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 신드롬(5)
C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 한편에 자리한 레스토랑은 최혜원이 옛날부터 곧잘 드나들던 곳이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았던 까닭이다.
특히 밤에만 느낄 수 있는 도심의 정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장소도 좋고, 자신을 그렇게나 예뻐해 주던 아버질 만나는 자리이니 걸음이 급해질 만도 하지만 최혜원은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약속시각보다 10분 정도 늦게끔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뒤에서 유모차를 끌고 온 여자가 보이자 먼저 타라고 비켜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서며 본 창가 자리에선 아버지인 최 회장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속으로는 웃음이 났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선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앉아계신 아버지와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최혜원의 표정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털썩.
이윽고 자리에 다다라 인사도 없이 의자에 앉자, 아버진 곧바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신다.
“오라고 한 게 언젠데 이제야 낯짝을 디미는 거냐?”
“차가 막히는 걸 전들 어떡하겠어요?”
“큼. 음식은 내가 알아서 시켜놨다.”
“잘하셨네요.”
말은 저렇게 하시지만, 직접 주문했을 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미 이곳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 실장이 다 조치해 놓았을 터다.
그로부터 음식이 나오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혜원의 표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불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았고, 가끔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면서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최 회장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상이다.
불쾌하다는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뜩 일그러진 표정. 가끔 한 번씩 자신의 딸을 노려보기도 하며 못마땅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온 후에는 더했다.
두 사람은 정말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식사 후엔?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대화라곤 나누지 않고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이 만난 지 한 시간이 넘어가는 동안 나눈 얘기라곤 처음에 나눴던 몇 마디가 다였던 것이다.
그렇게 찻잔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도저히 못 참겠던지, 최 회장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말투 속엔 못마땅함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
최혜원은 단박에 눈치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쳐다만 볼 뿐이다.
“무슨 소리세요?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하셔서 나왔더니.”
“크음.”
표정을 보아하니, 여기가 레스토랑이 아니었으면 상이라도 엎었을 기색이다.
그녀는 충분히 이해했다.
한두 해 본 아버지가 아니니까.
뭣 때문에 나왔는지, 또 뭘 묻고 싶은 건지.
아니, 여길 왜 나온 건지 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 몰래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가 곧바로 지워내며 그녀가 물었다.
“도준이가 걱정되시긴 하나 보죠?”
대답은 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아버지. 최 회장은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아하니, 잘들 사나 보구나.”
“그이가 워낙 성실하잖아요? 민준이도 정신 차렸는지 요즘 일 배운다고 새벽부터 나가고요.”
진짜 궁금해하는 도준이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다.
딸년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일찌감치 간파한 최 회장이 콧잔등을 몇 차례 씰룩거리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사진들과 엽서 따위를 살펴보던 최혜원이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반색했다.
“어머? 얜 민지잖아? 호호호. 정말 몰라보게 컸네.”
반갑다는 듯 얘기하는 딸을 최 회장이 쏘아보다가 툭 하고 내뱉었다.
“도준이 팬이라더라.”
“어머! 정말요?”
“사인받아와.”
그러곤 대답조차 듣지 않고 일어서는 최 회장. 지금 아버지가 민망해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최혜원이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이상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도준이 팬이라는데, 당연히 해줘야죠. 호호호. 그나저나 우리 아들, 진짜 인기 많네. M 건설 막내딸이 사인해달라고 하는 걸 보니. 진짜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났을까? 역시 날 닮아서 그런······.”
드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최 회장이 그곳을 떠나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최혜원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왜?
아버질 너무 잘 아니까.
속으로 숫자를 셀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셋을 세기도 전에 최 회장이 돌아섰다.
괘씸하단 표정을 하고선.
그런 채로 버럭 고함쳤다.
레스토랑이 떠나가도록.
“도준일 업어 키운 게 나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돌아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최 회장의 음성이 뒤통수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씩씩거리며 사라져버린 아버지.
그제야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는 최혜원의 입가에 미소 한줄기가 스쳐 갔다.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선 아버진 우리 회사 전담 변호사가 되셨다.
처음에는 차라리 지금 다니는 로펌을 나와서 독립하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진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은 올라갈수록 주변 정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게다.”
흠, 알 것도 같긴 한데······.
뭐,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대신 이번 광고 계약 건을 시작으로 아버지께서 HS 매니지먼트의 전담변호사가 됨으로써 모르긴 몰라도 로펌에서의 입지가 조금이나마 단단해지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광고계약서에 사인도 하셨다.
친권자로서 말이다.
그 후 아버지께선 변호사로서 협상에 나서서 자잘한 문제까지 전부 해결한 후 광고 계약을 체결하셨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께서 사진 몇 장과 엽서 따위를 가져오셔서 좀 황당하긴 했지만, 부탁하신 대로 사인해 드렸다.
누구한테 받으신 건지는 몰라도 그깟 사인 백 장, 아니 천 장이라도 해 드릴 수 있는 거니까.
그렇긴 한데······.
나 진짜 뜨긴 떴구나.
요즘 들어 부쩍 실감하는 중이다.
벌써 8월이 지나 9월로 접어들고 있었는데도 차트 순위가 크게 바뀌질 않고 있었다.
이를 두고 음악계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 이름과 SIDE B가 거론되며 신드롬 운운하는 것도 이젠 좀 익숙해졌달까.
실제로도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는 중이었고.
아저씨께서 거금을 들여 마련한 SUV는 팬들의 낙서로 뒤덮이다시피 한 상태. 처음 봤을 땐 폐차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 앞에는 어린 학생들로 보이는 팬들이 여기저기 쪼그려 앉아 있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쉽사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요즘은 예전보다 더 일찍 회사로 오는 중이다.
새벽 5시.
다행히 그 시간에는 팬들이 보이질 않았다.
집에 갈 때야 임시로 고용한 경호팀들이 차가 빠져나갈 때까지 팬들을 막아주었고.
예전처럼 마트에 가는 거?
꿈도 못 꿀 일이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인기가 많은 건 분명 좋은 일인데, 편한 걸로만 따지면 예전이 훨씬 나았다.
말 그대로 지금은 새장에 갇힌 새 꼴이 되고 말았달까.
툴툴거리고 있자, 마루 누나가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힘들어?”
“그런 건 아닌데요.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질 거 같진 않네요.”
“호호호. 그게 우리 도준이 장점이지.”
“그런 장점은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좀 거만하게 구는 것도 귀여운 맛이 있으려나?”
에휴, 말을 말지.
푼수처럼 굴다가도 내 얘기만 나오면 엄마 미소를 짓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할까.
“근데, 아까부터 무슨 곡을 그렇게 쓰고 있어?”
“아, 별거 아니에요. 광고에 제 곡을 좀 썼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힘들겠네.”
“이미 다 썼는데요, 뭘.”
딸랑.
그때, 문이 열리며 고 팀장님이 들어오셨다.
딱 보니 팬들한테 어지간히 시달리셨나 보다.
로드 매니저 없이 고 팀장님이 날 데리고 다니다 보니, 다들 팀장님을 매니저로 아는 까닭이었다.
상의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안에 받쳐 입은 와이셔츠가 늘어진 게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날 부르신다.
“도준아.”
“예.”
“가자.”
“어딜···요?”
궁금해서 되물을 때, 고 팀장님은 이미 돌아서고 계셨다.
아니 방금 들어오신 분이 또 어딜 가자고······.
딸랑.
문이 열리며 아저씨의 음성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어디긴? 광고 찍으러 가야지.”
***
건물을 나서자마자 몰려드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경호업체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차에 올랐다.
그러곤 명동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광고 촬영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고 팀장님이 부드럽게 차를 몰아 막 한남대교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내가 물었다.
“그냥 SIDE B가 저라는 걸 밝힐까 봐요?”
“뭐하러?”
“그야······. 신드롬 운운하는 것도 좀 닭살스럽고. 나중에 괜히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요.”
아저씬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날 가만히 바라만 보셨다.
그러다가 불쑥 얘기하신다.
“일단······. 나중이고 나발이고 문제 될 건 하나도 없고.”
“······.”
“한창 잘 타고 있는 장작에 물을 끼얹을 까닭도 없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다만······.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아서 영 마뜩잖을 뿐.
그래서 다시 말하려는 찰나였다.
“도준아.”
“예, 아저씨.”
“그 곡 버린 건 너였다.”
“그랬죠.”
“주운 건 나였고.”
“예. 그러셨죠.”
“그때, 그 곡 내 마음대로 쓴다고 했었지 아마? 그걸 또 네가 오케이 한 걸로 기억하는데?”
틀림없는 사실이라 뭐라 반박할 얘기가 없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께선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물으셨다.
“버린 자식도 자식이란 생각이라도 든 거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 곡들 챙겨서 네가 직접 부르고 싶은 거냐?”
“······.”
“브랜드도 차별화 전략을 쓰는 시대다. 김도준과 SIDE B. 그 둘의 차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지.”
얘기를 듣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아저씨께서 덧붙이셨다.
“넌 하고 싶은 노래를 하고, 난 네가 어딜 가든 무시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비즈니스를 한다. 그게 싫으면 언제든 얘기해.”
자연스럽게 다가온 손 하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길에서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끼며 대답했다.
“예. 그럴게요.”
그리곤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였다.
“근데, 아까 신드롬이라고 했냐?”
“아, 예······. 여기저기서 그런 얘기들을······.”
픽 하고 웃으신다.
그러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신드롬은 개뿔이.”
“······?”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구먼.”
***
정 회장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배포 하난 마음에 드는군.’
그는 며칠 전 보고를 받곤 그만 웃고 말았었다.
강혁수라고 했던가?
뭐, 그 정도는 돼야겠지.
녀석을 케어하려면 그 정도 배짱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나올 테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가.
1억을 줘도 감지덕지할 걸, 무슨 고무줄도 아니고 5억으로 늘렸다가 3억으로 줄여?
그 와중에 계약기간은 제 입맛에 맞춰 1년으로 만들어버리고?
닳고 닳은 장사치는 아닌데, 제법 비즈니스 감각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녀석에게 기초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겠지.
“자퇴했다고 했던가?”
하지만, 역시나 진짜 마음에 드는 건 녀석이었다.
결단력이 있고, 머리도 좋다.
거기에 쇼맨십도 있다.
무대에 대한 장악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진짜 대단한 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안다는 거다.
‘이거야 원······.’
부르르르르.
핸드폰이 진동하자, 정 회장은 액정을 확인하곤 통화버튼을 눌렀다.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보고였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정 회장이 중얼거렸다.
“최 회장이 애 하난 잘 키웠군.”
어릴 때 몇 차롄가 보았던 녀석의 얼굴을 떠올린 정 회장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