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55화 (55/260)

# 55

#55. 바람이 불 땐……. (2)

러시아워 시간도 아닌데 도로가 막히는지 차가 꼼짝을 않는다.

평소라면 상관없을 테지만, 오늘처럼 시간 약속이 되어 있는 때는 운전하는 입장에선 속이 바짝바짝 탈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계약 협의를 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보니 운전하는 사람보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홍보실장이 더 안절부절못한다.

금방이라도 뒤쪽에서 호통이 날아들 것만 같아서.

한데, 뒤를 힐끔 바라보니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그저 조용하다.

그룹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전략기획실장님께선 태블릿 피씨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 바로 옆자리에 탄 전무이사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최주호는 불쾌함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아버지가 시키니 가긴 간다만, 왜 자신이 이까짓 일에까지 나서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광고?

홍보실에서 어련히 알아서 찍을까?

모델이 도준이라고 해서 뭐라 다르단 말인가?

막말로 그동안 커피 광고를 도맡아 해왔던 S급 배우 손윤하조차 한 번 만나본 적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단지 도준이가 모델이라는 이유만으로 움직인다는 게 말이 되나?

얼굴 가득 드러낸 불편한 심기 때문인지 아까부터 홍보실장은 말없이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최주호는 그가 건넨 태블릿 피씨를 통해 홍보실에서 급하게 준비한 자료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요 몇 달간 김도준, 그러니까 자신의 조카가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기재된 자료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녀석에 대한 기사들도 스크랩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SIDE B와 관련해 이슈화되었던 논쟁들도 잘 정리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팬 클럽 동향,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녀석에 대한 소문들, 그리고 최근 출시된 N9의 광고와 더불어 신드롬처럼 번지고 있는 녀석의 노래까지도. 전부 살펴보고 있었다.

툭.

던지듯 태블릿 피씨를 내려놓으며 최주호는 인상을 구겼다.

그러면서 더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신드롬은 개뿔. 딴따라면 다 같은 딴따라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음 가득한 얼굴이 되어 창밖을 내다보는 그였다.

***

일전에 아저씨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걸 쥐고 있는 게 갑이란 얘기.

그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랜만에 뵙네요. 외삼촌.”

“그래. 그동안 잘 있······더구나. 노래는 잘 듣고 있다.”

살짝 굳은 얼굴을 보니, 내 노랠 듣긴커녕 지금 이 상황이 엄청 마음에 안 드나 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D그룹이 재계서열에서 한참 밀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식품 쪽에선 누구도 무시 못 하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곳에서 무려 전략기획실장의 자리에 있는 게 외삼촌이시다.

그런 사람이 광고 하나 맡겨보겠다고 여기까지 행차하셨으니 불만이 없을 리가 있나.

솔직히 나조차도 외삼촌이 직접 오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틀림없이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시하신 게 분명하다.

“처음 뵙겠습니다. D 물산 전략기획실장 최주호요.”

딱히 거들먹거리진 않으시는데, 어투가 딱딱한 게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아저씬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반갑습니다. HS 엔터테인먼트의 강혁수입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하실 따름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3평 남짓한 작은 회의실에 앉았다.

양측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상황.

외삼촌과 함께 온 이들은 전무이사와 홍보실장이란다.

이쪽에는 아저씨와 고 팀장님 그리고 내가 앉아 있다.

“서류들을 보시면 알겠지만, 계약조건은······.”

외삼촌이 가만히 앉아서 나서지 않고 있는 가운데, 홍보실장이라는 사람이 막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저씨께서 손을 살짝 들어 올리신다.

그러곤 옅은 미소와 함께 얘기하셨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저희 측 사람이 안 와서 그런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홍보실장이 의아한 눈빛을 해 보이며 외삼촌과 전무이사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죄송합니다. 서둘러온다고 했는데, 차가 많이 막혀서요.”

아버질 보신 외삼촌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고 있을 때,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회사 고문 변호사님이십니다. 이번 계약 건이 법적으로 검토할 사항이 많다고 판단해서 모셨으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 일을 미룰 까닭이 없었다.

포문은 저쪽에서 먼저 열었다.

외삼촌께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거만한 자세로 턱짓을 하시자, 홍보실장이 먼저 얘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저희가 앞으로 촬영하게 될 광고는······.”

하지만, 채 시작도 하기 전에 아저씨께서 말허리를 잘라먹고 들어오신다.

“우리 김 변호사님께서 바쁘셔서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습니다. 괜찮으시면 계약서부터 검토해도 되겠습니까?”

할 말을 잃고만 홍보실장이 이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전무이사를 슬쩍 바라보고 있다.

잠시 아저씨와 아버질 번갈아 쳐다보시던 전무이사가 외삼촌을 한차례 보곤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홍보실장이 계약서를 꺼낸다.

한눈에도 두툼한 게 서른 장은 족히 넘을 듯하다.

그때부터 아버지께선 서류 검토를 시작하셨다.

흠, 아버지께서 일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차분하게 앉아서 계약서를 비롯해 별첨된 서류들까지 꼼꼼히 확인하시는 아버지.

당연히 계약서에 대한 검토가 끝나기 전까진 계약은 진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여기서 아버지께서 ‘노’라고 머리를 내젓는 순간, 모든 일은 없던 일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 회사의 고문변호사이신 이상, 적어도 법적인 부분에 한해선 그 정도 권한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테이블 건너편에선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중이다.

특히 외삼촌의 얼굴은 갈수록 가관이다.

처음엔 그래도 불쾌한 표정 속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하시더니, 지금은 얼굴빛이 살짝 붉어진 채 눈에선 광선이라도 쏠 것만 같다. 당장에라도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고함이라도 지를 듯하다.

그에 비해 전무 이사는 그나마 양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르진 않다.

여전히 아버질 그룹 내 흔하디흔한 법무팀의 일개 변호사쯤으로 여기는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더니만, 지금은 잡아먹기라도 할 듯 아버질 노려보는 중이었다.

하기야 나라도 그랬을 거 같다.

아버지께서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한 이후로 벌써 30분이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궁금하긴 하다.

대체 뭘 그렇게 보시기에 저리도 오래 걸리는 걸까?

설마 글자 하나하나 대조해보고 계시는 건 아닐 테고.

겉으로만 봐선 꼭 감사 나온 조사관 같은 모습이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괜스레 아저씨께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한데, 우리 아저씨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고 계신다.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보이시려 애쓰시긴 하는 거 같긴 한데, 계약 자체엔 그다지 매력을 못 느끼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느낌이 은연중 풍긴다.

그렇게 외삼촌을 비롯해 상대 측의 인내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쯤, 아버지께서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담담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문제가 많군요.”

외삼촌을 상대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얘기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한데, 진짜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나 보다.

“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홍보실장이었다.

“발견된 독소조항이 열두 개나 됩니다.”

옆에선 아저씨께서 턱을 매만지고 계셨다.

생각이 깊어지시는지 눈동자도 살짝 번뜩이고 있었다.

그런 채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들으셨다.

“귀사에선 계약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노예를 사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이건 그냥 돈 좀 주고 아예 김도준 군의 미래를 사겠다는 얘기나 다름없군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건 오늘 처음 봤는데, 상상했던 거랑 많이 다르다.

우선 공사를 구분하시려는 건지, 아들인 날 김도준 군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무엇보다 말투 자체가 다르시다.

분명 차분한 음성으로 얘기하시는데, 어째서 살벌하게 느껴지는 걸까?

저런 상태의 아버지 앞에서라면 꼭 혼나는 기분이 들 거 같았다.

툭!

서류들을 던지듯 내려놓고선 말씀을 이어가신다.

여전히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체크해뒀습니다. 수정해 오시기 전까지 계약진행은 더 이상 불가합니다.”

“아니, 자네 지금······.”

그때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전무이사가 표정을 구기면서 소리치려 했지만, 아버지께서 단호하게 끊어내신다.

“이명진 전무님.”

“······.”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제까지와 달리 어투도 차갑고, 눈빛도 날카롭다.

그런 채로 아버지께서 전무이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자, 장난이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장난이 아니면, 이런 계약서를 버젓이 들고 옵니까?”

어느새 아버지의 말투가 달라져 있었다.

어째 검사가 피의자 심문하는 느낌인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기세에 밀린 건지, 전무이사가 말을 더듬기까지 한다.

“그, 그야······.”

그조차도 아버진 허락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전무이사가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셨다.

“이보세요. 이 전무님. 회사에서 돈 좀 굴리니까, 그게 다 당신 돈 같습니까? 당신 골프나 치라고 회장님께서 피 같은 돈을 내주시는 줄 알아요? 비싼 차 굴릴 생각만 하지 말고, 일부터 제대로 하세요.”

빠르지 않은 말투로 전무이사를 들었다 놨다 하시는 아버지셨다.

그러면서 습관이신 듯, 손에 깍지를 끼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다시금 차분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피차 피곤하게 이러지 맙시다. 우리 회사와 일하고 싶으면 제대로 된 계약서를 가져오세요.”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전무이사는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말 찍찍해대며 손가락 하나로 지시를 내리던 사람인데, 불과 몇 달 만에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할까.

이해가 가긴 하는데, 안쓰럽거나 하진 않다.

지금의 상황은 누가 봐도 저쪽에서 실수한 상황이니까.

그때 아버지께서 깍지를 풀고 손끝으로 계약서를 저쪽으로 밀면서 덧붙이셨다.

“그리고 이건 옛정이 남아 말씀드립니다만, 법무팀에 전해주세요. 명색이 그룹이라는 곳에서 사용하는 표준 계약서인데 오타가 웬 말입니까? 양식도 좀 세련되게 바꾸라 하고요.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어째 바뀌질 않는군요. 이래선 언제고 한번 크게 망신당하는 날이 올 겁니다.”

꿈틀.

외삼촌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는지,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셨을 텐데도 아버진 단호하게 나가셨다.

“계약서 수정한 후 다시 보시죠.”

“아니, 이보게···. 아니, 김 변호사 이러는 법이 어디 있나!”

전무이사는 이제 슬금슬금 외삼촌의 눈치를 보면서 아버질 달래고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야 고치면 될 일 아닌가.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한 사항이네. 자네도 회장님 성격 알지 않나? 이대로 돌아가면 어찌 될지.”

아버진 전무이사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외삼촌 쪽으로 옮기며 말씀하셨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계약을 하고 싶으시면 제대로 고쳐오라고요. 제가 지금 틀린 얘길 하고 있는 겁니까?”

말미에 이르러 아버진 시선을 돌려 아저씨를 바라보셨다.

그러자 아저씬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내저으셨다.

“법적인 판단이야 김 변호사님께 알아서 해주실 일이죠.”

거보란 듯이 전무이사를 쳐다보시는 아버지.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외삼촌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마 외할아버지의 엄명이 아니었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을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쪽이 갑인지라······.

“이봐요, 강 대표님. 이래도 되는 거요?”

아버지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외삼촌 눈치를 한차례 본 전무이사가 아저씨께 따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살짝 고압적인 자세로.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겁니까? D그룹이에요, D그룹!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안타깝군요. 저희도 되도록 그쪽과 좋은 인연을 맺고 싶긴 한데, 법적인 부분에 관해선 저희 고문 변호사님께 일임한지라.”

드르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시는 아저씨.

“저흰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머지 얘기는 김 변호사님과 하시죠.”

그러곤 뒤도 안 돌아보고 회의실을 나가신다.

나?

눈에 불이라도 뿜을 듯 노려보고 계신 외삼촌께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아저씨 뒤를 따랐다.

***

쾅!

조금 있다가 회의실을 나온 외삼촌 일행은 말 그대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것도 부숴버리기라도 하려는지 문을 거칠게 닫으면서.

딸랑.

뒤늦게 종소리가 앙증맞은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뭔가 상황과는 언밸런스한 소리인지라 웃음이 나왔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저씨께서 정중하게 얘기하자, 아버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해 보이신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지금 바로 가실 겁니까? 혹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셔야 하는 게 아니면 나가셔서 소주라도 한잔 하시죠?”

“좋죠.”

어?

두 사람, 아저씨와 아버지께서 갑자기 쿵짝이 맞더니 웃으시며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아니,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술은 무슨······!

황당해서 문 쪽을 쳐다보다가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마루 누나가 킥하고 웃고 있었다.

이 누난 또 왜 이래?

내가 쳐다보자, 마루 누나가 웃음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모니터 화면만 가리킨다.

또 별거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거겠지 싶어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놀랐다.

아니, 황당해졌다.

포털 사이트에 떡하니 떠 있는 기사 제목 때문이었다.

[충격! 천재를 가장한 도둑인가? 김도준 표절 의혹 불거져.]

“웃기는 놈들이네.”

고 팀장님이 정말 오랜만에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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