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 신드롬(3)
집에서 쉬고 있는데 마루 누나에게서 톡이 날아왔다.
확인해보니, 인터넷 주소 하나가 링크되어 있다.
뭘까 싶어서 눌러보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아침자 기사였다.
- 김도준이란 이름 석 자가 대한민국을 진동시키고 있다. 항간에는 SIDE B라는 작곡가와의 수준 차이를 논하며 비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그건 중요치 않다. 이미 많은 이들이 김도준의 노래가 주는 감성에 빠져 있으며, 그가 지닌 매력에 심취한 상태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김도준 노래를 듣고 있거나 그의 동영상을 보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략)
······아이돌이 대세가 되어버린 음악계에 신성처럼 나타난 김도준이 세대를 아우르는 감성을 앞세워 이처럼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고 있는 데엔 누가 뭐라고 해도 그의 탁월한 작곡실력과 뛰어난 노래 실력 때문이란 걸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입에서 입으로 퍼지며 하루가 다르게 그의 노래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게 아닐까.
본 기자는 이를 신드롬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부를지 모르겠다.
모쪼록 앞으로도 김도준과 같이 틀에 박힌 기존의 벽을 부수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수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며, 김도준이란 가수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건 뭐, 거의 격찬 수준이다.
이 정도로 날 칭찬하는 기사를 써준 기자가 누군지 궁금해 살펴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한신문 연예부 기자 곽미영.
익숙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가 이내 고마움을 느꼈다.
기사를 잘 써줘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나에 대해서 깊이 알려는 고민의 흔적이 보였고, 또 그렇게 될 때까지 내 노래를 진지하게 들어줬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언제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일요일 오후, 희주는 도준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음악을 끄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러곤 문을 열고 나갔다.
역시나 예상대로 할아버지셨다.
그 옆에는 골프 가방을 내려놓고 계시는 아버지가 서 계셨고.
“아이고, 우리 예쁜 손녀. 집에 있었구나. 그래, 오늘은 뭐 하고 지냈누?”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핸드폰과 반도체만으로도 세계적인 기업이라 할 수 있는 S그룹의 총수가 손녀딸 바보라는 사실은 이미 재계에 쫙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버님 오셨어요?”
정 회장에게 인사를 한 희주의 어머닌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앞치마를 두른 채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거실 테이블 위에 간단히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정종을 좋아하는 정 회장의 취향에 따라 안주들은 대부분 전이나 부침, 그리고 과일들이었다.
“이번에 내놓는 N9 광고는 어떻게 할 테냐?”
“글쎄요. 기존 광고와는 달리 가보려고요.”
“컨셉은 잡혔고?”
“일단 도전적인 이미지를 앞세워볼까 합니다.”
“도전이라······. 보여주기 쉽지 않을 텐데? 거기에 마땅한 모델도 구하기 어려울 테고. 요즘 것들은 툭하면 사고를 쳐대서 언제 어떻게 이미지가 추락할지 모르는데······. 생각해둔 이는 있느냐?”
“안 그래도 몇 명 추려서 검토 중에 있습니다.”
“이왕이면 어릴수록 좋겠구나.”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아버진 갑자기 얘기를 하다말고 희주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러곤 뜻밖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김도준이라고······.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김도준?”
옆에서 듣고 있던 희주가 눈을 빛내자, 아버지가 그녀에게 윙크를 한차례 하더니 웃으며 얘기했다.
“희주 친구이기도 합니다.”
“희주?”
정 회장은 자신의 손녀딸을 한차례 바라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혹시, 어릴 때 희주랑 곧잘 어울려 놀던 그 아이 말이냐?”
“올해까지만 해도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들의 얘기에 정 회장은 손녀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알 것도 같다는 눈빛이었다.
“그래? 한데, 여기서 그 아이 얘기를 왜······.”
그때였다.
희주가 슬쩍 옆자리로 옮겨오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요즘 도준이 인기 많아요.”
그녀는 할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곤 핸드폰을 내밀어 동영상 하나를 튼다.
화면에서 광안리 썸머 페스티벌에서 도준이 노래 부르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한참 뒤, 정 회장이 물었다.
“영문을 모르겠구나? 그 아이가 왜?”
“실은 도준이가 가수로 데뷔했거든요.”
정 회장이 뜻밖이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주는 빠르게 얘기를 이어갔다.
“진짜 핫하다니까요. 팬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곤 곧바로 음원 차트를 보여준 후, 도준의 팬 카페까지 보여주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도준의 인기가 어떠한지 확실한 지표가 나와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SIDE B와 관련해서 거의 신드롬처럼 번져가는 도준의 인기였다.
인터넷상에 수없이 올라와 있는 기사들과 블로거들의 글들. 그걸 찬찬히 훑어보던 정 회장은 힐끗 희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열심히 설명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손녀딸. 녀석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기사들과 게시글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끔 한 번씩 눈을 번뜩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그러는 사이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이 상당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조바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대한신문의 곽미영이란 기자가 쓴 기사에선 글자 수를 세듯 꼼꼼히 읽기까지 한다.
한참 후, 핸드폰을 희주에게 건네며 정 회장이 말했다.
어투에선 묘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내일 회의 한번 하도록 하지.”
***
간만에 어머니와 함께 온 마트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은 단지 장을 보러 나왔다기보단, 그 자체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 보였다.
“아들. 이리로 와봐.”
어머니도 다르지 않으셨다.
도통 내 팔에서 손을 뺄 생각을 안 하신다.
그런 채로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시며 묻고 계셨다.
“이거 어때? 너 우엉조림 좋아하잖아.”
진짜 신바람이 나셨나 보다.
“우리 아들 닭백숙 해줄까?”
“어머! 갈치 진짜 좋다! 조림으로 해줄까? 바짝 구워줄까?”
“배추 얼마씩 해요? 호호호. 아니요. 우리 아들이 겉절이를 좋아하거든요. 그렇죠? 우리 아들 진짜 잘 생겼죠?”
콧노래까지 부르며 벌써 몇 바퀴를 돌고 계시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동네 주민들과 부딪힐 수밖에.
“안녕하세요, 소연이 어머니.”
응? 누구지?
다소 지친 얼굴로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드님 신가 봐요. 듣기론 그렇게 공부를 잘한······.”
소연이 어머니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꽥 지르더니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뭐가 어떡해?
난 조금 어이가 없어서 바라볼 따름이었다.
“소, 소연아! 너 지금 뭐하는······.”
역시나 이번에도 소연이 어머닌 말을 잇지 못했다.
소연이라고 불린 여중생이 날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주니 오빠!”
“······!”
화들짝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적극적인 여중생의 공세를 버텨내기엔 무리였다.
후다닥!
내 앞으로 와선 핸드폰부터 들이댄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 짧은 새에 엄청 찍어대네.
그러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된 건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소연이었다.
“죄, 죄송해요. 오빠. 저도 모르게 그만······.”
울 것 같은 얼굴로 눈까지 글썽거리는 그녀를 보자니, 헛웃음도 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치만······.”
이제 울먹거리기까지 한다.
안 되겠다 싶어서 말했다.
“사인해줄까요?”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지는 소연. 그녀에게 다가가며 얼른 주위를 둘러보지만, 마트 한가운데서 종이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울상이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나란히 선 채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살며시 빼내어 들어 올렸다.
“웃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게 나올 텐데?”
“핫!”
참네. 중학생이라 그런가? 태세 전환이 엄청 빠르다.
금세 활짝 핀 꽃처럼 웃어 보이는 그녀.
찰칵.
핸드폰에 찍힌 사진을 보니, 언제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였는지 꽤 다정한 포즈로 찍혀 있다.
그녀 역시 만족했는지 활짝 웃더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오빠!”
“아뇨. 저야말로 고맙죠.”
소연이 아쉬운 듯 멀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어머! 우리 아들 인기 많네?”
“그러게요.”
나로서도 좀 의외였다.
팬인 모양인데,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짜였어!”
“와아아아아아! 주니 오빠아아아아아!”
“형님! 사인해주세요!”
“김도준! 김도준! 김도준!”
갑자기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하는 학생들. 그중에는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물론이고 스무 살이 훨씬 넘은 여자들까지 섞여 있다. 뿐만 아니라 남학생들도 가끔 보였다.
아무튼, 나를 중심으로 새까맣게 몰려든 사람들로 안 그래도 복잡한 마트 안이 말 그대로 북새통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얼핏 보니 누군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 SNS 화면이 보였다.
큭! 아까 소연인가 하는 여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그 아래엔 ‘주니 오빠와 마트에서 한 컷.’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그다음은 뻔하다.
거기가 어디냐부터 지금도 있느냐 등등 댓글들이 달렸을 테고, 때마침 마트 안에 있던 이들이 떼거리로 몰려든 거겠지.
“아들?”
“예?”
“웃어야지. 널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인데.”
“그, 그래야죠.”
하, 인기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
마루 누나한테 어제 마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더니 아주 웃음보가 터졌는지 깔깔 웃고 난리도 아니다.
한편에서 SNS 홍보를 하고 있던 고 팀장님도 평소답지 않게 입술만 살짝 끌어올린 채 웃고 계셨다.
한데, 둘 다 비웃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다.
그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날 아낀다는 거니까.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봐봐. 순위 또 올랐다?”
한참 후 웃음을 멈춘 마루 누나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 화면을 보여준다.
[뮤직넷 실시간 순위]
1위. LONGING TIMES. - 김도준
2위. 마음대로 해 - 김도준
3위. 비가 오는 거리 - 김도준
4위. 내가 없는 자리 - 박성훈
5위. 춤을 춰 - 김도준
6위. 4.5 - 올인원
7위. CROSS - 씨크릿걸즈
8위. 리스크 - 김도준
9위. TODAY - MK
10위. 여름축제 - 비스코
드디어 내 노래가 전부 10위 안으로 진입했다.
한데, 예상과 다르게 ‘LONGING TIMES’가 1위다.
그리고 ‘마음대로 해’와 ‘비가 오는 거리’가 2위와 3위를 차지해버렸다.
마루 누나 얘기로는 SIDE B와의 논쟁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아니, 아예 불이 붙을 대로 붙어서 대한민국을 활활 불태우는 중이라나?
덕분에 김도준이란 이름과 SIDE B라는 정체불명의 작곡가는 대중들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다는데.
이게 다 아저씨의 진두지휘하에 두 사람, 고 팀장님과 마루 누나가 만든 결과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다.
아무튼, 그로 인해 인터넷상에선 신드롬이란 표현을 대놓고 사용 중이고, 심지어는 아홉 시 뉴스에 잠깐이나마 이 현상에 대해 보도되기까지 했다.
신드롬이라니······.
진짜 기가 막혀서.
혀를 내두르며 마루 누나가 보여주는 게시글들과 댓글들을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말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아저씨가 대표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얘기하신다.
아, 진짜 그러지 좀 마세요.
왜 만날 입만 열면 그렇게 폭탄선언을 하시는 거냐고요.
“도준아, 너 광고 들어왔다.”
***
최 회장은 이미 도준의 음악을 들었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뿐만 아니라 이 실장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로 이성원의 뮤직캠퍼스도 시청했다.
마지막에 도준이 부른 ‘LONGING TIMES’도 당연히 들을 수 있었다.
그걸 들으며 최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한다.
노래······. 잘한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잘한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외손자는 한낱 딴따라 따위가 아니라 대한민국 법조계를 쥐고 흔들 정도로 뛰어난 머리와 배포를 지닌 아이였다.
조금만 자신이 밀어주면, 이건 단지 상상 따위가 아니라 기정사실이 될 거라는 걸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다음은 탄탄대로.
만일 도준이 원한다면 정계로 진출해서 대통령까지 노려볼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고, 그게 아니라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자신의 회사를 물려줄 요량도 있었다.
핏줄?
누군 친가 쪽이 아니니 온전한 혈육이 아니라 반쪽짜리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도준은 자신을 똑 닮았고,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특하기까지 했다.
다른 자식들한테 그룹을 물려준다고 생각하면 언제 망할지 모를 만큼 불안감이 들곤 했지만, 도준이라면 오히려 사업을 확장시켜 어쩌면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으니까.
그런 마당에 핏줄 타령은 무슨.
도준이라는 아이는 그런 평범한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게 최 회장의 생각이었다.
한데, 그 아이가 가수란다.
그것도 지금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허어······.”
진짜 못마땅하다.
고놈이 능력이 많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다.
몇 년 하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건만.
이건 아예 자신의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손을 떠나 이제 훌훌 날아가 버린 셈이다.
그게 너무 아쉽기만 해서 한숨만 나온다.
드륵.
무심결에 열어본 책상 서랍 안에 사진들이 들어 있다.
전경련 회의에서 만났던 회장들이 건네준 사진들.
사인을 받아달라며 쑥스럽게 웃던 회장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저걸 보고 있으니 더욱 심란해졌다.
아니, 그러니까 왜!
노래 하나만 가지고도 세상을 이렇게 떠들썩하게 만드는 놈이!
어째서 기껏 한다는 게 딴따라냐고!
진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또다시 머리에 화기가 치밀며 열불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정말 뒷목을 잡고 쓰러질 판이다.
탕!
최 회장이 거칠게 책상 서랍을 닫고 말았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누가 왔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 실장을 부른 건 자신이었으니까.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이 실장을 바라보던 최 회장이 물었다.
“알아봤나?”
“예. 안 그래도 보고서 작성 중이었습니다.”
“입 놔두고 쓸데없이 그런 짓은 뭐 하러 해.”
이 실장은 속으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겐 철저한 보고 체계와 빈틈없는 일 처리를 강요하는 인물이 바로 최 회장이었다.
장부에서 숫자 하나, 서류에서 글자 한 자만 틀려도 그날은 회사 전체가 뒤집어지는 날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자신에겐 유독 친근하게 대하고 있다.
그것이 오랫동안 회장님의 수족으로서 온갖 더러운 일까지 마다치 않고 해온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뢰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회장님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분의 자식들보다 자신이 더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만은, 아니 새롭게 불거진 문제만은 제대로 분석해서 올리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속에서조차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이 실장은 다소 딱딱해진 음성으로 얘기했다.
“도준이가 소속된 회사는 재무구조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신생회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만, 대신 꽤 견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회사 대표인 강혁수는 연예계 쪽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인맥이 넓고 대단히 영민하다는 평가입니다. 무엇보다도 누굴 속이거나 할 인물이 못 된다는 걸 고려하면 도준이의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지금의 도준에게 가장 합당한 회사라는 생각입니다.”
간단하지만, 최 회장이 알고 싶어 하던 걸 정확히 짚어 보고하는 이 실장. 그 때문인지 최 회장은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에 잠기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실장은 볼 수 있었다.
최 회장의 눈을 스쳐 가는 빛들을.
서운함과 안도감, 그리고 안타까움과 분노. 그것들이 한데 섞여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 모든 감정이 나직한 한숨이 되어 최 회장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수고했어. 그만 나가 봐.”
살짝 쳐진 음성으로 얘기했지만, 이 실장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 회장은 뭔가 더 남은 게 있다는 걸 직감하곤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곤 눈빛으로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느냐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아직까지는요.”
“무슨 말이지? 좀 더 정확히 얘기해 보게.”
“오늘 아침에야 알게 된 정보입니다. 그 때문에 한창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알겠으니까, 냄새 그만 풍기고 얼른 본론부터 얘기해.”
아까완 달리 손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흘리는 최 회장이었다.
이 실장은 본래의 회장님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며 빠르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S그룹에서 광고 모델로 도준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흠칫.
사족이다 싶을 정도로, 별거 아닌 일을 왜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가 싶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최 회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봐. 지금 누가 누굴 어떻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