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 한 번만 들으면(4)
도대체 뭔 소린지.
아니, 왜 여기서 레이크헬을 찾냐고.
황당해져서 물었다.
“지금 중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 그랬지.
과거형이다.
이 말은 지금은 아니란 얘기.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영어라는 게 참 그렇다.
나보다 세배는 더 살았을 사람한테 꼭 반말로 지껄이는 듯한 이 느낌은 뭘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나이 많은 아저씨랑 친구처럼 지내는 게 또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노래방에 오래 있었더니 그런가.
이상하게 편하단 말이야.
- 어제까진 있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자식들이 사라져버렸더라고.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듯 얘기하는 소리를 듣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들었던 걸 떠올리며 날짜를 헤아려보니 문제 될 게 없어 보인다.
“투어는 며칠 전에 끝난 거 아니에요?”
- 그거야 그렇지.
“그럼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뭐, 어디 관광이라도 갔나 보죠. ”
- 휴우. 여권을 가지고 관광을 나가진 않지.
여권?
흠, 비행기를 탔다는 얘기네.
“아무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애들도 아니고, 돌아올 때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죠.”
다시금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뭐, 사정은 알겠다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싶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혹시라도 레이크헬 보게 되면 연락 줄게요. 그럼 되는 거죠?”
- 부탁할게.
“오케이. 그럼,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고선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연락을 주긴 줘야겠지.
레이크헬을 보게 된다면 말이지.
하지만, 그럴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한다는 거지.
미쳤다고 그들이 여길 오겠냐고.
월드투어도 마쳤겠다, 간만에 간섭하는 사람도 없겠다, 그럼 갈 곳은 뻔한 거지.
우리에서 탈주한 원숭이는 본래 숲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나 같으면 무조건 휴양지로 직행한다.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아마 지금쯤 풍광 좋고 햇볕 따스한 남태평양 어딘가에 있겠지. 이를테면 하와이라든가.
그 어딘가에서 썬베드에 누워 느긋하게 칵테일을 마시고 있을 다섯 남자를 떠올리자 또 한차례 웃음이 흘러나왔다.
***
딸랑.
학원에서 회사로 바뀐 뒤에도 안 바뀐 게 딱 하나 있다.
문을 열 때마다 딸랑거리는 종.
새삼스레 문 위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종을 바라보다가 픽 하고 웃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사무실을 한차례 둘러보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고 팀장님은 어딜 가셨는지 보이질 않고, 마루 누나만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대체 뭘 보고 있는지 히죽거리는 게······.
좀 무서운데?
다시 나갈까?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마루 누나가 뒤로 넘어가며 까르르 거리고 있다.
저러다 의자까지 뒤집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오바라고 하기엔 좀 심한데?
대체 뭘 보기에 저러는 건가 호기심이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겨 마루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런데도 누난 내가 왔는지도 모른 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엔 매처럼 눈을 번뜩이며 타자를 두드리고.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의아해져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재밌는 거 있어요?”
“꺄악!”
이상한 타이밍에서 놀라는 마루 누나.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날 흘겨보는가 싶더니 금세 깔깔거리며 얘기했다.
“응. 팬 카페.”
“팬 카페요?”
“응응. 팬 클럽.”
“대체 누구······.”
“누구긴······.”
아닌 게 아니라 마루 누나는 게시글 밑에 달린 댓글에 대댓글을 다는 중이다.
키보드가 부서져라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저 말했다.
“······네 팬들이지.”
“예? 제 팬이요?”
“몰랐어?”
“뭘요?”
“너 팬 클럽 생겼어.”
“어? 언제요?”
“어제.”
***
회원 37명.
주나오라방이라는 기묘한 아이디를 가진 운영자가 운영하는 사이트, 아니 카페였다.
팬 카페를 대충 둘러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시글이랑 댓글을 보니, 셋 중 하나는 남자. 나머진 여자다.
성비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한숨을 쉬는 게 아니다.
마흔 명도 안 되는 회원인데, 어떻게 게시글 숫자가 천을 넘어가냐고.
게다가 게시글마다 달린 댓글은 또 얼마나 많은지.
무슨 채팅방 보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아니 어떻게 나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아?
혹시 어디에 감시 카메라도 달려 있는 거 아냐?
아니면 내부에 스파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까지 알고 있냐고.
원래 팬들은 이런가?
기분이 묘해져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SNS의 위력이지.”
아 놀래라!
기척 좀 하고 다닐 것이지.
언제 들어왔는지 내 옆을 지나가던 고 팀장님이 툭툭 내뱉고 있었다.
“SNS에 올라가면 순식간인 거 몰라?”
그나저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별거 아나라는 듯 얘기하곤 사라지는 고 팀장님이셨다.
자, 잠깐. 지금 그 얘긴 고 팀장님께서······.
“헛! 고 팀······.”
“어머, 내 글에 댓글 달렸네?”
그때 마루 누나가 기분 좋다는 음성으로 외치더니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내 손에서 마우스를 빼앗았다. 그러곤 게시글 하나를 클릭한다.
우리 주니 작업 중인 짤.
화면에 떡하니 떠 있다.
동영상은 아니고, GIF 파일로 흔히들 말하는 움짤이다.
키보드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다가 인상을 팍 구기며 오선지를 끼적거리는 모습이었다.
저건 또 언제 찍었대?
어안이 벙벙해서 마루 누나를 바라보니까, 싱글거리며 눈을 빛내고 있다.
“아침에 올렸는데, 흐흐흐. 그새 댓글이 천 개가 넘었네?”
- 와, 주니 오빠 포스 장난 아님.
- 고독한 예술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심쿵사 할 듯.
- 주니 오빠 인상 쓰는 것도 멋짐. 아, 저 찡그린 이마의 주름이 되고 싶다.
- 난 한 가닥 속눈썹이 되어 하루 종일 눈동자만 바라봐도 행복할 듯.
- 난 콧구멍······.
- 난 이, 입ㅅ······. 꺄아아아악, 말 못해, 말 못해, 맛 뫳ㅎ!
- 근데, 이런 자료는 어디서 구함?
- 혹시 관계자?
누군가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마루 누나가 씨익 웃는다.
불안한데?
방금 살짝 눈동자가 번들거린 것도 같고······.
불길해져서 얼른 노트북을 치우려는 순간, 마루 누나가 매처럼 낚아채 갔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누가 작사가가 아니랄까 봐, 타자 속도가 장난 아니다.
- 응응. 맞아. 지금도 내 옆에 주니 있음.
팟!
플래시가 번쩍이고, 사진 한 장을 찍어 잽싸게 노트북으로 옮기더니 무지막지하게 빠른 손동작으로 자신의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해서 곧바로 올려버린다.
그러자 게시판에 난리가 났다.
순식간에 댓글이 백 개를 넘어간다.
아니, 회원이 37명이라며?
상식적으로 산술이 안 되는 상황에 어이없어하는데, 그새 마루 누나가 댓글을 달고 있었다.
- 봤음? 지금 알바 중인데, 주니랑 한 컷.
관계자라는 걸 밝히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은 내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 개부러움.
- 아, 짱나! 거기 어딤? 나도 알바 할래.
- 부르면 달려감.
- 당장 사표 쓰고 간다.
- 주니 형, 존잘 포스.
- 평소 모습 그대로인가 보네요.
- 뭘 입어도 감출 수 없는 자태.
- 늘어진 티셔츠도 어울릴 듯.
- 형님! 우리 팬 미팅 한번 하죠!
- 다 필요 없고, 당장 까똑 프사 바꿈.
“흐흐흐. 이런 자료는 나밖엔 올릴 수 없다는 거지. ”
마루 누나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잘난 듯 말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 감자탕! MJ에서 전화 왔는데?”
“에? 거기서 왜요?”
“거기 줬던 곡들, 가사 좀 바꿨으면 한다네?”
“미쳤나 봐! 지들이 뭔데 가사를 바꾸라 마라야!”
씩씩거리며 고 팀장에게로 달려가는 마루 누나를 보다가 게시글의 작성자를 확인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디······.
주니냥.
으으,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도 들었다.
아, 물론 마루 누나 때문이 아니다.
37명밖에 안 되지만, 날 좋아라 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게.
왠지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살짝 움켜쥐고 있을 때, 저만치서 아저씨께서 부르신다.
“도준아. 잠시 내방으로 와봐라.”
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만 내민 채 말씀하시는 아저씰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팬 카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대한신문이라고 알지?”
아저씨의 질문에 나 역시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거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내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신문사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아저씨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씀을 이어가신다.
“거기서 너랑 인터뷰 좀 하자고 해서 오케이 했는데, 괜찮지?”
“예. 전 괜찮아요.”
“그럼, 일정 잡는다?”
“그렇게 하세요.”
더 이상의 용무는 없다고 지레짐작하곤 일어나려는데, 아저씨께서 손짓하신다.
그대로 앉아 있으란 신호였다.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었다가 도로 주저앉고 있는 사이, 아저씬 어딘가로 전화해 통화를 시작하셨다.
“아, 그럼요. 우리 애가 또 영특하니까, 그 점은 염려 놓으세요. 예? 지금요? 아뇨. 저흰 괜찮습니다. 스케줄이야 꽉 찼죠. 그래도 곽 기자님 오신다는데, 레드카펫은 못 깔아 드려도 시간은 무조건 비워야죠.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아저씨께서 날 바라보셨다.
그러곤 그럴 줄 알았다는 뉘앙스로 얘기하신다.
“지금 온다네?”
무슨 국밥집도 아니고, 그냥 국 푸고 밥만 말면 끝? 일정을 뭐 이런 식으로 잡는 거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만나보면 알겠지만······.”
알겠지만?
“······진짜 프로지.”
왜 저 얘기를 듣는데, 살짝 소름이 돋고 한기가 드는 걸까?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불길한 예감에 말했다.
“저, 아저씨.”
“응?”
“그냥 인터뷰 없던 걸로 하면 안 될까요?”
“응. 안돼.”
그런 상냥한 말투로 밝게 웃는 거 진짜 얄밉다는 거 아시나 모르겠다.
***
인터뷰는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눈앞에 있는 여기자의 첫인상?
예쁘다. 그리고 세련됐다.
길거리를 걸으면 남자들이 백퍼 돌아본다에 내 손모가지를 걸어도 좋다.
그런데 이게 첫인상으로 끝난다는 게 문제다.
분위기부터 남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으면 말까진 놓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말투 자체가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엔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가르치려 들기까지 한다.
한데, 이 여자······. 여기자는 그런 게 없다.
처음 들어설 때부터 무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수첩을 집어 들고선 건조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한신문 연예부 기자 곽미영입니다.”
“HS 엔터테인먼트 홍보팀장 고현우입니다. 여기는······.”
“안녕하세요. 김도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고 팀장님의 소개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참······.
한기가 느껴지는 건 아닌데, 더럽게 딱딱하다.
얼마나 딱딱한지, 어지간해선 이빨도 안 들어갈 것 같다.
게다가 은테 안경 안쪽의 눈빛은 또 어찌나 날카로운지.
“그럼 지금부터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고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녀가 곧바로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선 사진부터 좀 찍겠습니다.”
커피잔만 들어 올릴 뿐. 고 팀장은 일체 말이 없으시다.
그러는 동안, 곽미영 기자는 능숙한 솜씨로 카메라를 조작해 들어 올리곤 얘기한다.
“실내라서 플래시를 터뜨릴 겁니다. 눈 감지 말아주세요.”
그냥 좀 찍지.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신경 쓰이잖아.
눈에 힘을 주고 있을 때, 번쩍하며 플래시가 터졌다.
동시에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찍혔네요.”
카메라를 한쪽에 내려놓곤, 핸드폰을 켜서 녹음 어플을 실행한 후 보여준다.
“이제부터 녹음할 겁니다. 괜찮으시겠죠?”
“예.”
“혹시라도 중간에 오프더레코드로 하실 얘기가 있으면 손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예.”
“열일곱 살에 데뷔하셨는데, 그전에 캐스팅을 받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
“외모도 출중하고, 자퇴하기 전까지 성적도 우수했던 걸로 압니다. 거기에 노래까지 잘하고 작곡실력도 상당한 천재. 기획사라면 어디든 탐내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되어 물은 겁니다.”
그냥 온 건 아닌가 본데?
나름 조사는 하고 온 거 같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 민망하게 대놓고 천재 운운하는 건 좀······.
“에이, 천재라뇨. 그런 거 아니에요. 하하하. 칭찬해주셔서 기분이 좋긴 한데,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절대 그렇게 쓰시면 안 돼요. 그럼 저 욕 먹어요.”
해맑게 웃으며 말해보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습니다. 알아보니, 고등학교 진학 후 줄곧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이번에 출시한 음원들도 직접 작곡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첩에 빠르게 기재하면서 다시금 질문을 이어가는 곽미영 기자였다.
누가 기자 아닐까 봐, 집요한 구석이 있는 여자네.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캐스팅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우연한 기회에 아저···대표님을 만나서 데뷔하게 된 것뿐이에요.”
“그럼, 자퇴한 이유는 역시 가수가 되기 위한 겁니까?”
“예. 맞아요.”
“그렇다면 대학에 진학할 계획은 없으신 건가요?”
“대학은 갈 겁니다. 오히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자퇴한 거고요.”
내 얘기에 그녀가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좀 더 파고들어 온다.
“방금 시간 낭비라고 하셨는데, 그만큼 공부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이신가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고 팀장님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곽미영 기자는 서슴없이 핸드폰의 녹음 어플을 중지시켰다.
진짜 약속 하나는 칼같이 지키는 여자다.
그런 그녀를 고 팀장님이 빤히 바라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하셨다.
평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학업에 대한 얘기는 일단 유보하죠.”
곽미영 기자는 고 팀장님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지금 말씀은 노코멘트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면······.”
“엠바고로 가죠.”
“······인터뷰는 하되, 기사를 내는 시기는 따로 정하자는 얘기인가요?”
“들어보시면 알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죠.”
다시 녹음 어플을 실행시킨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대학 진학을 포기하신 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음, 일단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입시를 치를 생각입니다.”
“혹시 목표로 한 대학이 있으신가요?”
싱긋 웃어 보이곤 대답했다.
“예. S 대학이요.”
여기까진 짐작하고 있었던지 곽미영 기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이 얘기는 지금 기사화하는 것보단 나중에 결과가 나왔을 때 터뜨리는 게 좋긴 하겠군요.”
그리고 날 바라보는데, 어째 눈빛이 좀 달라진 거 같다.
뭐랄까.
방금까진 날카롭기만 했다면, 지금은 뭔지 모를 기대감이 어려 있다고나 할까?
쯧, 내가 대학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잔뜩 실망할 거 같은 눈친데?
“작곡은 언제부터 배우셨죠?”
곧바로 대답했다.
숨길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두 달? 그쯤 된 거 같네요.”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듯 날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장난이라도 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고 팀장님이 거들자 내 얘기에 힘이 실렸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이고, 말투가 딱딱하긴 이쪽도 마찬가지네.
이왕이면 좀 부드럽게 얘기 좀 해주시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녹음 작업에서 악기들을 직접 연주하신 걸로 아는데, 몇 년이나 배우셨는지?”
픽 하고 웃고는 대답했다.
“좀 됐죠.”
한 천 년쯤?
솔직히 말하면 기절초풍하겠네.
“그렇군요.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그녀는 수첩에 빠르게 기재하면서 다시금 질문을 이어갔다.
“외가가 D그룹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젠장! 이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하아, 어쩔까?
진짜 난감하다.
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해봐야 이미 다 알아보고 왔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거다.
망설이다가 고 팀장님을 바라보자, 내 눈빛을 읽으시곤 곧바로 손을 드셨다.
다시금 멈춰진 녹음.
이번엔 곽미영 기자가 먼저 묻는다.
“이번에도 엠바고인가요?”
고 팀장님은 대답 대신 날 바라보신다.
내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기에 저러시는 걸 테다.
어쩔 수 없나?
어지간하면 에둘러 말하겠는데, 여기선 대놓고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됐다.
“죄송한데, 집안 얘기는 빼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저씨가 인터뷰를 수락한 걸 보면 친분이 있는 거 같으니, 어쩌면 이 정도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 물은 터였다.
만일 그녀가 흔히 기레기라고 불리는 기자들과 같은 부류라면 씨도 안 먹히겠지만 말이다.
아니, 꼭 기레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기자라면 욕심을 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려나.
재벌이라 부를지 말지는 둘째 치더라도 식품, 그중에서도 음료시장 쪽에선 거의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D그룹 회장의 외손자가 가수로 데뷔했다.
그 과정에서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면?
대중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데 이만큼 자극적인 얘기가 어디 있겠냐고.
문제는 나다.
그 흥미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란 거지.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혹여라도 나 때문에 가족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일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땐 정말 나도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
당연한 얘기지만, 최소한 그렇게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그렇게 내가 속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동안, 고 팀장님이 구원 투수로 나서셨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어려운데, 좀 민감한 문제라서요. 부탁 좀 하겠습니다. 나중이라면 모르겠는데, 당분간은 그냥 모른 척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곽미영 기자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긴, 내가 그녀 입장이라도 그럴 것 같다.
그녀도 기자인 만큼 욕심이 없을 순 없을 테니까.
덕분에 세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죠.”
솔직히 놀랬다.
내 입으로 부탁하긴 했지만,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얘기를 듣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최소한 곽미영 기자가 탐욕에 눈이 먼 기레기따윈 아니란 것.
뭐, 실제로 기사가 나와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잠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그녀는 이미 다음 질문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재개된 인터뷰는 삼십 분가량이 지나서야 끝났다.
***
“기사는 내일 조간에 실릴 겁니다.”
한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곽 기자가 돌아간 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고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곽 기자는 약속을 지킬 거다.”
“······.”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지. 기자가 그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란 얘기다.”
더 이상은 말씀이 없으셨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결국,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해결하지 않는 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얘기니까.
말없이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덧 회사 앞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이게 생애 첫 인터뷰였다는 걸.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게 기묘한 느낌 속에 고 팀장님과 함께 계단을 올라 3층에 이르렀다.
그리고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이-”
로비랍시고 만들어놓은 자그마한 대기실.
그곳, 소파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야자수가 그려진 남방에 반바지 차림을 한 서양인들.
쪼르르르르륵.
한 손에는 마루 누나가 타준 걸로 짐작되는 믹스 커피. 정확히는 얼음이 동동 띄워진 냉커피를 빨대로 빨다 말고 콜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