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 놀다 올게요(5)
규철이 형을 만난 곳은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 약속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자, 저만치서 규철이 형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헉헉! 오래 기다렸지?”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숨을 몰아쉬다가 점차 안정을 찾은 뒤, 형은 날 대로변을 따라 안내하기 시작했다.
“멀어요?”
“조금만 걸으면 돼. 한 10분 정도?”
멀다고 하기에도 가깝다고 하기도 애매한 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오르막을 오르면서,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하는 사이 홍대 정문에 이르렀다.
“저쪽에 보이는 건물 있지?”
“예.”
“우리가 공연하는 데야.”
“그래요?”
“응. 일주일에 세 번. 수, 금, 토 저녁에 하지.”
“그럼 어제도 했겠네요?”
“그렇지.”
오늘은 토요일. 잘하면 공연하는 것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일었다.
“우리가 사는 데는 저쪽.”
은행을 끼고 돌아 한참을 걸어가니 골목 안쪽으로 작은 건물과 주택들이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게 보인다.
“지하라 좀 습한데, 괜찮지?”
“신경 쓰지 마세요.”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해 함께 계단을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거?”
내가 벽면에 가득한 낙서들을 보고 있자니, 규철이 형이 멋쩍게 웃는다.
“팬들이 좀 극성이라서.”
아닌게 아니라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낙서들엔 세이버스라는 밴드 이름과 멤버들 이름 그리고 하트 표시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래도 기분은 좋죠?”
“그렇긴 하지. 팬들이니까. 덕분에 집주인한테 몇 번이나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래서 지워보려고도 했는데, 매직이랑 스프레이라서 잘 지워지지도 않아.”
그저 글자랑 그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할 만치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보고 있는 내가 다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철컥.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규철이 형을 따라 발을 들이는 순간, 퀴퀴한 냄새가 훅하고 풍겨온다.
음······.
연습실이면서 동시에 거주공간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난장판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한가운데서 무슨 해표들도 아니고 축 늘어진 채 코를 골고 있는 두 명의 남자는 그렇다 치고, 온갖 과자 봉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찌꺼기들이 말라붙어 있는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 거기에 20평 남짓한 지하공간을 좁아터진 창고쯤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주범은 바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늘어서 있는 아니 굴러다니는 술병들이었다. 아, 찌그러진 채 내팽개쳐 있는 맥주 캔들도 빼놓을 순 없겠다.
게다가 담배들은 어지간히들 피워댔는지 어딘지 모르게 역겨운 냄새가 공기 중에 감돌고 있다. 이건 단순히 환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벽이고 바닥이고 곳곳에 잔뜩 찌든 냄새니까. 뭐, 지하인지라 이렇다 할 창문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인상적인 건 세 군데의 벽이 짙은 회색의 흡음재로 꼼꼼하게 발라져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한쪽 벽면만은 거울로 채워져 있다는 건데······.
“예전엔 댄스 연습실이었다나 봐. 넓은 곳을 찾다 보니, 여기 말곤 마땅한 데가 없더라고. 저기까지 흡음재를 채우려다가 자세에도 도움이 되고, 넓어 보이기도 해서 그냥 놔뒀지.”
규철이 형의 얘기를 들으며 둘러보다가 눈을 빛냈다.
전면에 마주 보이는 전면거울.
그 앞에 설치된 드럼 세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건 둘째치고, 악기에 새겨진 로고 자체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본 Y사에서만 수제로 주문 생산한다는 제품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기대어 있는 악기들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기타는 깁스 레스폴이고, 베이스와 키보드는 야마하 제품군 중에서도 최고급. 내 키만 한 높이의 앰프들 역시 HK사 거로 하나하나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 뿐이다. 아마 다 합치면 어지간한 변두리 아파트 하나는 사고도 남지 싶었다.
그래서 그런가.
악기가 있는 장소만은 깨끗하다 못해 광이 날 지경이었다.
정비도 얼마나 잘해놓았는지 악기들도 번쩍번쩍 윤이 나는 게 파리가 앉아도 미끄러질 듯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꽤 이질적이라서, 마치 20평 남짓한 이 지하 공간에 그곳만이 꼭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악기를 아낀다는 거겠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규철이 형이 물어왔다.
“누추하지?”
“예. 누추하네요.”
응? 왜 그렇게 보지?
너무 솔직히 말했나?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
뭐, 악기 있는 곳은 성스러워 보일 정도로 깨끗하긴 하다만.
규철이 형은 날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픽 하고 웃어 보였다.
“너도 한 싸가지 하겠구나.”
“고맙습니다.”
“······칭찬 아닌데?”
“제가 좀 긍정적이에요.”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근데 지혁이 형은 안 보이네요?”
“걔? 어제 안 들어왔어. 지금쯤 어디선가 여자애랑 뒹굴고······. 응? 너 우리 애들 이름 다 기억하는 거야?”
“에이, 몇 명이나 된다고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 이 형. 생긴 거랑 다르게 유리 멘탈이네. 뭐 이 정도 가지고 눈물까지 글썽거려. 음······. 이래서 음악 하는 건가? 하긴 감수성이 예민하면 음악 하기 좋기도 하겠다. 아무래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긴 좋을 테니까.
아무튼, 코끝이 찡해졌는지 괜스레 손가락으로 코밑을 훑고 있는 규철이 형을 등지고 섰다.
주방이라고 하긴 뭐하고, 싱크대 하나랑 가스레인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을 살펴보다가 눈을 빛냈다.
마침 쓸만한 봉투가 하나 보인다.
날 한 세 번쯤 접으면 들어갈 만큼 큰 봉투였다.
그걸 들고 방바닥에 널려 있는 병들부터 줍기 시작하자, 규철이 형이 얼른 달려와 뺏어 들더니 소리쳤다.
“야! 야!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요. 일단 좀 앉을 자리라도 만들어보려고요.”
“하아······.”
고개를 내저은 규철이 형이 방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놀랍다.
지뢰처럼 여기저기 깔려 있는 잡동사니들, 아니 쓰레기더미를 잘도 피해서 걸어나가고 있다.
“형수야, 준호야. 일어나봐라.”
“으응······. 왜요, 형······.”
“······으···벌써 저녁···이에요?”
꿈틀꿈틀.
거의 벌레 수준으로 꼬물거리며 규철이 형의 발길질을 피하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보다가 웃음을 삼켰다.
저건 자유롭다 못해 그냥 내팽개쳐진 거다.
일테면 방종. 누군가의 눈에는 지금 저들의 모습은 방안에 가득한 쓰레기나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을지도.
그런데도 이상할 만치 기대감이 차올라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는 금세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
형수 형과 준호 형이 일어나고, 함께 연습실을 치우고 있을 때 지혁이 형이 돌아왔다.
구박이란 구박은 다 먹은 뒤, 지혁이 형이 반갑다며 날 껴안으려는 걸 간신히 피한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들 반가워하는 거지?
만약 내가 저들이라면 이렇게까지 날 반겼을까?
그날 일도 그렇고, 동영상도······.
“야, 내가 진짜 그 동영상 몇 번을 봤는지 모른다. 근데, 캬! 진짜 볼 때마다 소름이!”
“우리도 얼른 기타리스트 구해야 하는데······.”
청소를 마친 후였다.
3시쯤 되었을까.
중국집에 전화해서 다 늦은 점심을 시켜먹으면서 형들이 은근슬쩍 날 바라보며 쑥덕거린다.
아니 들으란 건지, 대놓고 얘기한다.
“아, 우리도 기타리스트 있어야 하는데······.”
“도준이가 딱인데. 그치?”
한참 듣고만 있다가 물었다.
“기타리스트는 없어요?”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때까지 쉴 새 없이 젓가락질하고 있던 형수 형까지 멈칫하더니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고 있었다.
진짜 지뢰는 따로 있었네.
뭔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나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자니, 규철이 형이 한숨을 내쉰다.
“얼마 전에 나갔다.”
그러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싸운 건가?
어쩌면 다른 밴드로 가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그때 희주 생일날에도 기타리스트는 보이지 않았었지, 아마.
아무튼, 이 문제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 싶어서 화제를 돌렸다.
“평소엔 뭐하고들 지내세요? 설마 맨날 연습만 하는 건 아닐 테고.”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규철이 형이 픽 하고 웃더니 상냥하게 대답해준다.
“딱히 정해놓은 건 없어. 개인 연습도 좀 하고, 작곡을 한다거나 밤에는 술 마시러 나가기도 하지. 그래도 매일 오후랑 공연이 있는 날은 될 수 있으면 연습을 거르진 않지만.”
그때, 지혁이 형이 내 목을 팔로 감싸며 큭큭거렸다.
“왜? 악기들 보니까 몸이 달아올라?”
“그럼 식혀야지. 자자. 밥도 먹었겠다. 몸 좀 풀어볼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지며 공기가 뜨거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악기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연습이 벌써 한 시간째다.
지이이이이잉.
초킹으로 올린 음을 비브라토로 뒤흔들자, 앰프가 비명을 내지른다.
원래라면 이 타이밍에서 나오지 않는, 아니 나오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크크크. 그거 죽인다, 야!”
“미쳤네, 저 새끼! 김도준! 자꾸 그렇게 내 연주 씹어먹을래? 응?”
웃음이 터지고, 난리도 아니다.
씨익.
나 역시 웃으며 기타를 흔들며 속주를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그러자, 형수 형이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스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타당 탕 탕! 타당! 탕! 타당! 탕! 타다다다다다다!
둥 둥 두······둥 둥 두······.
이에 질세라 지혁이 형이 낄낄거리며 베이스를 연주하고,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웃고 있던 준호 형이 어느 순간 깍지를 끼곤 기지개를 켠다.
그러곤 손을 풀었다는 듯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미친 듯이 건반을 두드려댄다.
네 개의 악기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처럼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규철이 형이 고음을 내지른다.
“You, you say!”
- You, you say, you have lost the way.
Got no aim, just living for now.
Look up to the sky above.
And see the morning sun again.
You got so much power inside.
So yell it out my friend.
넌 길을 잃었다고 말해.
목표도 없이, 단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위의 하늘을 봐.
그리고 아침 해가 다시 떠오르는 걸 봐.
넌 속에 엄청난 힘을 가졌어.
그러니 큰 소리로 외쳐봐.
헬로윈즈의 앨범 중 걸작으로 꼽히는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에서 인트로라고 할 수 있는 ‘Initiation’을 제외하곤 사실상 첫 곡인 ‘I'm Alive’다.
연주시간 1분 22초.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 동안 폭주하는 기관차가 내뿜는 경적처럼, 아니 광기 가득한 울음으로 절규하는 것처럼 폭발적인 에너지가 터져 나온다.
- I'm alive, I'm alive.
I'm alive, I'm alive.
난 살아 있다고, 난 살아 있다고.
난 살아 있다고, 살아 있다고 외쳐봐.
겨우 1분하고도 20여 초다.
규철이 형의 목이 터져라 내가 살아 있다고 외치며 마이크를 치켜드는 순간, 악기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하지만, 그 폭발적인 1분 20여 초간의 연주가 한 시간 동안의 맹연습에 정점을 찍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헉헉헉헉!”
다들 땀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는 규철이 형.
스틱을 쥐고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이는 형수 형.
건반에 상체를 늘어뜨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준호 형.
지혁이 형은 베이스를 내던진 채 바닥에 주저앉아 곧 죽을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미 그의 펑크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서 비 맞은 개꼴이다.
“쿡!”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밌다.
피가 끓는다.
근데, 지금은 힘들어서 미칠 것 같다.
아, 몰라 몰라.
털썩.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러곤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엄청 틀린다.
음이탈은 시도때도없고, 박자도 제멋대로다.
그런데도 희한할 정도로 즐겁다.
혁수 아저씨가 데려온 세션들과 비교하면 전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서툰 솜씨들인데······.
지금의 이 상황이 진심으로 웃겨서 킥킥거리고 있는데, 지혁이 형이 버럭 소리 지른다.
“아, 저 또라이 새끼! 왜 갑자기 웃고 지랄이야! 규철이 형! 내가 그랬지? 저 새끼, 좀 맛이 갔다고!”
“크크크크······.”
웃음이 커져간다.
그리고 그 웃음은 금세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연습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
기이이이이잉.
비행기 한 대가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더니 덜컹하곤 이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츄아아아아아아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인천의 하늘은 유난히 어두웠다.
밤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5월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스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몸을 웅크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이 하루 전까지만 해도 머물고 있던 뉴욕보단 여기가 더 따스했으니까.
드르르르륵.
가장 선두에 선 올백 머리를 한 금발의 백인이 끌고 있는 캐리어 소리가 통로를 울리는 가운데, 그 뒤로 다섯 명의 남자들이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껄렁껄렁 따라오고 있는 중이다.
그중 절반에 해당하는 두 명의 남자는 어깨에 기타인지 악기케이스를 걸머메고 있었다.
잠시 후 입국 심사까지 깔끔하게 마친 그들은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공항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운집해있는 이들의 숫자는 눈대중으로 어림잡아도 수백 명. 그 가운데엔 기자들도 있어서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는 중이다.
펑! 펑! 펑!
눈앞에서 점멸하는 빛무리에 휩싸인 채 멈칫하고만 그들을 경호원들이 재빨리 에워쌌다.
그 사이, 기자들 중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오면 물었다.
꽤 유창한 영어였다.
“이번에 발매한 앨범 홍보차 한국을 방문하신 겁니까?”
대답도 하기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만 콘서트를 하시고, 한국에선 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공식적인 일정이 없던 걸로 아는데, 갑자기 한국을 방문하신 이유는?”
쉴 새 없이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이에도 팬들은 멤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불고 꺅꺅거리며 아우성이다.
그런 가운데, 한층 더 경계를 강화하는 경호원들 사이에서 백인 남성이 나오더니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근처에 있는 기자의 손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아 떨떠름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알다시피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지라, 기자회견까진 준비 못 했습니다. 그래도 애써 찾아주신 한국의 팬들을 위해 질문에는 답해 드려야겠죠. 오늘 이렇게 방문한 이유는······. 음, 그저 앨범 홍보차···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공연에 관해선······. 안타깝게도 이번 월드 투어에선 내부적 사정으로 인해 한국이 빠졌지만, 다음번엔 될 수 있으면 공연을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한국 공연이 무산된 건 PS 엔터테인먼트사와의 협상이 틀어져서 그렇게 됐다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백인 남자는 간단하게 일축했다.
“노코멘트.”
그러곤 마이크를 돌려주곤 돌아섰다.
그땐 이미 공항 관계자들이 조치를 취한 후였고, 경호원들을 따라 VIP들만 따로 이용하는 통로로 서둘러 이동하는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따라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백 명의 팬들이 우르르 몰려 뒤따르다 보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미친 것처럼 눈물을 흘려대며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고함을 내지르면서.
이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그들이 지닌 위상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레이크헬.
2013년 2014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 2회 연속 수상.
2015년 그해 발표한 앨범의 대표곡 ‘SOMETHING OR NOTHING’, 빌보드 차트 1위 6주간 석권.
2016년 빌보드 뮤직어워드 최우수 투어 아티스트상.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몇천만 명이 넘는 팬들을 지니고 있는 밴드가 그들이었으므로.
얼마후, VIP들만을 위한 통로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온 뒤, 기다리고 있던 리무진에 오르기 무섭게 유진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뭐야, 이게? 공연할 것도 아닌데, 직접 와야 하는 거냐고. 그냥 부르면 되잖아?”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부르든지 말든지 하지.”
“아, 그냥 술이나 한잔 마시고 잤으면 좋겠다.”
“저기 콜린, 진짜 찾을 수는 있는 거야?”
“몰라. 그래도 찾아는 봐야지.”
“아, 미치겠네! 우리가 몇 마일을 날아왔는지 알아? 그런데 허탕 치고 빈손으로 돌아가자고?”
“그냥 일본 가는 길에 잠시 들린 거뿐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다섯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백인 남자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콜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걔가 그렇게 잘해? 내가 보기엔 그냥 기타 좀 칠 줄 아는 애송이에 불과하던데.”
혀까지 차며 말하는 브라이언을 모두가 쳐다본 것도 그때였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들을 대표해 콜린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브라이언의 어깨에 팔을 얹곤 얘기했다.
“브라이언. 잘 들어.”
“······.”
“아티스트는 딱 두 종류가 있어.”
“뭐, 뭔데?”
예상했던 것보다 한 템포 늦게 콜린의 음성이 브라이언의 귓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짜와 가짜.”
잠시 벙찐 표정이 되었던 브라이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아, 뭔 소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뭐야? 그 애송이가 진짜라는 거야?”
콜린이 창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뒷좌석에선 기타리스트인 베릴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동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이 된 브라이언이 고개를 내젓다가 베릴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베릴.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그 영상은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벌써 며칠째냐고. 하아, 내가 본 것만 해도 백번은 넘은 거 같은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브라이언이 다시 물었다.
“너도 저 나이 땐 저만큼 쳤을 거 아냐? 아니, 대체 저 애송이한테 뭐가 있다고들······. 세계에서도 세 손가락에 든다는 기타리스트가 저러고 있는 거냐고!”
그때 베릴의 입이 열렸다.
“달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기타 소리가 다 거기서 거기······.”
베릴이 심유한 눈빛으로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아니. 분명 달라. 그런데······.”
“······.”
“막상 치려면 칠 수가 없어.”