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 도배 해봤어?(2)
이성원은 가수출신이지만, 작곡가 겸 기획사 대표로 더 성공한 사람이다. 그 이면에는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와 풍부한 무대 경험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현재 여러 방송매체에서 활발한 활동 중이다.
또한, 많은 후배들에게 멘토로서 조언을 해주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가수들을 양성하는 중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프로그램은 뭐니 뭐니 해도 이성원의 뮤직캠퍼스였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방송이기도 하고, 프로그램 자체에 출연하는 가수들의 면면이 대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다른 음악방송과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가수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진짜 괜찮을까 모르겠네.’
그는 지금 리허설을 위해 걸어 나오고 있는 김도준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요새 진짜 핫하던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이성원입니다.”
손을 내밀자, 김도준이 두 손으로 공손히 잡아온다.
“말씀 낮추세요. 선배님. 저야말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성원은 김도준이 적어도 인성 면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한번 잘해봐요.”
그때부터 메인 피디의 지시에 따라 리허설이 진행됐다.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 중인 세션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방청객들과 어떻게 호흡하는지, 또 어떤 식으로 쇼가 진행되는지 상세하게 말해주는 걸 김도준은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리허설이 끝나고 이윽고 방청석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
방송 녹화 시작 전, 나는 대기실에서 다시 한 번 프로그램의 진행순서가 적힌 걸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저 고 팀장님이나 스텝 중 한 명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늦게 고개를 들었다.
“벌써 나가나요?”
“아뇨. 조금 시간이 남아서 찾아와 봤어요.”
뜻밖에도 대기실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성원이었다.
“아, 선배님!”
놀라서 일어나자, 이성원은 푸근한 미소로 손짓했다.
“그냥 앉아 있어요.”
“그래도 어떻게······.”
“아이고. 그럼 내가 뭐가 되나? 내 말대로 해요.”
그의 얘기대로 떼어냈던 엉덩이를 도로 의자에 붙이면서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음, 그럼 그럴까?”
이성원은 내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실은 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예? 부탁이요?”
그는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미소.
“무슨 부탁인지는 몰라도 말씀하세요.”
“다 들어줄 거처럼 얘기하네?”
“그래도 선배님이신데······. 가능하면 그러려고요.”
“내 회사로 옮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씨익.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아요. 가능하면 이라고.”
“그건 불가능하단 얘기군.”
아무런 대답도 없이 웃고만 있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 표정 보니까······. 반쯤은 진담이었는데, 그냥 농담이라고 우겨야 되겠다.”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진지해진 얼굴로 얘기하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진짜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빈말이 아니라, 진짜 놀랐어. 욕심 같아선 확 납치라도 하고 싶다니까.”
“그럼 저희 아저···대표님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라요.”
“마음 같아선 그렇다는 거지. 근데, 그 곡들 네가 쓴 거라면서?”
“예.”
“그래서 말인데······.”
“······?”
“곡 하나만 좀 써주면 안 될까?”
“예? 곡이요?”
***
녹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 팀장님이 물으셨다.
“아까 리허설 끝나고 이성원이 왔다 가던데, 뭐라고 하디?”
“그냥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곡 좀 달라네요.”
“그래?”
이미 날이 저물어서 잔뜩 어두워진 도심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일단은 회사에 물어본다고 했어요.”
“넌 어떤데?”
“줘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 어차피 모든 곡을 저 혼자 쓸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여기까지 얘기했다가 예전 생각이 나서 킥하고 웃었다.
“버려봐야 아저씨가 또 주울 텐데요, 뭐.”
“대표님이 안 주워도 내가 주울 거다.”
“그거나 그거나죠.”
신호가 떨어지자, 고 팀장님은 부드럽게 차를 몰아 좌회전을 하면서 말씀하셨다.
“그럼, 작곡가 이름은 SIDE B로도 나가고, 김도준으로도 나가겠구나.”
픽 하고 웃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뇨.”
응? 하는 눈빛을 해 보이는 고 팀장님께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
8월 셋째 주 금요일 밤 10시.
희주는 TV 앞에 앉아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화면 상단에 찍혀 있는 글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이성원의 뮤직캠퍼스.
초대손님은 김도준.
떡하니 떠올라 있는 이름 석 자를 보며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그러모은 채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느라 애쓰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후회했다.
그날, 도준이 학교를 떠나던 날 너무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걸 얼마나 후회했던가.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통화는커녕 까똑 한번 보내지 못했다.
여기엔 도준이 이미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만큼 서운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놓고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그였다.
그럴수록 도준을 떠올리는 시간은 많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은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그가 데뷔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연락하지 못했다.
혹여라도 또 상처 되는 말을 들을까 봐.
그랬다가는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할 테니까.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너무나 후회된다.
그가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듯, 자신도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채 다가갈 것을······.
“후우.”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이제 와 돌이키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연락하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
그렇게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방송이 시작되었다.
- 안녕하십니까. 이성원의 뮤직캠퍼스를 진행하는 이성원입니다.
방청객들의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오고, 곧이어 이성원이 푸근한 인상으로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 요즘 날씨가 덥죠. 근데, 이분을 보면 더 더울 겁니다. 아니, 뜨거워질 겁니다. 자, 모셔보도록 하죠. 여러분의 가슴을 뜨겁게 달궈줄 남자, 김도준 씨를 모시겠습니다.
함성이 터지고 무대 위로 도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희주는 이제까지 기분이 잔뜩 다운되어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흥분이 몰려들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TV 화면에 떠오른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뺨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캬! 저 자식, 큰 거 봐라.”
석준은 리모컨을 든 채 구시렁거렸다.
아무리 하루하루가 다르게 크는 나이라지만, 이젠 거의 180센티가 다되어가는 도준을 보자니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아니, 사실 짜증이 나는 건 그 때문이 아닐 터였다.
녀석을 처음 봤던 건 유치원 시절. 그때부터 단짝이었다.
먼저 다가간 것도 그였고, 늘 녀석을 따라다닌 것도 자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쪽팔린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누가 먼저 다가가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가 생각하는 친구란 그런 거였다.
모든 걸 털어놓을 순 없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려줄 수 있는 관계.
그런 친구이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는 도준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미친 듯이 공부에만 파고들 때 일부러 피해 주기까지 했다.
어차피 평생 볼 친구니까.
그가 대법관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설마하니 녀석의 가슴속에 음악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을 거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게 못내 서운했다.
아니,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하긴, 따지고 보면 늘 그랬다.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나 다름없는 자신을 제대로 봐준 건 언제나 녀석뿐이었다.
형들과 비교를 당하고 잔뜩 혼이 난 다음 날, 마음에 안 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시비를 걸며 시작된 싸움.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누군가와 주먹질을 주고받을 때도 도준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패거리들이 몰려오자, 도준은 거침없이 교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싸움에 뛰어들었었다.
뭐, 결과적으론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양호실에 드러누워 있어야 했었지만.
그런 놈이었다.
반면에 자신은?
주둥이만 살아서, 녀석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젠장!”
누가 알았겠냐고.
저 샌님 같은 자식의 가슴속에 그처럼 뜨거운 열정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희주 생일날, 손가락에 피가 맺히도록 기타를 쳐대던 도준의 모습이.
처음엔 정말 많이 놀랐다.
그리고 다음에 든 생각은······.
솔직히 말해 부러웠다.
지켜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도준은 어느새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자신에겐 뭐가 있지?
그 생각이 이제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느끼고 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잘해라. 자식아.”
그는 마치 자신에게 얘기하듯, TV 화면에 비친 도준에게 속닥거렸다.
***
도준의 사촌인 최석진은 지난번 일로 인해 요즘 살판이 난 상태였다.
왜?
얄밉도록 잘난 김도준의 몰락을 지켜보았으니까.
“미친놈.”
진짜 웃기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나 아껴주시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깟 음악이 대수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다니.
할아버지께 도준의 얘기를 은근슬쩍 흘리면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최석진이었다.
설마하니 연을 끊다니.
진짜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무릎 한번 꿇고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끝날 일인데, 기어이 음악을 하겠다고 사달을 일으킨 놈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정히 음악을 하고 싶으면 그냥 할아버지 모르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 정도 융통성도 없는 놈한테 여태껏 열등감을 느꼈다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다.
최석진은 TV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도준을 한껏 비웃느라 문이 열리는 줄도 몰랐다.
아니, 뒤늦게 알아차리곤 시선을 돌렸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뭐하는 게냐!”
언제 들어오셨는지 할아버지께서 무서운 얼굴로 TV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뇨. 그냥······.”
팟!
얼른 TV를 끄고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선 이미 등을 돌리고 계셨다.
“늦었다. 얼른 자라.”
2층으로 올라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최석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보셨다.
TV에 도준이 나오는 것을.
그런데도 저런 반응이시라는 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고 있던 비서실장이 그를 무슨 쓰레기라도 되듯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던 최석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늦은 밤이지만, 어머닌 소파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신다.
그 옆에선 아버지께서 캔맥주 세 개를 가져다 놓곤, 땅콩을 까 드시고 계신다.
그럼 형은?
바로 앞에서 아버지의 캔맥주를 힐끔거리며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중이다.
요즘 PS 엔터테인먼트에서 일을 배우는 중이라고 하더니, 술맛을 알아버린 모양이다.
하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술을 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 아들 멋지기도 하지!”
이성원의 소개와 함께 내가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어머닌 뭐가 그리 좋으신지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신다.
민망해라.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괜스레 구시렁거렸다.
“이거 저도 꼭 봐야 해요?”
아니, 솔직히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 저걸 꼭 봐야 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모니터링?
그건 이미 회사에서 다하고 있을 텐데.
봐라.
까똑!
지금 이 순간에도 마루 누나로부터 쉴 새 없이 까똑이 날아드는 중이다.
아주 그냥 실시간 중계라니까.
그런데 내가 이걸 볼 필요가 어디 있냐고.
그것도 가족들이랑 같이.
진짜 창피한데······.
“어머! 그게 무슨 소리니? 우리 아들이 처음 TV에 나오는 건데, 당연히 온 가족이 함께 봐야지!”
하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이상 뺄 수도 없잖아요.
한숨을 폭 내쉬었을 때, 이성원의 입에서 첫 질문이 흘러나왔다.
- 김도준 씨? 이거 참 어색하네요. 열일곱 살이라고 하셨는데, 그냥 김도준 군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 예. 저도 그러시는 게 더 편할 거 같네요.
- 그럼, 그렇게 하죠. 아무튼, 요즘 핫한 걸로 아는데 어때요? 팬들이 많아지니까 좋아요?
- 그야, 나쁘진 않죠. 아무래도 제 노랠 좋아해 주신다는데 그저 감사할 뿐이죠.
- 그럼, 일단 여기서 김도준 군의 노래부터 한 곡 듣고 갈까요? 이번에 발매한 앨범 더 퍼스트의 타이틀 곡이죠? ‘마음대로 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