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 놀다 올게요(7)
“브라이언, 여기가 확실해?”
올백 머리의 백인 남성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야? 지금 날 못 믿는 거야?”
브라이언으로선 그럴 만도 하다.
어쩌다 보니 여기서 이러곤 있었지만, 그는 CDM의 수석 프로듀서. 거물이라면 거물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정작 콜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았지만.
“글쎄. 우리가 놀던 데랑은 좀 다른 거 같아서.”
그때였다.
“콜린.”
갑자기 들려온 베릴의 음성. 콜린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픽하고 웃고 말았다.
베릴의 시선이 건물 지하로 통하는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간히도 몸이 달았다고 느낀 콜린이 중얼거렸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베릴이 기다렸다는 듯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콜린 역시 성큼 뒤따랐고.
“미친! 기어이 들어가는 건가?”
머리를 흔들며 뒤따르는 브라이언. 그의 얼굴은 못마땅하단 표정이 역력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문을 열기 무섭게 뜨거운 열기와 함께 함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관객들은 이미 흥분 상태였다.
“세이버스!”
“세이버스!”
“세이버스!”
연호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다가 무대 위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단.
경쾌한 멜로디의 키보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 시야에서 조금 벗어난 곳. 공연장의 뒤쪽 후미진 곳에 벽을 등지고 서 있던 콜린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나쁘진 않네.”
그가 말한 것은 연주가 아니었다.
분위기를 말하는 거였다.
자신이 데뷔전 공연하곤 했던 클럽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래도 겉에서 보던 것과 달리 공연장을 가득 채운 열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이 무대 위, 한 곳에 꽂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씨익.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변한 그의 눈동자에 기타리스트가 맺혀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중얼거렸다.
“역시, 조작이었나?”
유창한 영어라서 그런가 관객 중 하나가 슬쩍 돌아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콜린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기야 홍대 부근에서 외국인들을 보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콜린은 실망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영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 아니 다른 느낌.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뭐랄까.
뭔가에 막혀 있는 듯한 연주. 시속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70마일의 속도로 던지며 으스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때, 베릴?”
아닌 게 아니라 베릴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여기까지 온 게 헛수고였다는 걸 확인한 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눈치 빠른 브라이언이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그가 툭 하고 내뱉었다.
“이건 시간 낭비야. 차라리 가서 술이나 한 잔씩들 하자고.”
연주소리가 달라진 것도 그때였다.
솔로로 나선 기타가 불을 뿜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잠깐.”
콜린이 손을 들어 올렸고, 베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부터였다.
베릴의 눈동자가 기타리스트의 움직임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한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그 탓에 앞에 서 있던 이들의 불만이 날아들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의 온 신경은 오직 한군데. 무대 위에 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떨더니 그때부턴 간헐적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리기도 하고,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그뿐인가.
뭐가 그리 기쁜지, 마치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듯한 눈빛까지 해 보였다.
누가 보면 딱 게이라고 하기 좋을 만한 표정이었다.
콜린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른 점이라곤 베릴처럼 집중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기타리스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뿐.
그러는 사이 곡이 끝났다.
“좀 치긴 하네.”
브라이언이 마지못해 한소리 하자, 콜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귀로 어떻게 프로듀서를 하는지······.”
울컥한 브라이언이 막 뭐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객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고,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곧바로 공연이 이어졌다.
이번엔 영어로 된 가사가 아닌, 한국말로 들리는 노래였다.
나쁜 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준이 높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곡이었다.
단지 한국어라서 아니었다.
그냥 곡 자체가 평이했다.
안에 담긴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걸 청중들에게 전달하기엔 힘이 한참 모자라는 곡이었으니까.
“이것 참. 안 듣는 게 나을 뻔했군.”
콜린의 말에 베릴 역시 동의하는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 가지.”
“응? 저 친구 안 만나보고?”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브라이언이 눈을 치뜨고 물어오자 콜린이 베릴을 향해 물었다.
“어떡할래?”
고개를 내젓는 베릴이었다.
“저 정도는······.”
“······?”
“얼마든지 칠 수 있어.”
콜린은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잘 치긴 한다.
하지만,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충격 같은 건 없었다.
처음 들었을 때보단 나아지긴 했지만, 그저 그런 강속구에 불과했다.
그것도 90마일을 넘지 않는.
그 정도로라면 더 이상 지켜보고 말고 할 가치조차 없었다.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막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 그대로 가길 바래에에에----
이제까지완 전혀 다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간,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베릴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몸을 돌린 밴드의 보컬리스트인 콜린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브라이언만 할까.
그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믿기 어렵다는 눈이 되어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브라이언. 노래가 끝이 날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 석상처럼 서 있던 그가 관객들의 함성 속에서 중얼거렸다.
“저 친구······. 싱어···였어.”
***
무대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멤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이거 뭐야?”
“진짜 이게 그 곡 맞아?”
“미친!”
지혁이 형이 내 목을 조르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너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응? 뭘 어떻게 하면, 곡이 이렇게 변하는 데?”
“아, 아뇨. 그냥 나도 모르게······.”
“괴물 같은 새끼! 으으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그냥!”
놀라긴 내가 더 놀랐다.
솔직히 무대에서 내려오면 한소리 들을 거란 각오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데, 약속된 바도 없었고, 그렇다고 곡 자체를 어레인지 해놓은 것도 아니다.
덕분에 자칫했으면 공연을 망칠뻔하지 않았나?
형수 형의 기지로 무사히 넘어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잘못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야! 아까 화음 넣은 거 다 기억하고 있지? 그거 이따가 알려줘.”
“그건 왜?”
“딱 느낌이 왔거든. 안 그래도 뭔가 곡이 밋밋하단 느낌이었는데, 거기를 좀 손보면 될 거 같달까? 아, 모르겠고! 그냥 따지지 말고······.”
그때였다.
저벅저벅.
통로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멤버들과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응?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데?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는 거 같고.
그렇다면······.
노래방에서 익힌 가수들의 정보를 떠올리다가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내곤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뭐, 뭐야!”
지혁이 형과 준호 형이 거의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난리 법석이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멤버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침을 꼴깍거리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나, 나 지금······.”
“믿어져? 레이크헬이라고! 마, 말도 안 돼!”
“형! 나···나 좀 한 대 때려봐! 크억! 에이, 씨! 누가 그렇게 세게 때리래!”
지혁이 형과 준호 형이 콩트를 찍고 있는 사이, 세 명의 남자들은 어느새 우리 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 콜린 맥카트가 막 말문을 열리는 찰나였다.
“헤이!”
그보다 먼저 백인 남성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마치 날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깜짝 놀란 내가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나려 했지만, 올백의 금발 머리 남자가 한발 빨랐다.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더니 소리쳤다.
“나랑 얘기 좀 합시다.”
***
세이버스 멤버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이 기막힌 우연, 아니 기적 같은 일에 잔뜩 흥분했고, 당연히 좀 더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무려 레이크헬이다.
더구나 밴드의 리더이며 보컬리스트인 콜린 맥카트와 더불어 현존하는 기타리스트 중에서도 손꼽힌다는 평을 듣는 베릴 커티스가 눈앞에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정은 그렇게 형편 좋게만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을 브라이언이라고 소개한 프로듀서는 곧바로 비즈니스 얘기를 꺼냈고,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이끌고 학원 그러니까 회사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4번 방문을 열고 나온 아저씨가 나를 향해 다가오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들을 보곤 흠칫하더니 이내 묘한 눈빛을 해 보였다.
“놀러 간 줄은 알고 있었다만, 이것 참.”
아저씬 다시 한차례 나와 브라이언 일행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거물들하고 놀고 있을 줄은 몰랐네.”
비꼬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째 억울해졌다.
“그럴만한 사정이 좀 있다니까요.”
예 예 하는 얼굴로 아저씨께서 날 보고는 물었다.
“그래서 놀 만큼 놀은 거냐?”
어?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 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눈치들이 빠른 거지?
아니면, 내가 너무 뻔한 건가?
아무튼, 알고 계신다니 차라리 잘됐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재미는 있었고?”
씩 하고 웃어 보이자, 아저씨께선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곤 시선을 돌렸다.
이제까지 날 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매우 정중하고, 그러면서도 빈틈이 없어 보이는.
“HS매니지먼트 대표, 강혁수라고 합니다.”
어라?
영어 발음 죽이는데?
누가 들으면 현지인인 줄 알겠다.
워낙 생각 밖이라 살짝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브라이언이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반갑소. CDM 레코드의 수석 프로듀서, 브라이언 오스틴이오.”
아저씨께서 손을 맞잡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무셨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놀라움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이런 일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