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 클래스가 다른 공연(1)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다.
덕분에 입만 벙긋거릴 뿐 그게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그 사이, 콜린이 커피가 반쯤 남아 있는 유리컵을 들어 올리며 감탄하고 있다.
“이야! 이거 무슨 커핀데, 이렇게 맛있냐?”
“그러게. 지난번 이탈리아 갔을 때 마셨던 거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
“내가 볼 땐 콜롬비아산 원두를 쓴 게 분명해. 근데 좀 달긴 하다. 시럽 너무 넣은 거 아냐?”
“그래? 난 딱 좋은데? 근데, 마실수록 입에 착착 달라붙네. 모카도 아니고 라떼도 아닌 게 미묘한 맛이란 말이야.”
다들 한마디씩 하며 믹스 커피에 대한 품평들을 하고 있다.
저 얘길 외할아버지께서 들으셨으면 입이 찢어지다 못해 귀에까지 걸리지 않으셨을까?
상상만으로도 웃겨서 픽 하고 웃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연락처를 뒤졌다.
아, 여기 있네.
뒤이어 막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찰나였다.
타다다닥!
잽싸게 튀어나온 네 사람.
누가 한팀 아닐까 봐, 엄청난 연계 플레이다.
어느새 내 오른쪽 손목은 꽁지머리를 한, 갈색 피부톤의 남자 손에 잡혀 있었고, 왼쪽 손목 역시 오늘 처음 본 다소 덩치가 있는 백인 남자가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핸드폰은 이미 콜린의 손을 거쳐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한테 건너간 뒤였다.
정말 눈 깜짝할 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콜린이 서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운해 보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이거 이거. 우리가 너무 우습게 보인 모양이네? 제롬?”
내 핸드폰을 들고 있던 남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맞아. 브라이언 전화번호야. 아마 1초만 늦었어도 연결되었을 거야.”
“증거는 확보했고. 이제 자백만 받으면 되겠군.”
나 원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내저으며 되물었다.
“먼저 약속한 건 브라이언이었는데?”
“아니지. 우린 같은 뮤지션이잖아? 그게 무슨 말이겠어? 바로 영혼으로 묶인 사이란 거지. 그런데 어떻게 비즈니스 관계에 불과한 브라이언과 비교를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으으, 온몸이 오그라들 것만 같아서 미치겠다.
“······일단 네 동료들한테 나를 좀 놓아달라고 얘기해주지 않겠어?”
비릿하게 웃어 보인 콜린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을 해 보였다.
“그렇겐 안되지. 먼저 약속부터 해. 우릴 배신하지 않겠다고.”
브라이언한테 연락하는 게 왜 이들을 배신하는 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슬슬 손목이 저려 오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저기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킥킥거리고 있는 마루 누나가 도와줄 거 같지도 않고 말이다.
“알겠어. 약속할게.”
콜린의 푸른 눈동자가 얼굴 앞으로 다가오더니, 느끼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너의 영혼을 걸······.”
“알았어. 알았으니까, 쫌!”
진짜 이러다간 닭이 될 것만 같아서 버럭 소리쳤다.
피식.
한차례 웃어 보인 콜린이 고갯짓을 해 보이자, 그제야 양쪽 손목을 놓아준다.
“좋아. 널 믿도록 하지.”
“그래서 여긴 왜 온 건데?”
“다들 널 보고 싶어해서 말이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날 보고 싶어한 걸까?
“왜?”
손목을 주무르며 묻자, 콜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방금까지완 달리 꽤 진지해진 얼굴이 장난은 여기까지란 느낌이었다.
“지난번에 베릴이랑 나만 널 보고 왔다고 얼마나 날 볶아대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던 콜린이 말했다.
“베릴의 연주가 완전히 달라졌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때였다.
눈앞에 스윽 하고 손 하나가 내밀어 져 있었다.
두툼한 살집. 한눈에도 내 손의 두 배는 됨직한 손이었다.
“디알로 웰스. 이 밴드의 비주얼을 맡고 있지.”
어디가?
얼굴은 둘째치고, 한 20킬로그램은 빼야 간신히 평균체중을 따라잡을까 말까 하구만.
그래도 이 남자의 드럼 실력이 진짜 장난 아니란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이것도 다 노래방에서 습득한 지식 덕분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진심으로 자기가 잘생겼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일인데······.
속내를 감추고 손을 맞잡았다.
“김도준. 알다시피 17살이야.”
“음악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지? 아직 모르나 본데, 이 바닥은 무조건 음반 판매 순이야. 아니, 실력순인가? 아무튼, 정말 만나고 싶었다.”
남자한테 고백 같은 거 듣고 싶진 않은데······.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꽁지머리를 한 남자가 다가왔다.
갈색 피부에 커다란 눈을 보니 히스패닉 계열로 보인다.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난 유진. 세계 제일의 키보디스트지.”
안다.
키보드를 무지막지하게 잘 친다는 것 정도는.
그렇긴 한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쪽은 이쪽대로 정상이 아닌 거 같다.
어딘지 모르게 살짝 잘난척하는 느낌에 까칠한 성격일 거 같달까.
“옙! 제롬이야. 이 팀의 막내지.”
열아홉 살이란다.
동안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냥 나이가 어린 거였다.
그래서 그런가?
세계적인 베이시스트로 이름난 제롬 휴이. 그의 인기는 상당하다. 이쪽이야말로 비주얼 담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쪽 소파에 가만히 앉은 채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남자. 베릴이 말없이 손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여전히 과묵하네.
그나마 이 밴드에서 정상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나?
나 역시 그에게 손을 들어 올리곤 엷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마루 누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대체 언제 온 거에요?”
“너 나가고 얼마 안 있다가.”
“그럼 연락 좀 주시지.”
마루 누나가 손가락을 들어 콜린을 가리켰다.
아, 그런 의미인가?
난 콜린을 살짝 흘겨보곤 혀를 찼다.
“아주 작정하고 왔나 보네.”
한국말로 중얼거리자, 콜린이 물어왔다.
“지금 설마 우릴 욕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래서 숙소는 잡은 거야?”
“아니. 공항에서 곧바로 이리로 온 건데?”
“한국 택시! 원더풀!”
갑자기 디알로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끼어들었다.
무슨 말인가 해서 눈을 가늘게 해 보이자, 콜린이 설명해준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더군.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딱 한 시간 걸리더라고.”
아니 날아온 것도 아니고, 그게 가능해?
기가 막혀서 바라보자, 제롬이 싱긋 웃어 보이며 얘기한다.
“200달러 준다니까, 갑자기 흰 장갑을 끼더라고.”
놀라운 얘기긴 한데······.
아! 안 되겠다.
자꾸만 이야기가 옆으로 샌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셈인데?”
“응? 이미 말해뒀는데?”
“······?”
“여기서 먹고 자는 걸로.”
“······!”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나 싶어서 마루 누나를 바라보자, 이번엔 누나가 시선을 안쪽으로 던지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저만치서 아저씨께서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댄 채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계셨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쓰는 연습실을 그들에게 통째로 내주게 됐다.
아, 물론 잠자리는 따로 준비했다.
어차피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었기에 공간은 문제가 될 게 없었고, 아저씨의 전화 한 통에 접이식 침대 5개가 배달되었다.
R사에서 나온 침대는 보기와 달리 꽤 편안해서 레이크헬의 멤버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해서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연습실에서 먹고 자고 하며 모든 걸 해결했다.
한마디로 시간만 나면 악기를 연주하고, 머리만 맞댔다 하면 곡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이 그냥 도망쳐 온 게 아니란 걸.
새로운 앨범을 내기 전에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들의 음악성이 어느 순간부터 정체되어 있다고 느낀 걸까?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그들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틈만 나면 날 달달 볶아댔다.
기타 좀 쳐봐라, 베이스도 한번 쳐봐라, 스틱 좀 놀려봐라······.
가끔은 자기들이 만든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라대기도 했다.
뭐 나로서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종일 사무실에서만 죽치고 있는 것도 이상해서 물어봤었더랬다.
“관광 안 해?”
“뭐? 투어?”
“응. 서울 구경 말이야.”
다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내젓는다.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곤 또다시 악보와 악기에 파묻혀 미친 듯이 파고들 뿐이었다.
진짜 골수까지 악쟁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참, 원래 음악을 시작하는 동기가 대부분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라던데······.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대체 뭐가 이들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물었다.
“콜린. 너무 초조해하는 거 아냐? 계약상으로 앨범은 앞으로 4년 안에 두 장만 더 내면 되는 거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건데?”
콜린이 대답 대신 날 빤히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너.”
“응?”
“쟤들한테 불을 붙인 게 바로 너라고.”
일순 황당해져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내게 그가 말했다.
“우리도 열일곱 살 때 너만큼은 했어.”
“······.”
“하지만, 미국인이지. 너처럼 한국인이 아냐.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우리 나이쯤 되면, 아마 미국인들도 알게 될 거야. 아니, 열광하게 될 거야. 김도준이란 싱어가 그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순간.”
“그게 무슨 말이지?”
“소울.”
“······?”
“그래 네 목소리엔······.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돼 미국을 거쳐 영국, 독일 그리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간 소울이 깃들어 있단 얘기야.”
뜻밖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쟤들이 널 인정한 거야. 그리고 느낀 거지. 지금 넋 놓고 있다간 결국 뒤처지게 될 거란 걸.”
다소 놀라서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자, 콜린이 돌아서기 전 덧붙였다.
“저래 보여도 다들 음악에 미친놈들이거든.”
몸을 돌려 연습실로 들어가는 콜린.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7월 셋째 주 토요일.
한국에서 R&B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박성훈이 컴백했다.
타이틀 곡은 ‘내가 없는 자리’.
SIDE B라는 정체 모를 작곡가가 만든 곡에 대한민국 최고의 작사가로 이름이 높은 ++(투플러스)가 가사를 쓴 이 곡은 발표되자마자 7개의 대형 음원 사이트를 올킬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물론 일주일 전에 신곡을 발표했던 블루스톰도 10위권 언저리를 맴돌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마음대로 해’는 77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리고 팬카페의 회원 수가 세 자리로 바뀌었다.
그 사이, 레이크헬은 미친 듯이 작곡 중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연습실을 지나치려는데, 머리를 맞대고 끙끙대는 그들이 보였다.
뭔가 싶어서 슬쩍 문을 열고 보니 역시나 곡을 쓰는 모습이다.
저러고 있으면 안 지겹나?
내가 보기엔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은데······.
좁은 공간에서 저러고만 있은 지 벌써 며칠째냐고.
나 같으면 당장에 뛰쳐나가서······.
부르르르르르.
바지 주머니 안에서 내 핸드폰이 진동한 것도 그때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방해된 거 아닌지 모르겠다.
눈치를 보던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응?
화면에는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준영이 형. 무슨 일이에요?”
-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는 사이냐?
“하하. 그렇진 않죠.”
- 그렇지? 우리 사이가 겨우 그 정도는 아니지? 흠흠. 근데, 이번엔 볼일이 있어서 전화한 게 맞아.
“예? 무슨······.”
- 곧 8월이잖아.
뭐지?
요사이 레이크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곧바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준영이 형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얼씨구? 진짜 잊고 있었나 보네? 곧 시작하잖아? 광안리 해변 축제.
“아!”
뒤늦게 탄성을 터뜨리곤,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형. 요즘 진짜 정신이 없어서요.”
-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올 수 있는 거지? 축제가 다음 주 토요일부터인데, 오프닝 뛰는 데 문제 있으면 안 된다.
“그럼요. 오프닝은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요.
- 정말이지?
“걱정 말라니까요.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갈게요.”
- 그렇지. 다리가 부러져도 와야지. 이미 광고도 다 나갔는데. 아무튼,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한다?
“예, 형. 아저···대표님께도 그렇게 얘기해 놓을게요.”
- 오케이. 그럼 그때 보자.
전화를 끊은 뒤,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뭐야? 방금 오프닝 어쩌고 한 거 같은데. 너 무슨 공연해?”
언제 왔는지, 콜린이 옆에 서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레이크헬 멤버들이 날 바라보고 있는데······.
뭐야? 왜 저렇게들 눈을 반짝이는데?
살짝 부담스러워져서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
“공연은 공연인데······. 축제라고나 할까. 거기서 오프···.”
“축제?”
“으, 응. 광안리라고 부산에 있는 해변······.”
“해변!”
누군가 크게 외치고, 또 누군가는 묻고 있었다.
“그럼 해변에서 공연한다는 거야?”
내 입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