그는 회장실 앞에까지 이르렀다.
“회장님 안에 계시나?”
“예. 계십니다.”
“기별하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가 재빨리 안쪽에 연락하는 동안, 최주호는 눈을 빛내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들어오시랍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최주호.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마음은 바쁘기만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고 건 때문에 왔더냐?”
다소 퉁명하게 물어오는 아버지, 최 회장의 물음에 최주호는 대답했다.
하지만, 최 회장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아버지.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원래 회사에선 직급으로 서로 불러야 옳겠지만, 이렇게 단둘일 때는 간혹 편하게 부르기도 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와 아들로서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만 그랬다.
그걸 잘 알기에 최 회장은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 아들임에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일단은 들어보고 판단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긴 최 회장. 그 앞에 마주 앉은 최주호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보셨습니까?”
최 회장은 눈만 빛낼 뿐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눈치다.
최주호는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도준이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가만히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던 최 회장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도준일 커피 광고 모델로 쓰신다는 결정. 물려주십시오.”
잠시 말없이 있던 최 회장이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러니까, 도준이가 표절 시비로 이미지가 바닥을 치고 있으니 모델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런 말이냐?”
“그렇습니다! 광고가 나가고 있어도 바꿀 판인데, 문제가 있는 아이를 모델로 내세운다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 회장이 혀를 차기 시작했다.
“시야가 그렇게 좁아서야 어디다 쓸꼬.”
진정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발끈한 최주호였지만, 대들진 않았다.
대신 아버질 설득하기 위해 말하려는 차였다.
최 회장이 먼저 얘기했다.
“네놈 눈에는 도준이가 그럴 애로 보이더냐?”
“아버지! 중요한 건 그 애가 진짜 표절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아닙니다.”
“그래, 그렇긴 하지.”
이제야 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최주호가 얼굴에 화색을 띠었을 때였다.
“그 아이가 내 손자라는 게 중요하지.”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최주호. 그런 그에게 최 회장이 날 선 어조로 축객령을 내렸다.
“제 놈 조카도 감싸지 못하는 놈이 무얼 하겠다고. 광고 건에서 손 떼거라.”
“아, 아버지!”
“더 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
소파에서 일어나는 아버질 보면서 다급해진 최주호가 또다시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그 입 한 번만 더 열면, 나도 더는 참지 않겠다.”
아닌 게 아니라, 최 회장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본 최주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금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최주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회장실을 나가야 했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난 뒤, 최 회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본질을 봐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제 식구가 다치면 그룹 전체가 다친다는 기본도 몰라?”
다시 한 번 혀를 차면서 고개까지 설레설레 내젓던 최 회장은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주식이냐?”
- 예. 회장님.
“내 방으로 오너라.”
-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직후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예상대로 이 실장이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앞으로 와 서류첩을 건넨다.
“세 명입니다.”
최 회장은 서류첩을 열어 한 장 한 장 살펴보더니 차가운 음성을 토해냈다.
얼마나 차가운지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겁도 없이 내 새낄 건드린 놈들이······이놈들이란 말이지.”
***
“이쯤이면 드러낼 때도 됐는데······.”
아저씬 신문을 보면서 혀를 차셨다.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해 보이시다가 말씀하셨다.
“설마 나서지 않을 생각인가?”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중얼거리신다.
“이걸론 좀 약할 텐데······.”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미묘한 상황이긴 하다.
아저씨의 예견대로 신아일보에서 표절 의혹을 터뜨린 후, 바로 다음 날 아침, 오늘부터 일간지들이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인가수 A씨 표절 의혹]
이 정도는 양반이었고.
[데뷔 3개월 만에 정상에 섰던 김 군(17)의 인기, 표절로 이룬 모래탑인가?]
비꼬는 기사도 있었으며.
[신드롬의 진실. 집중 분석.]
흡사 르포처럼 접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확실히 일간지가 다르긴 했다.
인터넷 찌라시보단 수위가 좀 낮았고, 실명을 거론하는 경우도 없었다.
아저씨께서 약하다고 하는 건 바로 이점을 말하는 걸 테다.
의혹이 의혹으로 끝나게 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할 순 없을 테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날 매장해버릴 생각으로 일을 벌인 거라면, 여론을 확실히 움직일 수단이 필요할 터였다.
이를테면 내가 표절한 게 확실하다는 증거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권위 있는 전문가를 내세워 날 도덕적으로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몰아붙일 테지.
그렇지 않으면, 이 사태는 흐지부지되고 그들이 원하는 걸 얻긴 힘들 게 분명하다.
바로 지금처럼.
“걱정 마십시오. 그럼요. 사실무근입니다.”
S그룹 홍보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계시는 고 팀장님. 태연하게 말씀하시곤 계시지만, 심기가 불편한지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믿으셔도 된다니까요.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알아본 바로는 판매량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걸로 압니다만. 예. 그렇다니까요. 곧 입니다, 곧!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 주식이요? 이번일만 끝나면 몇 배로 뜁니다.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계약 해지하시던가요. 위약금이랑 다 물어 드리겠습니다. 대신 ‘세상의 중심에서’는 못쓰시는 거 아시죠? 예, 예. 그렇다니까요. 얼마 안 걸립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그럼, 들어가십시오.”
고 팀장님은 전화를 끊고선 무심하게 얘기하신다.
“아직 확실치도 않은데, 왜 이렇게 안달인지. 조금만 기다리면 다 끝날 걸 가지고. 나중에 기자회견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진짜.”
고저 없는 말투로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 툴툴거리는 게 맞나 의심스럽다.
그런 고 팀장님을 비롯해 세 사람을 한 명씩 차분히 바라보았다.
아저씨, 고 팀장님, 마루 누나.
누구 하나 초조해 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다들 자신만만한 표정들이다.
계산대로 되어간다는 얼굴이랄까.
진짜 무서운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한다.
얼른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고민하다가 그냥 받지 않았다.
한데, 곧바로 날아드는 메시지.
- 바쁜가 보지?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데, 다시 날아드는 메시지.
- 주식이 삼촌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 줘. 오랜만에 목소리 좀 듣자.
아, 작은 외삼촌이셨구나.
큰 외삼촌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날 많이 귀여워해 주던 분이셨다. 따로 연락하고 지내진 않았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살갑게 말 걸어주기도 하셨고.
얼른 전화를 걸었다.
“예. 삼촌. 저 도준이요.”
- 어? 바쁜 거 아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 아! 혹시······. 그런 거냐?
“네. 그런 거죠.”
- 쯧.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신경 쓰지 마라.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는 거다.
“예.”
- 그건 그렇고. 시간 되면 나 좀 안 볼래?
“저야 좋죠.”
- 그럼, 이따가 저녁때 너희 집으로 가마. 그래도 되지?
“전 괜찮은데······.”
- 하하하. 지금 내 걱정하는 거냐? 녀석하곤. 혜원이하곤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아! 그러셨어요?”
- 아, 전화 들어온다. 삼촌이 지금 일하던 중이라서. 집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옅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뜬 거 같은데요?”
마루 누나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 순간, 누나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뭐야! 이놈이었어?”
***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것도 연타.
내용도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보다 올린 사람의 이름이 눈에 익는다.
마루 누나가 어이없어할 만도 하다.
가장 먼저 올라온 건 장도원의 칼럼이었다.
예전에 나와 SIDE B의 수준 차이를 논하며 대놓고 내 실력을 깠던 칼럼니스트였다.
이번에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 ······어린 나이에 받았을 압박감을 생각하면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번 일만으로 그를 평가하고 또 단죄하는 건 너무 섣부른 행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히려 좀 더 바르고 곧게 커 나갈만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어른들의 자성이 필요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중략)
최정점에 섰을 때의 압박감은 그 자리에 서본 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을 터다. 그럼에도, 감히 말하건대, 부디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고, 심기일전해 새롭게 도약할 발판으로 삼기를 기대해본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은근한 어조로 마치 아이 달래듯 써내려간 칼럼을 나는 황당해져서 바라만 보았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건 약과다.
뒤이어 읽은 인터뷰에 얼굴까지 붉어지고 말았으니까.
- 가요계의 선배로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나 역시 정상에 서본 경험이 있기에 지금 김도준이 느끼고 있을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길게 말하진 않겠다. 지난 십여 년간 음악을 해오면서 깨달은 것만 얘기하고자 한다. 욕심이 지나치면 몸을 망치는 법이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진실하게 사람들과 마주하면 길이 보인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부디 어두운 터널을 잘 뚫고 나와 밝은 세상의 빛을 한껏 즐길 수 있길 바란다.
박성훈의 인터뷰를 읽고 나니, 머리에 열이 오른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할까.
판사 앞에서 판결받는 기분이 이럴까?
이건 뭐 확정이네.
의혹 정도가 아니라 내가 표절했다고 단언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훈계까지 하고 있다.
아, 진짜 열 받네.
안 되겠다.
샤워라도 좀 해서 열을 식히든가 해야지.
인상을 구기며 막 돌아섰을 때였다.
띠링.
알람이 울리며 핸드폰에 SNS가 뜬다.
- 믿을 걸 믿어야지. 천재가 범인의 곡을 베낀다는 게 말이 되나?
이성원 형님이 자신의 계정에 글을 올린 것이다.
그 밑으로 순식간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고, 좋아요 숫자가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다.
보고 있으니, 고맙기도 하고 한껏 뜨거워졌던 머리가 식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도준아, 노준영 씨 인터뷰 떴다!”
후다닥 달려가 마루 누나가 보여주는 기사를 읽었다.
- ······한 백번쯤 들은 거 같다. 김도준 군과 SIDE B의 곡을 비교해가며 들은 게. 비슷한 구석이 있긴 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이 가지고 있는 음색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표절 의혹이 일기 시작했을 때 거론되던 그 전문가들이 실존하긴 하는 건가? 이제라도 이름을 밝히고 정확한 팩트를 제시했으면 좋겠다. 괜히 지저분하게 똥이나 싸지르지 말고.
세다.
과연 준영이 형이랄까.
설마 오늘 방송에서 또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글로 보는 것도 이렇게 센데, 직접 말로 들으면······.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물론 날 믿어주는 게 팍팍 느껴져서 고마운 건 당연했고.
“어머! MJ에서 입장 발표했는데?”
- 표절 의혹과 관련해 회사 자체적으로 조사를 실시하고,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음향 전문가인 강시원에게 분석을 의뢰한 결과 두 곡의 유사점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중략)
어디에서 불거진 표절 의혹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드롬에 가까운 김도준과 더불어 올인원의 인기에 편승해 이슈를 만들려는 생각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신문마다 내 얘길 떠들어대느라 난리고, 인터넷에서 벌어진 논쟁이 한창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당사자 그것도 이번 사건의 피해자로 생각되던 올인원의 소속사가 표절 자체를 부정해 버렸다.
그 여파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인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중얼거리셨다.
“장도원이라······. 결국 이놈이 몸통인가? 그것도 아니면······. 뭐, 최소한 연결점은 되겠지.”
결정을 내리셨는지 불쑥 물으신다.
“이 정도면 무르익을 만큼 무르익은 거 같지?”
고 팀장님이 곧바로 동의하신다.
“딱 적당한 타이밍이군요.”
“그럼 터뜨려야지.”
“어떻게 그럼 바로 기자회견부터······.”
그때였다.
마루 누나가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모두의 시선이 누나에게로 돌아갔다.
아니, 누나가 가리키고 있는 모니터 화면으로.
거기엔 한편의 동영상이 떠 있었다.
유투븐.
올린 지 몇 시간 안 되는 거 같은데, 벌써 조회수가 1,000만에 육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조회수가 무섭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댓글은······.
반응이 폭발적이다.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찬사 일색. 게다가 댓글마다 내 이름이 보인다.
딸각.
누나가 홀린 듯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이었다.
영상은 흑백이었다.
컬러가 싹 빠진 화면은 약간 어두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모래알이 흩뿌려진 듯 거친 화면.
순간 멍해진 마루 누나.
고 팀장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저씨도 마찬가지.
그렇게 모두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익숙한 기타 음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화면 정중앙엔 자막이 떠오른다.
LONGING TIMES.
흘러나오는 영상들.
낡은 사진들이 한 장 두 장 떠오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다.
총을 메고 전장으로 떠나는 남자.
폐허 속에서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
무너져내린 폐허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
전쟁 뒤에 남겨진 아픔.
지진이 할퀴고 간 상처.
폭행과 굶주림으로 지쳐가는 사람들.
잔잔한 기타 연주와 함께 먹먹하게 흘러나오는 허밍 속에서 조회수는 무서운 기세로 치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