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 세상의 중심에서(2)
광고의 시작은 특이했다.
무엇보다 소리가 빠져 있다.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영상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확실히 사로잡는다.
한 허름한 건물 옥상.
배속을 높인 건지, 빠른 속도로 쌓여가는 아시바. 이어 조명과 앰프 등 음향기기들이 설치되고, 조금 있다가 김도준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곤 무대 위로 올라가 스탠드 앞에 선다.
스탠드엔 마이크 대신 핸드폰이 고정되어 있었다.
로고도 보이지 않고, 디자인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그런데도 핸드폰이 유독 눈길을 끄는 건 마이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런 가운데 거리 곳곳의 건물에 핸드폰이 걸리고 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꽤 많은 수의 핸드폰이 여기저기 설치되는 중이다.
다음 순간, 김도준의 영상이 작아지며 상단 위쪽으로 올라간다.
대신 엄마로 보이는 한 여자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의 사진을 찍어 여러 사람에게 보낸 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다중 통화를 하고 있다.
곧이어 그 영상도 위쪽으로 올라가고, 대학생 한 명이 강의실에서 자신이 만든 자료로 프리젠테이션하고 있다. 한데,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탓에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다들 집중력을 잃지 않고 듣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두는 핸드폰을 앞에 놓고 실시간으로 영상을 받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영상.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각자의 방에서 핸드폰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가 이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어서 답답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2배속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지루하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뭘 얘기하고 싶어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몇몇 영상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중이었다.
최초로 소리가 들려왔다.
지이이이잉.
기타 음이다.
그와 동시에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영상들 중에 김도준의 영상이 천천히 확대된다.
그러곤 연주와 함께 김도준의 노래가 거리 곳곳에 걸린 핸드폰을 통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모여드는 사람들.
‘세상의 중심에서’란 노래가 그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모든 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의 가사. 그럼에도, 이기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모여 팀을 이루고, 또 소통하며 더욱더 넓게 확장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노래가 끝나고, 카메라는 명동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비춘 채였다.
그때, 화면 중앙에 자막이 떠오른다.
- 당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이끄는 길.
김도준의 영상과 오버랩되며 여타의 영상들이 하나둘 빠르게 교차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환하게 웃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얼굴이 비친다.
- 그 길을 N9가 함께 걸어갑니다.
화면이 흩어지듯 흐릿해지며 광고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삼겹살집 안에 침묵만이 가득하다.
광고가 끝나고 모 회사의 라면 광고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글거리며 고기 굽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와! 대박!”
그 말이 시작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함께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 돼?”
“안 그래도 핸드폰 바꿀 때 됐는데, 잘됐다.”
“근데, 김도준 진짜 노래······.”
“야! 듣겠다!”
“뭐가? 칭찬도 못 하나?”
“아무튼, 노래 좋네. 캬! 세상의 중심에서···라! 이거 꼭 날 위한 노래 같지 않냐?”
“글쎄요. 김 과장님보단 김 과장님 자녀분을 위한 노래 아닐까요?”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웃고 말았다.
적어도 말아먹은 거 같진 않네.
“우리 도준이, 진짜 수고 많았다! 많이 먹어.”
마루 누나가 내 앞에 있는 소스에 삼겹살 한 점을 막 놓아주었을 때였다.
“저기······.”
“······?”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돌아보니, 여자들이 서 있다.
뭔가 해서 눈을 깜박이고 있자, 그녀들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종이랑 연필을 내민다.
“사, 사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 그럼요!”
얼른 받아서 사인을 해준 후였다.
“사, 사진도······.”
“이리 주세요.”
마루 누나가 끼어들어 그녀들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녀들이 방방 뛸 듯 기뻐하다가 고맙다고 인사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이젠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거절하지 않고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어주었다.
나중에는 가게 사장님도 나오셔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벽에다 걸어놓는다나 어쩐다나.
덕분에 사진 한 장이랑 사인 한번 해주고 삼겹살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뒤, 마루 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럼 이거 도준이가 산 건가?”
“그런 셈이군.”
“그럼 2차 가요!”
마루 누나가 신나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께서 핸드폰을 받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셨다.
“지금 봤습니다. 아, 예. 잘 됐군요. 그래요? 저희야 좋죠. 도준이도 좋아할 겁니다. 예, 예. 일단 물어보겠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은 뒤, 아저씨께서 날 바라보신다.
뭐지?
입꼬리가······.
진짜 이번엔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자, 아저씨께서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내뱉으신다.
“N9 말이다. 예약주문이 쇄도 중이라네?”
뭐야? 좋은 소식이잖아?
광고를 찍은 상품이 대박 났다는 얘기.
난 또 무슨 얘기를 한다고.
순간 허탈해져서 한숨을 폭 내쉬고 있을 때, 아저씨께서 훅치고 들어오셨다.
“그래서 팬 사인회 한번 하자는데?”
***
광고가 나가는 시점에 맞춰 출시한 ‘세상의 중심에서’는 광고가 나간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것도 1위로 진입했다.
당연히 나머지 곡들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줄을 세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음원 차트 10위 곡들 중에 6위까지가 내 노래란 얘기다.
게다가 포털 검색어 순위에서도 내 이름이 다시금 1위에 오르더니 아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갈수록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게시글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검색사이트를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심지어는 방송마다 ‘세상의 중심에서’에 대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는 중이다.
고 팀장님은 또다시 방송국 피디들에게 들볶이는 중이었고.
마루 누나의 말로는 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생들을 위주로 ‘세상의 중심에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된 건 물론이고, 가는 곳마다 ‘세상의 중심에서’가 흘러나오고 있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음원 사이트에서 ‘세상의 중심에서’를 다운 받은 횟수가 10위까지의 곡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고도 하는데······.
신드롬이란 말은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듯, 내 이름과 ‘세상의 중심에서’ 그리고 아스트로 N9의 광고가 다시 한 번 9시 뉴스에서 다뤄졌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대기업의 위력을 실감했달까.
S그룹에서 작정을 했는지 시도때도없이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TV만 틀면 나오는 건 물론이고, 인터넷, 옥외 광고판, 극장까지. 영상을 내보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광고가 흘러나오는 중이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이번 광고의 테마곡이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의 중심에서’ 역시 이슈가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어쨌든 ‘세상의 중심에서’가 이 정도까지 인기를 끌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나로선 얼떨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저씨께선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런 게 진짜지.”
팬 사인회가 있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
최 회장이 전화를 받은 건 회의가 막 끝난 점심 무렵이었다.
모르는 전화번호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일단 통화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시답지 않은 전화면 끊어버릴 심산으로.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나요, 김호.
K그룹의 김호 회장이었던 것이다.
전화번호를 어찌 알았나 생각하다가 사인을 받아달라던 날,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던 걸 기억해냈다.
“혹시 사인 때문에 전화 주신 거요?”
서로 간에 어차피 할 얘기는 그것밖에 없었으니, 빙빙 돌릴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대놓고 물었을 뿐인데, 상대방은 조금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 뜻밖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함께 점심으로 냉면이나 한 그릇 하십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해 보이다 말했다.
“그렇게 하시구려.”
궁금했지만, 묻진 않았다.
그거야말로 이쪽 패를 먼저 까 보이는 것밖엔 안 될 테니까.
뭔지는 몰라도 저쪽에서 전화를 걸어온 이상, 나가보면 결국 알게 될 일.
다만······.
도준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까닭은 어째서일까.
살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전화를 끊고 난 최 회장은 이 실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삼청동으로 좀 가지.”
이 실장은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지시가 있으면 따를 뿐이다.
그는 최 회장을 모시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 차에 올라 출발하려는 찰나였다.
뒷좌석에서 최 회장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자네도 도준이 광고 봤나?”
이 실장은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아마 그 짧은 시간에 최 회장이 묻는 진의를 파악했을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도준이의 음악에는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는 거 같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가 삼각지에서 서울역을 지나 광화문에 이를 때까지도.
“대체 내가 뭘 놓치고 있었던 걸까?”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는 최 회장을 이 실장은 룸미러로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조언을 하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
삼청동에 위치한 고급 한식당. 10년 전만 해도 정·재계 인사들이 모임을 갖곤 하던 요정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일반인들도 곧잘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곤 해도 겨우 냉면 한 그릇 먹자고 이곳까지 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다.
물론 식당 측에서도, 최 회장이나 김호 회장도. 누구 하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엔 별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밀담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까닭이다.
중요한 건 무얼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디서 얘기를 하느냐인 것이다.
최 회장이 약속장소에 도착한 것은 정오를 조금 넘어선 시각.
이 실장이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 최 회장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안내에 따라 김호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최 회장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김호 회장과 마주앉았다.
두 사람의 앞에는 맛깔스럽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냉면 한 그릇씩이 놓여 있었고.
“드십시다.”
“그럽시다.”
두 사람의 냉면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20분 남짓. 미닫이문만 닫으면 밀폐된 공간이 되는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은 그제야 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어째서 만나자고 했는지 눈빛으로 묻고 있던 최 회장에게 김호 회장이 말했다.
“광고 잘 봤소.”
순간 최 회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셨다니 고맙구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최 회장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부글부글 끓는 속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더 이상 이 얘긴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최 회장은 가져온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김호 회장은 의아해 하면서 봉투 안을 확인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손녀딸이 부탁한 사인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 아래쪽에 호쾌한 글씨체로 쓰인 도준의 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호 회장은 사진을 다시금 봉투 안에 갈무리하곤 최 회장을 응시했다.
그러곤 다짜고짜 말해왔다.
“광고 좀 하나 찍읍시다.”
“크음.”
예상했던 말인지라 최 회장은 아무런 대꾸 없이 불편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호 회장이 다시 말했다.
“곧 개장하는 리조트가 하나 있는데, 김도준 군이 모델이 되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오.”
마음 같아선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고!’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홍보실에서 그쪽 회사에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질 않는다지 뭐요? 그러니 어쩌겠소? 최 회장께 부탁 좀 드리겠소.”
웃음 밖에 나오질 않는다.
물론 내색하진 않았지만.
대기업에서 그 정도도 처리하지 못한다고?
그게 아니겠지.
저쪽에서 이미 제안을 거절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연줄로 타고 들어가 좀 더 쉽게 가려는 걸 테다. 그만큼 도준이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방이, 그것도 한 그룹의 회장이 직접 만나면서까지 부탁하는 데야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알겠소. 내 한번 물어보리다.”
“고맙소.”
“고맙긴 뭘.”
어차피 전해주지도 않을 건데.
최 회장이 내심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자, 김호 회장이 진정 부럽다는 듯 얘기했다.
“허허허. 최 회장이 자식 농사는 참 잘 지었다 싶소. 하아! 내 자식놈들은 하나같이······. 쯧, 말을 마십시다. 이러고 있으니 속만 아픕니다, 그려.”
순간 최 회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뭐랄까.
복잡하달까.
흐뭇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채로 최 회장이 말을 돌렸다.
“얘기 끝났으면, 이만 일어나도 되겠소? 오후에 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말이오.”
“아! 그러시구려. 나도 마침 회의가 하나 잡혀 있어서······.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그때 보십시다.”
그렇게 최 회장은 김호 회장과 헤어져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 실장에게 물었다.
정말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노기가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였고.
“우린 광고 찍을 거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